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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6. 2021

지구는 구두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한 페이지 소설

* 짧은 소설

                     

  빨간 구두였다. 담벼락을 마주 보고 단정하게 서 있는 그것은 분명. 그러니까 그것은, 정말로 단정한 매무새의 구두였다. 누군가 급히 달려가다가 한 짝이 벗겨진 채로 나동그라진 모양도 아니었고, 신다가 싫증나서 휙 던져 버린 것도, 쫓아오는 놈에게 악을 쓰면서 벗어 던진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스크래치 하나 없이 방금 광을 낸 것 마냥 반짝거리는 그 빨간 구두는 담과 7cm 정도의 거리만 두고 덤덤하게 서 있었다. 그것도 한 짝만.      

         

  취기를 안고 돌아오던 전날 저녁에도 그 길을 지나갔으나 당연히 버려진 신발인 줄 알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훤한 대낮에 같은 길을 거슬러가면서 다시 본 그것은 빨간 구두 한 짝. 매끈하게 똑 떨어진 그 구두는 무슨 사연인지 담이 열리기만 바라고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한 짝만 벗어 놓고 담 안 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그 구두를 관찰하기로 했다. 마침 대각선 맞은 편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고 테이블 위에 커피와 책과 노트북 따위를 늘어 놓고 책과 노트북 따위의 쓸모와는 상관없이, 구두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붐비는 골목이라 누군가 집어 가거나 발로 차 보거나 거들떠라도 볼만 한데 그러는 사람은 없었다. 저러다 녹는 건 아닐까. 한여름의 태양은 강렬했고, 저걸 그늘로 좀 옮겨 놓을까.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고, 건드리지 않았다. 해는 지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구두를 보고 있었지 왜 보고 있나 그건 모르겠고 아 몰라 집에나 가자. 집에를 갔다. 

              

  구두를 잊기로 했다. 뭐 어찌 되겠지. 건드리면 마차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저 구두가 담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상상은 또 뭐람. 소설 그만 쓰고 소설이나 쓰자. 며칠 그 골목을 피해 다녔다. 나와 상관도 없는 걸 뭘 자꾸 신경을 쓰나. 신경을 쓰기 싫었다. 그러나 무심결에 걷다가 그 골목이구나 자각했을 땐 궁금해졌다. 어떻게 됐을까. 며칠 지났는데 누가 걷어 찼거나 버렸거나 하다 못해 아이들이 장난 친다고 가지고 놀아도 놀았겠지. 없어졌기를 바랐다. 구두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그 사이 비도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었기 때문에 먼지 얼룩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마치 방금 누가 정성스레 닦아서 다시 갖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 본 상태 그대로 멀쩡하게 담을 마주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가만히 보았다. 잠잠. 손으로 구두코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 조용. 구두 실루엣을 따라 천천히 만져 보았다. 괜찮. 그렇다면, 한 번 신어볼까. 조심스레 발을 쏘옥 집어 넣어 보았다. 쑤욱. 정말이지 발이 쑤욱 빨려 들어갔다. 꼭 맞았다. 나머지 발을 옆으로 가져왔다. 똑바로 섰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구두가 양쪽 발을 폭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구두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 어 어, 눈 앞엔 담벼락인데. 걸어갔다. 뛰어갔다. 구두구두구두구두 달리는 구두, 두구두구두구두구 뛰는 맥박. 춤을 추었다. 왈츠를 추고, 폴카를 추고, 걷고 뛰고 춤을 추고. 이건 뭐야. 이런 거지. 멈추지 않을 거야. 이제 담벼락은 등 뒤에 있다.

          

2018. 7. 24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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