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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6. 2021

수영이 차를 마시는 동안

한 페이지 소설

* 짧은 소설

                   

  일교차를 견디지 못하고 감기에 붙들리고 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온몸을 엷은 전기막이 감싼 느낌이다. 콧물과 재채기가 그 막을 단단히 감쌀 지경까지 되고서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오늘 약속은 어찌해야하나 고민한다. 모르겠다 일단 차나 한 잔 마시자. 물이 끓는 동안 지난 일주일 내내 속을 짓누르던 기분을 꺼내어 찬찬히 본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승현에 대한 분노로 며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입 닫고 혼자 삭이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다. 괜찮아지지 않았다. 단 한숨도 죽지 않았고 여전히 용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진짜 분노다. 그의 잘못이 명백하다. 얼 그레이 찻잎이 물에 풀리는 모습을 가만히 본다. 차를 마실 때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물을 끓이고, 물이 적당한 온도로 내려가고, 그 물에 찻잎이 고요히 풀어지는 순간. 어떤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랄까. 


  이전의 수영이라면 내가 참자, 나만 참으면 돼, 내 잘못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 했을 테다. 지금의 수영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나만 참으면 되는 건 하찮은 정신 승리일 뿐이다. 승현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사람이다. 너그럽게 생긴 외모와 목소리, 무슨 말을 해도 허허 웃어 넘기는 승현은 부서에서도 꽤나 인기가 높다. 몇몇 동료들은 그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승현도 그걸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수영은, 뾰족하다. 뭐가 뾰족하냐면, 다. 분위기부터 업무 방식까지, 다. 흐릿한 일처리는 견디지 못한다. 뭐든 정확하게 해내느라 동료들에게 싫은 소리도 마다하지 않으므로 자주 뒷담화의 대상이 된다. 


  수영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 수영은 제 게으름을 아쉬운 소리로 대체하지 않는다. 수영의 기획안은 몇 차례나 윗선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것 뿐이었다. 수영의 기획안은 한 번도 채택되지 않았다. 윗선이 좋아하지만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수영은 납득하지 못한다. 납득하지 못하지만 항의하지 않는다. 내 잘못이겠지. 수영은 매번 그렇게 생각했다. 승현은 과묵하다. 허허 웃는다. 허허 웃기만 한다. 회의 때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승현의 육성은 허허허, 맞아요, 좋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회의 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승현의 표정은 미소, 웃음, 미소, 웃음. 


  첫 모금을 입에 가만 물고 베르가못 시트러스향을 충분히 음미한다. 목을 따뜻하게 감싸고 넘어가는 얼 그레이가 한동안 온기로 머무른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항의를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방식으로 말 아닌 다른 건 뭐가 있을까. 수영은 뾰족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 수영이 말을 하면 말을 가시로 듣는다. 상대는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가시에 찔리는 사람이 된다. 수영은 말을 포기한다. 항의는 포기하지 않는다. 차가 적당히 식어 있다. 오늘 승현을 만나 말 아닌 최선으로 그의 반칙에 대한 경위서를 받아 내려 한다. 우선 사과부터. 


  그런데 감기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 자칫 뾰족한 말이 나올 수 있다. 나가기 싫어서 부비적거리던 마음이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정리가 되었다. 뜨거운 물로 천천히 샤워를 하고, 깨끗하게 화장을 하고, 아껴두었던 옷을 차려 입는다. 눈을 감는다. 준비된 말을 말 아닌 방식으로 전달하러 나간다. 심호흡을 크게 한다. 눈을 뜨고 앞을 본다. 

    

2018. 9. 25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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