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인 기자 문화, 보복성 기사에 대한 두려움이 유체이탈 가능케 해
미투운동, N번방 사건, 고위 공직자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 성추문에 대한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잊혀질만 하면 또 다른 사건이 터지고 세상은 이내 시끄러워진다.
성폭력 사건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데에는 피해자들의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언론이 이를 보도하고 확산시킨 것도 있다. 묻힐 뻔한 사건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가해자를 처벌하고 관련 법을 신설하거나 개정하는 등 여론 형성의 장을 만든 데에도 언론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긴다. 과연 언론 그리고 기자들은 성추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점이다. 만일 자유롭지 못하다면 ‘내로남불’이 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유체이탈 화법을 쓴 듯 또 다른 가해자를 나무라는 모양새가 된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보도는 해야겠지만 이 보도에 담긴 진정성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언론매체와 기자들 역시 성추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재계 연예계 등 사회 전 분야를 막론하고 끈임없이 성추문 사건이 터져 나왔지만 기자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언론 매체와 기자들 세계에서 성추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해자일 때는 철저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후배기자들을 향한 손버릇과 언행이 좋지 않아 취재현장에서 ‘모세의 기적’을 선보이는 기자도 있고(그를 피하는 후배기자들이 자조섞인 목소리로 이와 같이 표현), 식사자리에서 노래방을 가자고 한 뒤 블루스를 추자고 종용해 홍보직원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꼽힌 기자도 있다고 한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 인사들이 이같은 행동을 했다면 벌써 기사가 게재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일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언론 매체들의 대단한 의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정의로운 언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아니면 라이벌 매체에 카운터펀치를 날리기 위해서라도 기사를 게재할 법 한데 언론 매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과거 한 정치인이 여기자를 성추행했을 땐 엄청난 보도가 쏟아졌다. 당연히 그래야했다. 하지만 기자가 가해자인 성추문 사건을 본 적이 있는가?
기자가 언론사 외부의 취재원을 성희롱, 혹은 추행했을 경우 피해자들은 보복성 악성기사가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한다. 언론 매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피해자 회사의 만류도 한 몫 한다.
내부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후배 기자들은 선배기자의 나쁜 손버릇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목격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자 세계는 여전히 수직적이다. 선배 기자들은 지금도 주입식으로 스파르타식으로 후배 기자들 교육을 진행한다. 선배들에게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다.
또, 어렵게 기자가 되었고 기자의 꿈을 접을 수 없어 불의에 대해 ‘물 흐르듯(?)’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참고: 기자는 회사 내부에서도 정의를 외칠까?)
기자, 그리고 언론 매체들이 유체이탈 화법을 쓰지 않고 떳떳하게 성추문에 대해 기사를 다룰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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