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나 있었던 조커의 본질을 다시금 재정의하는 영화
산을 쌓을 거야.
개인적으로 과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보면서 여러 가지 사회 실험을 하며 배트맨을 논리적으로, 때론 감정적으로 압박했던 '조커'라는 유일무이한 캐릭터가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간 조커라는 캐릭터는 배트맨이라는 히어로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자 매력적인 빌런으로서의 역할 수행에만 그쳤던 반면,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 시리즈는 어떻게 이 세상에 조커가 탄생하는지에 대해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파헤친다는 점에서 색다르면서도 더욱 주도면밀하다.
한편, <조커: 폴리 아 되>는 어찌 보면 1편보다 기존의 '조커의 탄생'에 대한 주제를 더욱 끈질기게 파고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편에서는 아서 플렉이 왜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일련의 상황들을 제시하며 관객들을 설득한다.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현실 속에서 다시금 태어난 존재, 조커는 아서 플렉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남들에게 있어서는 웃어넘기며 쉽게 내던져지는 농담들이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처절한 현실이므로 스스로 조크(농담)가 되어 세상을 향해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남을 웃게 하는 게 아니라 울리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반대로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 플렉이 왜 조커(엄밀히는 대중이 열광하는 존재로서의-)가 될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아서 플렉이 조커인가 아닌가 하는가 문제는 하나의 재판 과정에 빗대어 그 논의를 점진적으로 고조시킨다. 아서 플렉을 중심으로 두 축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서 플렉의 변호사. 그녀는 그를 조커라는 인격과 분리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호소한다. 그 반대 축에 서 있는 인물은 대표적으로 할리다. 할리는 조커의 팬이라 자처하며 그를 향해 사랑을 속삭이고 함께 손을 잡고 더 큰 산을 쌓아가자(Gonna Build a Mountain)고 말하는 사람이다. 양쪽에서 서서히 조여 오는 갈등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정말로 조커인가. 아니면 아서 플렉일 뿐인가.
할리를 통해 잠들어 있던 조커가 조금씩 깨어나고 재판장에서 서서히 분개하는 모습들은 조커의 존재성을 각인시킨다. 그러나 홀로 남겨져 있는 순간이나 1편에서처럼 자신이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던 무언가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때에 얼핏 보여지는 불안함에서는 여전히 그는 아서 플렉일 뿐이고 조커는 그저 환상이자 얼굴을 가린 분장일 뿐이다. 그는 어느 순간에나 아서 플렉 그 자체였으니 그렇다면, 조커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커의 거취를 그 스스로 정리하고 나자 문제 논의의 방향은 전환한다. 그의 모습에 감명받은, 자신의 처지에 억눌려왔던 많은 고담 시민들이 조커를 자처하며 그의 악행이 더 넓은 규모로 (그가 예상치 못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로써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조커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해 버리고 만다. 수많은 조커 사이에서 할리 퀸 역시 그의 분신인, 그림자인 조커인 셈인데 딱히 할리퀸만의 스토리가 있다기보다는 조커의 상대방, 그림자의 역할에 더 가까운 듯했다. 한편으로는 이는 조커 1편에 열광했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 속 시점은 조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공개되어 뭇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리는 조커에게 있어서 단순히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 주고 난생처음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존재이자 팬이고 그의 만행을 함께 응원하는 고담 시민들이자 조커라는 존재의 그림자인 것이다. 아서 플렉이 만들어낸 조커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그림자가 되어 그를 잠식하고 만다. 아서 플렉의 진심과 그림자들의 이상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아서 플렉은 더 이상 조커가 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뮤지컬이란 장르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으나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는 최적의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또한 마냥 오락영화라기보다는 진지하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그려냈던 1편의 연출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조커와 조커의 영원한 짝꿍인 할리퀸과의 한바탕 대소동을 파격적으로 그려내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에 이를 뮤지컬로 승화한 것은 어찌 보면 현실적인 타협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독특한 점은 여기에 있다. 다른 뮤지컬 영화는 갑자기 길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해도 그들을 전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마치 영화라는 거대한 시스템조차도 주인공들의 꿈과 환상을 응원해 주고 그저 응시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 되>에서는 다르다. 그냥 뮤지컬 영화라서 모든 대사를 노래로 대신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현실이라는 배경에서 노래하는 것이고, 길거리에서 갑자기 춤을 추는 것이다. 다른 뮤지컬 영화가 현실을 근간으로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조커: 폴리 아 되>는 반대로 꿈을 근간으로 '현실'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전자는 궁극적으로 꿈에 대해 말하므로 노래하고 춤을 춰도 용인되지만 후자는 결국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므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고 동 떨어진 것이 된다.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인 스타일리쉬한 원색적인 색감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만나 더욱 두드러진다. 초록색과 빨간색은 이미 조커의 상징적인 색으로서 이 영화에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강력하지만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유독 눈에 띄는 색상은 노랑이다. 겁쟁이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노란색이 여기서는 주로 희망의 색으로 보였던 것 같다. 유난히 현실과 꿈의 모습을 겹쳐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았던 이 영화는 아서 플렉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자기 자신을 찾고 남들처럼 사랑받고 사랑하며 그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을 테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말고 그저 평범하게, 소박하게.
<조커: 폴리 아 되>는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은 신나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한껏 고조되다가 음악이 끝나고 나면 더욱 극적으로 아서 플렉의 현실이 허무하게 느껴져서 그 대비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영화였다. 더 나아가 주인공의 삶을 통해 나의 인생 역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꿈이라는 핑계로 현실을 망각할 만큼 자주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또 반대로 스스로의 처지에 골몰하느라 내 주변을 쉬이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비록 오랫동안 전설의 빌런으로 자리 잡았던 하나의 캐릭터를 이 세상에 존재할 법한 또 한 명의 사람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이 많은 이들에게 아우성을 일으킬 법도 하지만 그만큼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가 단순히 조커만의 범접할 수 없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보편화한다는 점에서 이 조커 시리즈가 보여준 모든 선택들이 파격적이고 더욱 인상 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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