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오던 일이 막상 눈앞에 벌어졌는데, 내 마음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면? 나는 과연 나를 믿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내가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그때부터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뭐가 진짜일까?’
인간은 대부분....... 아니다 나만으로 하자. 난 살면서 생각만 해왔던 것들이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의 내 마음이 일으키는 변덕, 그 커다란 차이를 몇 번 경험했다. 내가 생각이 많아지고, 나를 믿지 못하게 된 것도 이런 일들을 차례로 겪은 직후였다. 난 이것을 내 마음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의 원죄라고 칭한다.
처음으로 내가 무지의 원죄를 경험한 것은 첫사랑을 만난 후였다. 고등학교 2학년, 처음으로 이성을 만나 좋아하는 감정을 공유하고, ‘사귄다’라는 관계에 들어선 지 두세 달이 지났을 즈음, 더 이상 연락이 기대되지 않았고 다른 이성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고민 끝에 이건 사랑이 아니라며 너무나 쉽게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 생각이 조금씩 나기 시작하더니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본 이후로는 걷잡을 수가 없이 그녀가 보고 싶어 졌다. 난생처음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경험과 텁텁함, 사랑노래에 공감하는 등 사랑의 열병이라 불릴 만한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선택을 했던 나를 원망하며, 내 마음을 처음으로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부모님에 관한 생각이었다. 20대 초반, 어쩔 수 없는 독립으로 홀로 생활비, 학비를 벌고 틈틈이 꿈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했던 나는, 전쟁을 치르듯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러면서 조금은 뿌듯함도 느끼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꿈 없이 살아지던 내가, 부모의 도움도 없이 사회에서 이처럼 잘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도 대견해했다. 그렇게 이제는 부모만큼의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문뜩 '이제는 부모님이 안 계셔도 살아가는데 크게 문제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스런 생각을 한 벌이었는지, 그날 엄마가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다.
하얀 배경에 엄마가 서서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책꽂이에는 하얀 종이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는데, 나는 그 종이들을 하나씩 꺼내서 엄마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러면서 책꽂이에 있는 종이를 전부 주었을 때 엄마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종이 한 장 그 속에는, 미쳐 잊고 살았던 엄마와 함께한 추억들이 있었다. 그 종이들은 엄마가 내게 준 '진짜 사랑'이었다. 엄마는 알게 모르게 내 몸 곳곳에 있었고 난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없어도 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 엄마가 뜯겨 나가며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발 가지 말라며 울고 불며 한참을 매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 무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이번 생의 기록 사랑 사회 사람 - 엄마는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참조)
또 한 번은 내가 세상에 고귀한 척, 남다른 척하려 했을 때였다. 20대 중반, 주변 친구들이 취업을 준비하며 치열하게 졸업을 맞이할 때, 난 그들과 다른 척하며 말했다. "우리는 추구하는 게 달라." 그때 그들에게 했던 말들은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난 언젠가 사회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같은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스승을 만나 산속이나 사막에서, 고행을 하며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고, 깨우치는 삶 같은 것 말이다. 각오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나는 계룡산으로 무작정 향했다. 산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도인을 만나기 위해, 스승을 만나기 위해........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진짜’가 되고 싶었다. 여기서 말하는 ‘진짜’는 진정한 자유가 될 수도 있고, 행복이 될 수도 있고, 평온함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사회에서의 내 삶은 ‘가짜’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회 속에는 없는 진짜를 찾기 위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영험하다는, 또 스승이 있을법한 곳을 찾아간 곳이 계룡산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등산로 아닌 곳으로 그야말로 산속으로 걸어서 또 기어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결국 길을 잃었고, 순간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고통과 함께 온갖 두려움들이 내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저물고 있는 해가 눈에 보였고, ‘밤새 산을 헤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겁이 나서 급하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뛰다시피 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산을 내려왔고 편의점에서 물과 먹을 것을 사서 허겁지겁 먹어댔다. 세상을 떠날 각오까지 했다고 하더니 고작, 밤새 산을 헤맬 것이 무서워 이렇게 뛰어내려온 것이었다. 창피했다. 그렇게 난 내 생각만큼의 남다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큰 배움과 함께, 내속에 있는 사회적인 욕구들을 확인하게 되었고, 아직은 이렇게 사회에서 잘? 살아내고 있다.(이상주의자의 현실 적응기 - 스승을 찾아서 참조)
최근에는 다시 한번 나의 무지를 깨닫게 해 준 꿈이 있었다.
난 항상 말해왔다. 이번 생이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고생스러운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그런 나에게 최근, 소중한 꿈이 찾아왔다.
그 꿈속에서 난 죽음을 경험했다. 뿌연 배경에 내 몸이 떠올라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죽었다고 말해주었고 난 죽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죽음을 느낀 순간 머릿속을 가득 매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이었다. 평소 아무렇지 않아 하던 일상들.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그런 일상들....... '저녁 요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오늘은 별이 좀 보이네? 했던 순간', '주말에 뭐하지? 하며 푹신한 침대에 누워 고민하는 하루', '주말마다 떠나는 소소한 여행', '조금씩 두꺼워져 가는 내 일기장', '이제는 전쟁 같지 않은 일상', '평온한 집', '포근한 주변 사람들', '엄마', '기대되는 미래.......' 전쟁터 같았던 20대의 일상과 지금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음을 죽음이 닥쳐서야 깨닫게 되었다. 20대에는 사고나 병으로 죽어도 미련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던 것들이 생각이 났다. 하지만 30대의 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하진 않은 일상이지만 더 행복할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난 그 누군가에게 말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나요?” 대답은 없었고 안된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삶 속으로 너무나 돌아가고 싶었던 나는 툭....... 하고 말해버렸다. "그러면........ 다시 태어날 수는 없나요?" 지긋지긋하다던, 벗어나고 싶다던 이 생을 또다시 살아보려 했었다. 내 생각과 체험의 간극이 너무나 컸음을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번 생의 기록 사랑 사회 사람 -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참조)
이렇게 생각과 체험(또는 꿈)의 간극을 하나씩 확인하며 내 머리는 복잡해지기도 했고 비워지기도 했다.
'뭐가 진짜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진짜 내가 맞을까?', '뭐가 최선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정도 생각까지 했을 때 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냥 살아가는 거다.' 고민을 멈출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엇이 옳다.'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엄청난 깨달음이 온 것도, 세상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난 더 이상 결정을 하지 않았다.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만들지 않고, 그 순간에 내려야 하는 결정을 내리며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남들의 질문에 답을 못할 경우도 많다. 간혹 "너 결혼 안 해?", "하고 싶은 거 없어?", "앞으로 계획은 뭐야?" 같은 질문에는 항상 같은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그때 봐서"
고민은 멈추게 된 나는 점점 일상을 즐기고 있다.
며칠 전 요가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밤 문득 '내가 혹시 이번 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0대에 나에게 정말 많이 던져봤던 질문인 ‘지금 내가 죽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스스로 던져보았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지금의 일상을 더 살아가고 싶기도 했다. 30대가 된 나는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았다. '난 더 이상 죽고 싶지 않다! 죽으면 미련이 너무나 많이 남을 것 같다!'
바보 같은 난, 32년이 지나서야 서툴게나마 내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