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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하는 드랙퀸, 모지민의 경우

팡타 개라지 퍼포먼스 《니나 아나니아 시빌리의 시련》 관람기

by 편성준

설날 즈음 제주 사는 이상훈 배우가 서울에 올라왔으니 만나자고 해 갔던 인사동의 술집 큰 테이블엔 친구들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늦게 도착한 사람이 모지민이었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마르고 깔끔한 몸가짐이 돋보였는데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술집에 와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는 건 자기 관리가 엄격하다는 얘기로 들렸다. 얼마 후 드랙퀸 공연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내가 바로 날짜를 물어 티켓 두 장을 예매하자 그는 "이렇게 그 자리에서 예매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라며 감탄했다.

2025년 2월 14일 저녁 7시에 광화문에 있는 에무시네마로 갔다. 지하극장 '팡타 개라지'에서 열리는 모어의 《니나 아나니아 시빌리의 시련》이라는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서다. 모어는 아티스트 모지민의 다른 이름이고 포스터 밑부분엔 "무용과 드래그, 주류와 비주류에서 꿈틀거리거나 뜀박질하고 있는 모어의 짜릿한 퍼포먼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좁은 극장 안에서 퍼포먼스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될까 궁금했는데 무대에 내려진 스크린 위에 잔근육으로 꽉 찬 양팔을 휘저으며 춤을 추는 모어의 모습과 함께 "낮은 곳에서 힐을 신고, 높은 곳에서 토슈즈를 신고..."라는 그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나는 긴장했다. 술집에서 만났던 모지민이 단아한 예술가의 인상이었다면 무대 위에서 만난 모어는 엄격하면서도 자유로운 반항아의 현신이었다. 수십 분의 동영상이 끝나고 스크린이 올라가자 반라의 모어가 나타나 공연을 펼쳤다. 마이크를 들고 대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현대팝과 올드팝, 한영애의 '코뿔소' 등을 립싱크할 때는 너무 멋졌고 최승자의 시 '일찍이 나는'을 암송할 때는 전율이 일었다. 드랙쇼는 안팎으로 강렬하고 처절해서 자칫 천박으로 흐르기 쉬운데 쉬운데 모어의 쇼는 그렇지 않았다. 자유로면서도 절제를 잃지 않았고 유머 속에서도 슬픔이 빛났다. 중간에 나오는 다큐영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한 시간 반 정도의 퍼포먼스가 모두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모지민 아티스트도 나와 자신의 책 『털 난 물고기 모어』에 사인을 해주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아내와 나도 책을 한 권 사서 사인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최승자 시 이야기를 했더니 모지민이 크게 기뻐했다.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끝까지 망설였던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극장을 나서다 보니 일층 벽에 안광복 철학교사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달의 작가'란다. 얼마 전 그의 책 『철학으로 돌파하라』를 사서 읽고 있는데 여기서 또 만나니 반가웠다.

나중에 집에 와서 책을 펴 들고 채널예스 인터뷰를 보니 책이 나왔을 때 모지민이 살던 경기도 양주의 아파트가 뒤집어졌다고 한다. 동네 6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몰려와서 사인받고 난리가 난 것이다. 어떤 할머니는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라는 말씀도 하셨단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중간 다큐 영화에서 나왔던 모지민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모지민이 요즘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하자 "잘 되얏다. 심심하지 않것네. 너 얘기하는 거 좋아하잖어." 라고 말씀하셨다. 참 좋은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지민 주변에는 이처럼 좋은 어른들이 많다. 왜 그럴까. 모지민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다.


순탄하고 밝은 인생만 살아온 사람은 예술을 할 수가 없다. 맺힌 게 없고 쟁취하고 싶은 것도 적기 때문이다. 여성이라 믿고 자랐는데 남성의 몸을 갖고 살았던 모지민은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하지만 '발레리노가 될 수 없다면 발레리나가 되지 뭐'라고 발상을 바꾼 덕에 우리는 글도 쓰고 춤도 추는 예술가를 한 명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025년 3월 8일엔 군자역에서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무용극을 한단다. 모두 가서 인텔리켄챠 드랙퀸을 목격하자. 인생이 허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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