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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연 Feb 04. 2022

어느 명절날

설날 후기

결혼 전 소개팅으로 만난 한 의대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전주 이 씨 종갓집 맏아들로 1년에 명절 차례 포함 12번의 제사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뜸 그 얘기를 하며 나더러 할 수 있겠냐는 뉘앙스로 애프터를 신청하고 싶다고 하였다. 난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며 이 사람이 과연 자기가 앞으로 사랑할 사람이자 일생일대의 반려자를 만나러 나온 것인지, 아니면 본인 집안 유교 문화를 숭상해 줄 여자를 만나러 나온 것인지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순간 어색해진 나는 한번 생각은 해 보겠다고 하고 돌아섰다.      


그저 남자 직업과 사람 좋은 짧은 인상만을 두고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나는 평소 잘하지도 않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의 대답은 절대 안 된다 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차남인 아버지와 결혼해서 장남이 일찍 요절했다는 이유로 시부모와 시 증조부모의 제사를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유교적인 관습을 떨쳐버리지 못한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모실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 같은 자식 세대에서만큼은 이제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나 또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완곡하게 애프터를 거절하였고, 그 의대생에게는 그날로 ‘안녕’을 고했지만, 인연이란 게 좀 남았던지, 그 이후 2년 뒤 엄마의 갑작스러운 담낭염 발병으로 복강경 수술을 할 때가 있었다. 우연찮게도 그 수술 병원이 그 친구가 있던 대학병원이었고, 또 마침 분야가 일반외과여서 병원 복도에서 재회를 하게 되었다. 그 병원 레지던트였던 그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가벼운 인사만 한 채 그냥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몇 해가 더 흘러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나의 시아버지는 6남매 중 차남이었고, 남편은 남매 중 외아들이다. 다행히 친정 엄마가 걱정하는 유교적인 분위기로 인한 제사, 차례를 떠안을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의 형님이신 시 백부가 돌아가시고, 그분의 아들들이 2명 있었지만 지방에 흩어져 살던 터라 대부분 수도권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거리상 명절에 모이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환갑이 넘은 비혼의 시고모가 시조부와 조상님들의 명절 차례를 모시던 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유교 문화의 계승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이제 시대도 바뀌고 있는 마당에 돌아가신 분들은 제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이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시아버지가 아직 건재하는 만큼 한평생 그렇게 유교적 사고가 굳어져 온 분을 바꾼다는 건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경험상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뜩이나 시아버지는 혼자이셨기 때문에 유일한 며느리인 내 눈치를 보시는 듯했다. 유교적으로 따져보자면 장자가 사망하였다 하더라도 그 장자의 남자 후손이 2명이나 있는데, 차남의 아들, 며느리가 대를 이어 조상을 섬기는 것이 원칙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 년에 두 번 ‘명절’이라는 이벤트를 빌미로 각기 흩어져있던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것에 초점을 두면 의미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비혼이신 시고모가 요즘 들어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지셨고, 혼자 도맡아서 명절 차례 음식을 하라고 방치하는 것은 조카며느리로서 예의가 아닌 듯했다. 코로나가 심해지는 시국에서 다들 모임 자제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시댁 집안 분위기는 사뭇 달랐고 그건 어떻게 막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내가 마음 한번 통 크게 쓰고 가족들의 편의를 봐주면 쉽게 끝날 일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가족 카톡과 큰 집 사촌 형제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시아버지의 집을 명절 차례 모임 장소로 하되, 음식은 각 며느리들 3명이 나눠서 1/n 하는 것으로. 실제로 며느리가 1명 더 있지만, 현재 미국에 살고 외국인이라 같이 모일 일이 없어서 한국에 사는 3명이 일을 나누었다. 일종의 미국식 ‘Potluck Party’를 제안한 것이다. 음식도 차례 음식에 국한하지 말고, 각자 자신 있는 걸 겹치지 않게 해오기로 했다. 그랬지만 실상은 한식 위주의 식습관 때문인지 명절 차례 음식들 일색이었다. 각종 전과, 나물들, 잡채, 갈비, 생선, 한과, 과일 등... 한국인은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각자 마음의 부담도 더는 명절을 맞이할 수 있었다. 또 며느리들이 어찌나 손들이 크던지, 양 조절에 실패해서 많은 양의 음식을 가져왔다. 먹고 남은 음식들은 가족들 인원수에 맞게 재배분해서 나눠 가졌다. 덕분에 시어른들은 원하시던 유교 풍습을 지킬 수 있었고, 젊은 후손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 모임으로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또 모처럼 준비한 남편의 난센스 퀴즈 게임으로 경품도 준비해 가서 나눠주고, 그걸 맞추느라 후끈 달아오르기도 하였다.    


오전 차례와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나와 사촌 동서들은 자연스럽게 동네 마트 볼 일이 있다며 산책을 나왔다. 설 명절이라 동네는 한산했고, 번화가에 들어섰는데도 문을 연 카페가 없었다. 간신히 모퉁이에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헤이즐넛 커피를 한 잔씩 했다. 우리는 한 30분 정도 수다를 떨었던 것 같은데 돌아와 보니, 다른 식구들이 2시간이나 있었다고 타박을 한다. 며느리들끼리 무슨 작당모의를 했느냐고도 한다. 그런 오해를 사든 지 말든지 명절이나 볼 수 있는 동서들 모임에서 우연한 동질감과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개개인으로 보면 다들 남이지만, 남편들이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어서 그런지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다들 모난 구석 없이 호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무난하게 친해질 수 있는 듯했다. 결혼해서 십 수년간 일 년에 몇 번씩 보던 사람들이었지만, 또 우리가 각자 주도해서 명절을 치러 내고 보니,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게 꼭 유교 문화의 계승 의미라기보다는, 가족 간의 사랑, 공동체 의식 같은 걸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덕분에 아이들도 또래 친척들을 만나 상당히 Refresh가 되는 듯했고, 세뱃돈 받을 기회도 많아져서 더욱 기쁜 날이었다. 이런 명절이라면 일 년에 두 번쯤은 기꺼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여러 가족들이 맛있게 나누어먹는 풍습으로 오래 지켜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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