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텔레그램
나의 일상은 아픈 사람들의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마치 소설을 읽듯이 연령, 성별, 직업, 빈부, 학력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쏟아내는 희노애락의 다양한 파노라마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들 인생의 커튼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다보면,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채플린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떤 날은 그들의 아픔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너무 가슴이 아파 숨을 못쉴 때도 있다. 어쩌면 저런 인생도 다 있네.. 하면서 속상해지기도 한다. 또 너무 해맑은 사람들은 나를 기쁘게도 한다. 가족끼리 서로를 알뜰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한 일상 중 하나이다. 그들은 천사처럼 서로의 통증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세심하게 나의 이야기를 메모하면서 정성스럽게 경청한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흐뭇한 건 세상에 없다.
내가 매일 상담을 하는 책상에는 의자가 세 개 놓여있다. 하나는 내가 앉은 의자이고, 반대편에는 상담하러 오신 분과 보호자를 위한 의자가 놓여있다. 상담이 많은 날에는 이 의자에 사람이 자주 바뀌고, 따라서 전개되는 이야기들도 매우 다양해진다. 나는 맞은편에 놓여있는 의자에 누가 앉느냐와 상관없이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조형물을 찍어내는 요철이 있는 몰처럼, 비슷한 패턴으로 전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타이밍에 그들이 보다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쏟아낼지, 또 언제쯤 눈물이 터질지, 그러다가 언제쯤 다시 독백이 이어질지도 말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보통 과거에 일어난 일이나 관계에 관한 기억으로부터 오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좋았던 일은 좋기 때문에, 나빴던 일은 나빴기 때문에 강렬한 여운으로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끊임없이 기억을 반복하고 감정을 환기시켜 현재처럼 느끼고, 때로는 증폭시키면서 반응한다. 이러한 생각의 과정들은 대부분, 일이나 관계에 대한 고유의 판단에서 시작되고,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은 결과에 대한 불만은 감정을 만들어낸다.
아픈 사람들이 떠올리는 감정들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부정적 감정을 강하게 지속하는 주체를 자아( self )라고 강하게 믿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부정적인 일을 겪은 내가 아픈 게 얼마나 당연한가라는 식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다가 대부분은 눈물을 흘리며 울곤 한다. 눈물을 흘리는 과정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깊은 통증과 버거웠던 무게로부터 홀가분해지고 자연스럽게 매우 편안한 상태가 되곤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때, 스스로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팔자 사나운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처음 만났을 때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조금 친해지거나 술자리에서 속내를 드러낼 때가 되면, 여지없이 숨겨두었던 치부를 드러내듯, 불행한 자신의 스토리들을 쏟아내곤 한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좋지 않았던 경험을 각인시키면서 ‘ 나’는 불행하다고 믿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강렬하게 불행했던 나의 스토리텔링을 고백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솔직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찰떡처럼 철썩, 과거의 경험을 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한 가치판단 역시,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도 또 배신당할 지도 모른다는 강박적인 불안과 감정이 떠올라서 새로운 관계를 방해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다시는 이성을 사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강렬한 감정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렸고,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의식에는 어떠한 부정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화가 났던 기억은 분이 풀릴 때까지 반복해서 떠오르고, 떠오를 때마다 분노의 감정을 실제처럼 느끼게 한다. 각인된 기억이 현재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증이나 병증은 특정한 관계 또는 상황에서 야기되는 감정적 불균형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감정적 불균형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수술이나 약물치료 또는 식이요법 등으로 회복시킬 경우, 반드시 재발이 된다. 통증을 통해 몸이 보내고자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균형, 정확히 말해서 감정적 균형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원인에 의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현실적으로 그 문제 또는 상황이 변하는 것과도 실제적으로 무관하다.
몸이 원하는 것은 감정과 정서 자체의 교정이다. 같은 경험에 대해서도 보다 긍정적인 해석과 정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특정한 감정적 경험이 강렬할수록 더 심각한 긴장감을 유발하게 되는데, 긴장감은 통증으로 이어지고, 통증이 만성화될 경우 병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만성통증이나 병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감정적 이완은 매우 중요한 치료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심리적 부담감과 긴장감으로부터 이완되고나면, 가지고 있던 병증이 훨씬 완화되거나 어떤 경우는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한다. 즉, 감정적 이완은 약물이나 다른 물리적 치료 없이 병을 완화시키거나 완전하게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감정적 긴장감 또는 부정적 감정들은 우리의 세포에 기록되고 저장된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관계에 대해 부정적 감정이 반복되면 동일한 패턴의 통증도 반복된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과거의 일에 대해 각인된 정서로서의 부정적 기억만으로도 동일한 통증을 유발한다. 즉 몸이 그 감정적 경험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고,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정서반응이 자동반사적으로 일어나서 통증이 재발된다. 몸의 과학에 감정에너지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병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몸의 병이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고, 마음의 병은 몸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때로는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어도 살이 안 쪘으면 좋겠고, 체력이 좋아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피곤해서 짜증이 나고 배가 나오니 부담스럽기만 한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다. 몸은 우리의 멘토다. 몸과의 관계를 여는 채널을 활성화시켜 몸의 메시지를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몸과의 상호 연결된 관계를 형성하는 파트너쉽을 갖게 되면, 우리 인생은 달라진다. 건강은 그때 비로서 자연스럽게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