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동심과 순백의 풍경
“따라라~라라라~뚜루루~루루루~”
아이폰으로 맞춰놓은 재즈풍 알람음악이 울리는 아침 7시. 남편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커피를 만들러 간다. 그에 맞춰 곰순이도 기지개를 키며 일어나 꼬리를 흔든다. 나머지 세명(나와 아이둘)은 아직도 이불속에서 미동도 안하며 알람소리 따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분명히 한다. 원두콩 그라인더의 무지막지한 소음이 온 집안에 울리면, 그제서야 나는 따뜻한 이불속을 아쉬워하며 몸을 일으킨다. 아이들을 위한 세번째 알람 발동.
“얘들아 일어나라~ 학교 늦는다!”
한겨울 홋카이도 히다카 마을에서 아침을 맞는 우리 가족의 모습니다.
홈스쿨링을 하는 우리 가족이 잠깐 일탈(?)을 하는 시기가 1년에 딱 한 번 있다. 겨울에 홋카이도에 체류하는 2월과 3월, 아이들이 마을 소학교에 다니는 두달간이다. 3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는 이름하여 ‘일본 시골학교 체험 프로젝트’.
홋카이도의 매력에 푹 빠진 우리 가족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홋카이도를 싸돌아다녔고, 그러다가 4년 전쯤 처음으로 히다카日高 마을에 묵게되었다. 인심좋은 마을사람들과 친해지고 홋카이도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답고 고요한 자연경관을 접한 후부터 점차 히다카에서의 체류기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늘 묵는 숙소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소학교의 존재도 알게되었고, 그 학교에 등하교 하는 시골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일본에 사는동안 내내 국제학교를 다녔고, 그후에는 엄마와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다보니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 경험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늘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친구가 된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도움으로, 그리고 몇 차례의 가족회의를 거쳐 아이들의 시골학교 체험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전교생 50명인 이곳 시골학교는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어찌나 순박하고 친절한지. 연수와 민재는 첫날부터 열렬한 환영과 관심 속에 순조롭게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공부하고, 놀고, 선생님들의 배려와 도움 속에 자연스레 히다카의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길 3년, 벌써 세번째 일본 소학교 체험이다.
아이들이 잠자리를 정리한 후 학교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와 남편은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현관에 있는 우리집 자연냉장고에서 아침거리를 가져와 토스트 혹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간단히 먹는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따로 냉장고나 냉동고가 필요없다. 현관의 공간이 겨울동안 냉장고 겸 냉동고 역할을 하는데, 집안 실내와 가까운 곳은 0도쯤이니 냉장고, 바깥과 가까운 곳은 영하 4~5도쯤으로 냉동고가 된다.
“딩동”
정확히 7시 40분에서 45분 사이, 우리집 현관벨이 울린다.
“네~”
목소리 높여 대답하며 나가서 문을 열면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문앞에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얘들아 좋은 아침. 아이들 금방 나올거야~”
이 동네에 사는 히다카 소학교 아이들이다. 스키복과 두툼한 겨울모자, 장갑으로 다들 무장한 채이다. 눈이 오는 날에는 옷과 모자에 눈이 내려 다들 눈사람이 된 아이들 볼이 빨갛게 얼어있다. 같이 학교를 가자고 연수 민재를 데리러 온 것이다. 도보로 30분은 족히 걸리는 곳에서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를 뚫고 걸어오는 아이들도 있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예쁘서 마음같아선 한 명 씩 꼭 안아주고 싶다. 반갑다고 왕왕 짖어대는 곰순이를 현관밖으로 밀어낸다. 아이들이 기다리는동안 곰순이와 놀면서 조금이라도 추위를 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수와 민재도 서둘러 스키복과 모자, 장갑 등으로 무장한 후 친구들이 기다리는 밖으로 나간다. 밤새 또 눈이 5센치는 족히 내린 듯, 겨울 내내 온통 마을을 덮고 있는 흰 눈에 새 눈이 또 쌓였다. 신설이 아침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라~!”
다함께 학교로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을 배웅한다. 아이들의 뒷모습이 작아지는 저편 너머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오늘은 맑음.
아침상을 치우고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널고나면 이제 하루중 가장 즐거운 시간, 바로 아침산책을 갈 시간이다. 특히 맑은 날씨인 날은 아침산책을 준비하는동안 두근두근 기대된다. 오늘은 얼마나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따뜻하게 옷을 껴입고 모자와 두툼한 장갑을 낀다. 곰순이는 우리가 채비를 하는걸 보고는 산책가는 것을 눈치채고 연신 꼬리를 흔들고 펄쩍펄쩍 좁은 집을 뛰어다니며 흥분상태. 아침산책을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는건 아마 우리가 아닌 곰순이일 것이다.
이 마을에서 우리가 선호하는 아침산책 코스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날그날 기분과 날씨, 체력에 따라 발길닿는대로 정하곤 한다. 오늘은 마을 캠핑장 숲길을 따라 걷는 코스.
