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찬실이는 복도 많지>,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2021.09.15 일자 뉴스레터입니다.
안녕하세요. 셋둘하나, 영입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두 작품 모두 마흔의 나이가 된 어른들의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상상한 어른의 모습은 완성되고 성공한 이미지였어요. 그런데 그런 어른은 많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아무리 어른이라고 해도 저마다의 고민과 걱정이 있는 불안한 사람이었죠. 연약하고,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결국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만 저와 어른들의 차이는 불안과 걱정을 더 많이 겪어보고, 견뎌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유쾌하고 또 용감하게 불안과 걱정을 헤치고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어른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희망적인 망함을 담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깊은 터널과도 같은 시인의 밤을 담은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을 소개합니다.
새로이 채우기 위해 한번쯤 망하는 것도
"아, 망했다, 완전히 망했네"
영화 PD인 찬실(강말금)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 온 감독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일을 잃고 맙니다. 찬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마흔의 나이, 용달차 한 대 올라오지 못할 높은 언덕 위의 좁은 방, 텅텅 비어 가고 있는 통장잔고뿐이죠. 결국 먹고살기 위해 친한 동생인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게 되죠.
일에서 한 발 멀어지자 영화가 전부였던 찬실에게 조금씩 삶의 다른 면들이 흘러들어 옵니다. 집주인 할머니(윤여정)의 한글 숙제를 도와주면서, 소피의 집안일을 하면서, 소피의 불어선생님인 단편 영화감독 김영(배규람)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면서 찬실이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깊이 생각해 보게 되죠. 자신보다 우선순위였던 영화의 세계에서 떨어져 삶과 영화의 관계를, 인생과 일의 관계를 재정의 합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인생의 중간에서 한 발 멈춰서 삶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다 알아요. 사는 게 뭔지."
영과 공원에서 나눈 대화는 찬실이 집주인 할머니와 함께 콩나물을 다듬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할머니는 찬실이가 왜 일을 그만뒀는지 묻죠.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대화는 이어집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직 젊으니까 뭐든지 하면 되지, 뭐. 난 인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늙으니까 그거 하나는 좋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어요?"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그러면 오늘 하고 싶었던 거는 콩나물 다듬는 거였겠네요."
"알면 됐어."
사실 집주인 할머니(윤여정)가 나오는 부분은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콩나물을 다듬는 별 것 아닌 소박한 행동을 함께하는 것만으로 위로와 애정이 느껴져 좋은 장면이었어요. "대신 애써서 해"라는 대사가 주는 울림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고, 그래서 진솔하고, 희망적입니다. 실직, 말 그대로 '망한' 상황에서 찬실이가 믿고 싶고, 바라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기도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저도 한 뼘 자라는 기분이 듭니다. 어쩌면 '망함'이라는 겨울을 지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망했다고 당당하게 내뱉는 용기와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볼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자신보다 일이 우선인 사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매사에 걱정이 없는 편이다
한 가지 일만 붙잡고 있지 않고 삶의 재미를 잘 찾으며 산다
#넷플릭스 #티빙
이 밤을 위해 오래도록 기다렸을 꿈
'나'는 어른 네 명과 아이 두 명이 사는 집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시인 지망생입니다. 3년 전, 남편의 폭력을 견디고 있던 동생을 억지로 끌고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조카를 돌보고 가사를 책임지게 됩니다. 70줄에 들어선 아버지와 어머니도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듭니다. 가족을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이 생활을 이어가기가 점점 힘이 듭니다. 자신의 시 한 줄 써내려 갈 시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산더미 같은 집안일과 돌봄 노동을 마무리하고 자정이 지나서야 식탁에 앉아 겨우 시 한 편을 필사하는 게 전부입니다.
언니의 늦은 배움을 응원하고 지원해 준 동생인 만큼 화자가 동생의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마땅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점점 시와 멀어지는 감각에 '나'는 질식할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나죠. 유일하게 큰딸을 생각해 주던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나'는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나'는 시인으로서 지새울 수 있는 밤을 손에 넣기 위해 평범하고 현실적인 그래서 날카로운 갈등의 상황을 무릅씁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언어를 꺼내지 못한 실패자가 된 나는 필사 노트를 펼쳐 시집의 한 페이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천천히 베껴 써 내려갔다.
- [목련빌라] 중에서
화자의 숨 막히고 지리멸렬한 삶의 모습은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부정할 수 없이 짙은 현실의 농도 때문에 쉽게 놓아버릴 수 없습니다. 집의 식모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시인을 향한 '나'의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니지요. 한 줄이라도 적어보겠다는 '나'의 시에 대한 열망은 움트기 직전의 새싹처럼 응축되어 있습니다. 화자가 결국은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응원하게 되죠. 화자가 처한 상황이 그의 무덤이 아니듯 우리의 고된 상황도 여기가 끝이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이 정류장을 지나 원하는 곳으로 가기를, 우리가 원하는 밤을 지새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
현실적인 묘사를 좋아한다
길지 않지만 흡입력 있는 소설이 보고 싶다
답답한 현실 묘사는 우울하다
원하는 일을 원하는 대로 하고 있다
저는 짐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마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요. 새삼 얼마나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몇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도 많았고,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도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물건의 늪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요?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집을 방문해 정리를 도와주는 넷플릭스 시리즈입니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설레는지를 자문하고 남길 물건과 보내줄 물건을 분류합니다.
우리의 공간을 갖기 위해서, 물건의 쓰임을 찾기 위해서 버리고 정리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곤도 마리에는 옷, 책 등의 종류별로 정리를 하라고 하지만 그럼 대청소가 되어버리기에 좀 부담이 되는데요. 일단 서랍 한 칸이라도 정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나에게 설레는 것만 남는 날까지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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