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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Oct 18. 2021

우리 각자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J.D. 샐린저, 민음사, 2001)을 읽고

  학교가 싫다고 느껴질 때마다 어른들은 언젠가는 그리워질 때가 올 거라고, 학교 다닐 때가 좋은 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막연히 어른이 되면 학창 시절이 그리워질 줄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단 한 번도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과 같은 학생 인권의 개념조차 희박할 때였고, 교사들이 출석부와 세트로 (몽둥이에 가까운) 회초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공포가 다반사인 시절이었다.     


  여기, 세 번을 퇴학당하고 네 번째로 퇴학 통보를 받은 학생 홀든 콜필드가 있다. 수요일까지 기숙사를 비워주면 되지만 자신을 슬프고 외롭게 하는 이 학교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주말에 짐을 챙겨 홀든은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난다. 부모에게 퇴학 결정 통보가 가기까지는 아직 며칠 여유가 있기 때문에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뉴욕 시내에서 자유롭게 며칠 간만이라도 유예 기간을 가질 예정이다. 홀든은 세상의 부조리에 일찌감치 눈을 뜬 아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학교가 요구하는 일정 수준의 성적을 유지해서 출세한다거나 그 학교의 대다수 학생이 가지는 목표와는 다른 지향점을 가진 아이지만, 이런 학생을 담아내기엔 학교가 너무도 좁다. 학교는 획일성의 깃발 아래 비슷한 부류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세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선 밖으로 밀어낸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능과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하(않)고 오로지 학교의 위상을 높여줄 학생만이 자신들의 바운더리 내에 속할 자격이 되는 것. 명문 학교는 그렇게 유지된다.  

    

  홀든이 궁금한 건 센트럴파크 남쪽의 작은 연못에 사는 오리가 물이 얼어붙는 겨울엔 어디로 가는가- 그런 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은 택시 기사는 황당하다는 듯 그 안에 사는 물고기한테나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홀든은 자연스레 그 물고기의 안녕도 궁금하다. 택시기사는 남들 관심 가지는 흔한 것 말고 그런 거나 궁금해하는 이 손님이 한심스럽다. 그러니까, 홀든에게 중요한 건 그런 거다. 타인은 관심 가지지 않는 작은 존재, 열광과 환호 뒤의 그늘, 평균의 키에선 보이지 않는 작고 낮은 곳과 구석의 목소리들…     

 

  홀든은 자주 우울하다. 모금함을 들고 다니는 수녀 두 분이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는 걸 보고 홀든은 또 우울해진다. 자신은 베이컨과 달걀 같은 걸 먹고 있을 때 저런 분들이 자신보다 단출한 식사를 하는 것이 싫다. 홀든 자신의 식사라고 딱히 거창한 것도 아니지만 그동안 보아왔던 위선적인 부류와 확연히 대조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괜찮은 식사를 했으면 좋겠고 그러면 덜 우울하겠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홀든, 별 시답잖은 대화는 꺼리는 홀든이 수녀님들과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땐 얼마나 수다쟁이가 되는지. 동생 피비도 홀든에겐 좋은 대화 상대다.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신 틈을 이용해 홀든은 집에 들어가 피비와 대화를 나눈다. 또다시 퇴학을 당하고 온 홀든에게 피비는 묻는다. 오빠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냐고, 아빠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지는 않냐고. 정말 죄 없는 사람이나 약자를 위해 성심성의껏 변호한다면 모를까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동안 보아온 변호사들은 출세에만 급급한 사람들이라 홀든은 그런 명예와 위선엔 아예 관심도 없다. 그리고 홀든은 진짜로 되고 싶은 걸 말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오래오래 기억될 그 이유와 함께 독자를 설득시키는 홀든의 말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면 좋겠다.)  


  홀든 콜필드와 같은 사람이 조금만 더 늘어난다면 세상이 지금보다는 한 뼘이라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거친 말과 큰 목소리와 선동의 문구가 횡행하는 시대, 생각해보면 세상은 늘 시끄러웠고 그 안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일궈가는 소문자 개개인은 어디에든 있다. 전쟁의 시절에도 한 송이의 꽃이나마 탁자 위에 마련해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귀한 마음은 그렇게 빛을 낸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잘 닦아 윤을 내는 사람이 있는 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호밀밭에서 자신은 다만 그 아이들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홀든 같은 사람이 있는 한, 세상의 어떤 부분은 훼손되지 않는 빛으로 내내 환할 것이다. 



202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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