폭신하고 부드러운 신설을 밟으려면 홋카이도에서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제설차가 출동하기 전,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야 한다. 늦어지면 일제히 출동한 제설차들이 국도며 집 앞 골목이며 가릴 것 없이 싹 눈을 치워놓는다. 홋카이도의 제설작업의 신속함은 진정 존경할만하다. 홋카이도의 겨울의 삶이라는 것이 제설작업 없이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눈덮인 산과 하얀 구름이 점점이 펼쳐진 파란 하늘의 풍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이 곳에 있는동안 내내 실감한다. 시골의 풍경이 뭐 별거 있나, 매일 보면 지겹지 않겠냐, 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이 작은 시골마을의 아침풍경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다르다. 간밤에 내린 눈의 양, 아침의 날씨와 햇빛, 구름의 모양은 같은 자리에서 보는 풍경을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우리 눈 앞에 펼쳐준다.
홋카이도의 눈은 습기를 머금지 않은 눈, 일명 ‘파우더스노우’이다. 이 눈을 밟으면 나는 특유의 소리가 있는데 우리가 흔히 눈밟는 소리로 알고 있는 ‘뽀드득’이 아니라 ‘ ‘푸수숙’ 비슷한 소리이다. ‘뽀드득’은 눈이 습기를 머금고 있을 때 나는 소리인데 한국에서 겨울에 내리는 눈을 밟으면 이런 소리가 난다. ‘푸수숙’ 소리가 나는 홋카이도의 눈은 밟아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지는 눈이다. 쌓여있는 눈을 ‘푸수숙’ 소리를 내며 밟거나 스케이트 타듯이 미끄러져 걸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참 즐거운 놀이이다.
곰순이는 아침산책에 나서면 ‘얘가 12살 먹은 개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주변을 탐색한다. 추위나 차가운 눈따위가 두려울소냐. 사슴과 여우, 곰이 서식하는 숲이니 야생동물의 냄새때문에 흥분한 탓도 있으리라. 인적이 없는 숲길을 걸을 때는 줄을 풀어주곤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1미터가 족히 될법한 깊이의 눈밭을 헤치며 돌아다니는 곰순이를 보는 것은 아침산책의 또 다른 즐거움. 다리가 눈에 묻혀서 몸만 보이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마치 수영하는 것 같다.
“쟤, 고베에서는 저정도는 아닌데 여기서는 뭐가 저렇게 좋은걸까”
“곰순이도 여기 눈에서 노는게 좋은가보죠.”
어린아이처럼 눈을 밟고 헤치며 즐거워하는 나처럼 곰순이도 이 폭신하고 깨끗한 눈이 주는 촉감과 기분을 만끽하는건지도.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어쩔때는 앞발로 눈을 파내기 시작한다. 나무 주변의 땅 밑에서 서식하며 겨울을 나고 있을 작은 동물들의 냄새를 맡기라도 했나보다. 자기 몸의 반 이상이 눈 속으로 들어가는데도 멈추지 않고 팔 때도 있다. 혹시라도 거기서 웅크리고 있을 야생동물에게 공격받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나 서둘러 곰순이 이름을 부른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콧등으로도 안듣다가, 우리가 “곰순아, 우리는 간다.” 하며 발걸음을 옮기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눈구덩이에서 몸을 빼고 쫓아온다.
코, 입, 눈썹, 얼굴 전체가 온통 눈으로 뒤범벅이 된 곰순이의 모습이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
“곰순아, 야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눈밭에 우뚝 서서 숲너머 저편에서 들리는 기척에 꼼짝하지 않고 귀기울이는 곰순이의 늠름한 모습을 보면 장난처럼 얘기하곤 한다.
곰순이의 조상은 야생늑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분명 이 아이의 유전자에는 야생에서 뛰놀던 본능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마치 호모사피엔스인 우리 인간이 여전히 사냥과 수렵채집 시기의 특성을 우리 유전자에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홋카이도의 야생늑대들은 멸종했지만 예전 그들이 살던 터전인 홋카이도에서 어쩌면 그들의 흔적을 본능적으로 느끼는지도.
40분, 길게는 1시간쯤 걸리는 아침산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따뜻한 등유난로 앞에 앉아 차가와진 손과 발을 덥힌다. 그리고 남편은 회사업무, 나는 글쓰기, 곰순이는 달콤한 낮잠, 각자의 시간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2달은, 엄마이자 홈스쿨선생인 나의 본래의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시간, 이이들과 하는 삶의 다채로운 체험을 글로 남길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다.
홋카이도 히다카 마을의 아침산책은 우리가족이 고베로 돌아가면 가장 그리워하는 일과이다. 이 깨끗한 눈의 마을이 주는 가장 큰 선물… 투명한 아침햇살 속에 파란 하늘, 하얀 구름과 함께 펼쳐지는 설산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박한 마을…. 앞으로 우리 가족이 언제까지 이곳을 찾게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건 더 이상 홋카이도의 이 작은 시골마을을 오지 않게 되는 미래의 그 어떤 날에도, 내 마음이 가장 그리워하는 풍경은 바로 아침산책에서 만난 이 풍경이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