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읽으며 든 생각들
이문구 선생이 2000년도에 동인문학상을 탔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읽는 중이다. 당시 꽤나 화제였던 소설이라 나도 사서 읽었는데(내가 가진 판본은 2001년 1월 1판 13쇄다) 다시 읽어보니 맨 앞줄에 있는 "그래라. 누가 말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좋다 이거여."라는 김학자 회장의 일갈 말고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럴 수가. 하지만 조금 더 읽어나가다 보니 이문구 특유의 따뜻한 해학이 들어 있는 문장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반겨서 마음이 놓였다. 곳곳에 연필자국을 남기며 지금 반쯤 읽었는데 오늘 밤까지 끝을 낼 생각이다. 이 책은 찔레나무, 화살나무, 개암나무, 싸리나무 등 보령에 있는 나무들을 제목으로 삼고 그 나무와 관련 있는 인물들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풀어놓는 연작소설 형식이다. 그렇다고 나무 얘기는 아니다. 『관촌수필』에서도 했던 식으로 연작 소설들을 통해 시골에 살던 사람들의 인생을 잘도 펼쳐 놓는다. 이문구 선생은 서라벌예대 문창과(지금의 중앙대 문창과) 다닐 때 스승인 김동리 선생이 그가 리포트로 낸 글을 교재로 쓸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작가다(이런 스승의 편애에 동기인 박상륭 소설가가 매우 자존심 상해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문구는 문장이 정확하고 유머가 있다. 특히 충청도 사투리의 의뭉스러움은 훌륭한 문학적 메타포로 변하기 일쑤다. 내가 이 소설에서 처음 웃음을 터뜨린 것은 김 회장이 전화를 끊고 '이 개 잡아먹은 자리에 가서 곡을 허구 재배할 늠아'라고 시동생에게 하는 욕이었다. 절을 두 번 한다는 것은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고, 그 대상이 개인 것은 결국 "야 이 개새끼야"를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한 메타포의 활용인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깻잎장아찌를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본 뒤 친구를 꼬드겨 깻잎장아찌 장사에 나섰다가 낭패를 본 이송학 씨가 노태우를 소개하는 멘트는 또 어떤가. "저 냥반이 워떤 냥반이신가. 편모 슬하에 어렵게 자라서 육사에 들어갔다가 더 달을 별이 없어서 니 개만 달구 나온 냥반 아닌가." 더 달 별이 없어서 네 개만 달고 나온 양반이라니. 사성장군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며 감탄했다.
손때 묻은 이문구 소설들을 다시 꺼내 읽는 이유는 우리 동네에 '이문구 기념사업 준비위원회'가 열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족의 허락을 받고 이문구 선생의 책과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황선만 작가의 권유로 아내 윤혜자와 나도 이 위원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보령을 넘어 대한민국에서도 이문구 문학은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20여 년이 넘도록 이문구 문학관도 만들어지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주에 제안자들끼리 회의를 열어 이 사업의 방향성에 대해 논의했다. 보령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나 참여 가능한 이 위원회의 유일한 자격은 '이문구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으로 정했다. 책을 워낙 안 읽는 시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문구 얘기를 하는 사람 중에 이문구 책을 안 읽은 사람이 너무나 많더라, 라는 황 작가의 말 때문에 이런 조항을 넣었다. 그렇다고 시험을 보는 것은 아니니 마음 놓고 문을 두드리시라. 이문구를 읽자. 그리고 이 좋은 작품들을 여기저기 소문내서 충청도 사투리가 가진 말의 힘을 실감하게 하자.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렸을 때 사투리는 표준말에 비해 후진 언어라고 배웠던 게 분하다. 표준말이라는 말 자체가 전체주의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바로잡고 살려나가자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