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싸고 오래된 원룸들을 전전해온 내가, 처음으로 방 2개에 거실도 있는 전세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꿈을 포기하고 취업을 한 지 2년 만에 얻은 쾌거였다. 더 이상 매월 26일 신용카드를 돌려 막을 일도, 주변 사람에게 굽신거리며 돈을 빌려달라 할 일도 없어진 것이다. 이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난 지긋지긋하던 생활비 빚 3천만원과 학자금 2천500만원을 전부 갚았고, 드디어 원룸을 벗어나 이사까지 가고 있었다.
코딱지만 한 방에 짐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고, 이사를 가는 집도 차로 4분 거리였기에 혼자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 홀로 이사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삿짐 옮기기는 금방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끝없이 나오는 짐들로 인해 오후가 되어서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무리해서 한 번에 가득가득 들고 내리고 올리고 했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자, 더욱더 무리해서 한 번에 옮기는 양을 늘렸다. 그렇게 저녁 6시,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온몸에 힘이 다 빠졌지만, 마지막이라며 한가득 집어 들고 있었다.
그렇게 무리해서 올라가던 중 팔에 힘이 빠져 결국 상자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상자는 떨어지며 엎어졌고, 하필 그 안에는 유리그릇과 소스류가 잔뜩 담겨있었다. 계단 위로 유리그릇들과 소스통이 깨지고 굴렀으며 계단은 그야말로 알록달록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없었던 힘이 쭉 빠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볼까 싶어 얼른 치워야 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저 바라만 봤다. 다행히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난 그 자리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어지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대학시절 농촌에 봉사활동을 가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힘 좋다고 그렇게 두 개씩 팍팍 들면 쓰나~ 한 개씩 천천히 해야 되는겨~”, “한 개씩 해도 절대 안 늦는다. 그냥 네 마음이 조급한거여 그러다 몸 상한다.” 농부 아저씨가 나에게 해준 소리였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봉사활동 점수를 얻기 위해 동기들과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20kg짜리 비료포대를 옮기는 일이었다. 농부 아저씨가 일을 덜 했으면 하는 마음에, 힘이 되는대로 포대를 옮겨, 빨리 끝내 버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포대를 두 개씩 들어 옮겼다. 저 멀리서 농부 아저씨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하나씩 하라는 말이었던 듯싶다. 그렇게 호기롭게 포대를 옮긴 지 15분이 지났을까? 난 벌써 지쳐버렸다. 그렇게 다시 한 개씩 옮겼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며 포대 하나를 길바닥에 쏟아버렸다. 그렇게 자리에 주저 않아 있는데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고를 쳐서 빨리 수습해야 했지만 평소와 달리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도 현실감이 많이 옅어졌었다. 농부 아저씨는 내게 잠깐 쉬라고 했고, 결국 아저씨와 동기들이 나머지 포대를 마저 옮겼다. 아저씨는 느린 것 같았지만 묘한 리듬을 가지고 빠르게 포대를 옮겼다. 그러면서 웃으며 나에게 “한 개씩 해도 안 늦는다.”, “천천히 하는 게 느린 게 아니다.”라는 묘한 말들을 해줬던 것 같다. 왜 갑자기 그 말들이 지금 에서야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들을 떠올린 끝에 현실감이 돌아왔고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난장판이 되어버린 복도와 계단을 하나하나 청소하기 시작했다.
20대의 난 많은 꿈을 가졌었다. 세계일주를 하는 것, 운명을 시험해 보는 것, 마법사가 되는 것, 깨달음을 얻는 것, 무대에 서는 것, 인권변호사가 되는 것.
이루기 위해 노력했었고, 때론 꿈이 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몇 번 시도해 봤으나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안될 거라는 이유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사를 하는 날은 인권변호사라는 가장 최근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한 지 2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꿈들을 포기한 대가로 난 빚을 다 갚았고, 돈을 모으며 남들처럼 멀쩡하게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열정도 사라졌고 재미도 없었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며 날 위로했다. ‘뭐가 그리 두려워 고작 2년 만에 꿈을 접었을까? 일을 하면서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뭣도 없었고 힘들었지만, 뜨거웠던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나무랐다. 그러면서 참고 참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 다시 뜨겁게 살 수 있을까?"
그땐 몰랐다. 환희가 비출거라 참으며 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것이, 희망 없이 편한 길을 걷는 것보다 좋을 수도 있음을........
계단에서 깨진 유리그릇을 주워 담으며 한탄해본다.
가지 못했던 길을, 가고 싶었던 길을, 한 걸음씩 그냥 가봤으면 어땠을까?
그때의 꿈을 꾸던 내가 그리워진 난.........
짐을 가지러 여러 번 움직이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아본다.
“한 개씩 해도 안 늦는다. ”, “천천히 하는 게 느린 게 아니다.”
맞다. 천천히 하는 게 느린 게 아닌데, 도착하지 않는 게 아닌데 왜 느린 게 실패라고, 고작 몇 번 해봐서 안됐다고, 도착도 못할 거라 겁을 먹었을까. 농부 아저씨의 말이 너무 아프게 들리는 날이었다.
'그쪽으로 가고 있으면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면 어땠을까?'
에필로그
실패라는 천장으로 하늘을 가리다 X 때가 없는 꿈
20대의 내가 겪은 사회는 도전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세상이었다. 막노동, 콜센터, 고시원 등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험해본 세상은, 실패 이후의 가혹한 삶을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대다수가 지향하는 대세의 돈벌이 코스(대기업, 공무원 등) 외의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또 실패한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비루한 시선과, 고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고된 일을 같이 했던 그곳의 어른들은 대부분 "도전하지 말아라, 남들처럼 살아라, 좋은 회사 취업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붙어있어라."며 한결같이 말했다. 그들은 30대의 도전을, 도전 그 자체를 인생의 크나큰 실수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과 함께했던 일들은 참 고된 일들이었고, 살기 위해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며 오랜 시간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잔뜩 겁을 먹었다.
30살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더 이상 실패하면 안 된다며 내가 나를 압박했고 결국 '뜨겁게 살 수 있는 꿈'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누가 길을 가로막아서 못 간 것처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댔지만 그 누구도 나를 가로막지 않았다. 실패는 그냥 내가 만든 천장이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덮어버린 천장. 그렇게 난 내가 만든 두려움으로 인해 땅 위에서 살 수밖에 없다며 더 이상 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천장을 만들어 꿈을 덮어버렸다.
고작 32살인 나는, 다시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이미 실패했다며 과거의 꿈들을 덮은 천장을 들춰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실패라는 이름의 천장을 덮기 전, 그때의 꿈이 이뤄져서 흘러갈 법한 삶을 상상해보며 흐뭇해할 뿐이다.
꿈에는 때가 있는 꿈과 없는 꿈이 있는 것 같다. 그때 이뤄졌어야 하는 꿈. 지금은 그때처럼 간절하지 않은, 그때의 꿈이 이뤄졌을 미래를 상상하며 때가 없는 꿈을 다시 그려본다. 몇 번을 도전해도 내가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할 그런 '때가 없는 꿈'은 어떤 게 남았을지 다시 한번 나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