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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Jan 12. 2021

핑계 없는 감자국 한 그릇

묵히디 묵힌 용산 감자국 나들이

나는 항상 핑계가 많은 사람이다.

인생에는 피해야 할 것들,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하기 꺼려지는 것들이 많았다. 

먹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몸에 안 좋을 것 같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등 각종 변명과 함께 미루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것,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것들은 기가 막히게 빨리 한다.

의사결정의 회로가 쑥쑥 돌아가면서 방법론과 실행까지 일사천리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극과 극일까. 


첫 브런치북을 내고 차기작 제목을 결정했던 순간, 코로나가 급격히 심해졌고 합당한(?) 핑계 덕분에 어디에도 나갈 수 없었다. 두 달 동안 현실의 삶에만 몰두하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은 음식 이야기였고 이를 글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핑곗거리에서 탈출할 마음을 먹고 처음 전당포에서 꺼내는 이야기가 벌써 석 달이나 묵어 사라지기 직전이었던 초겨울 감자탕 나들이다.


작년 11월 초순,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과 더불어 칼바람이 불어오던 초겨울 일요일.

월말과 초순에 특히 더 바쁜 직장인 H에게 있어 주말, 특히 일요일 아침은 휴식을 위한 시간이다. 

이토록 귀하디 귀한 날, 9시에 일어나는 사치를 누려보았다. 커튼을 걷어보니,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하고 질 무렵 퇴근하는 평일에는 절대 누릴 수 없는 활짝 뜬 해와 눈이 마주쳤다. 개안, 말 그대로 두 눈이 동그랗게 열리고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토요일까지 할 일들은 다 했고, 몸도 가볍고, 무엇보다 배가 좀 고픈데 집에 먹을 게 없다. 

날씨까지 괜찮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날인가보다. 

춥다는 핑계, 귀찮다는 핑계 다 벗어던지고 맛있는 걸 먹으러 '그냥' 나가보자.


"뭘 먹을까?"

혼밥인의 대표적인 난제다.

다행히 오늘은 전제가 몇 가지 있다. 대중교통까지 굳이 안 타도 되는 거리, 적당한 가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먹고 싶은 것'. 

자전거 정도는 탈 수 있으니 15~20분 거리 정도, 만원 정도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한 끼, 기왕이면 자극적이지 않은 국물까지 있으면 좋겠다. 라멘은 주변에 안 팔고, 부대찌개는 조금 양념이 세고, 순두부집은 문을 안 열었다. 구글 전당포의 위시리스트들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그렇게 정해진 오늘의 메뉴는 감자국.

따릉이와 함께 일요일 아침의 한적한 감자국 나들이의 시작.


숙대입구역을 지나 한 때 미군부대였던 기다란 담벼락을 걸어간다.

추운 날씨 속에 잔뜩 떨어진 은행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든다. 춥고, 배고파지는 서늘하고 얼얼한 날씨. 따뜻한 국과 밥이 자연스럽게 생각날 때쯤, 후암동의 50년된 감자국집 '일미집' 앞에 도착했다.


얼얼한 손을 주무르며 문을 여니 주문은 가뿐하게 생략되었다. 

'백반 하나 들어가요!' 

마치 뒤에 들어올 일행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아주머니의 스웩 넘치는 판단력, 그 정확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군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직까지 내 마음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한다. 듬성듬성 썰어놓은 생마늘과 풋고추 몇 개, 쌈장에는 시크함이 가득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감자국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일미집'의 감자국에는 핑계가 없다. 큼지막하게 들어간 돼지 뼈다귀 세 조각, 알감자 한두개, 우거지 조금. 감자의 맛을 숨길 수 있는 깻잎 등 향신채를 거의 쓰지 않아 푹 익힌 고기 특유의 쫄깃함과 감자의 달달함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 

핑계 없이 장판파 앞에 서 있는 장비처럼 먹는 이와의 대결을 고대하기라도 하는 뼈다귀의 자태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국물 한 숟가락 가득 입 속으로 넣어보았다. 

진하다. 돼지고기 그대로, 감자 그대로 적당한 기름과 섞여 뱃속으로 따뜻하게 들어간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뼈를 건져낸 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만큼은 깔끔하게 먹어야겠다는 핑계마저도 벗어던져보자. 

미처 식지 않은 뼈다귀를 집어들고 한 입 베어문다. 잘 익힌 돼지고기는 별다른 양념조차 필요하지 않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다시 침이 고이는 맛, 핑계를 거치지 않은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솔직하게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분해된 뼈들이 어느덧 수북히 쌓였다. 국물이 반 정도 남았을 때 밥 한 그릇을 더 시켰다. 이제는 진하고 구수한 마무리 시간. 국물 속에 녹아들어간 감자와 돼지고기의 향연이 아쉽지 않게, 밥 한 숟갈에 국물 한 두 숟갈씩 고이 입에 모셔놓는다. 

긴장이 풀리고, 근육들이 느슨해진 순간 뚝배기의 바닥이 보인다. 핑계 없는 식사 한 끼, 걱정 없는 밥 한 끼를 먹었을 때만 느껴볼 수 있다는 짜릿한 순간이다. 이제 안심하고 가게 문을 나서도 된다.


하고 싶은 것들, 해야 하는 것들을 핑계거리가 많아서 너무 많이 미뤄두었다.

미래에 맡겨둔 소망을 하나 꺼냈을 뿐인데, 돌아오는 자전거길이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올해는 조금 더 꺼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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