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통해 얻은 인사이트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게 대학교 때 아빠를 인터뷰하고 나서다. 대학생이 되고 내가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아빠랑 자주 술자리를 갖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빠의 청춘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흥미로웠다. 어렸을 때부터 이일 저일 안 해본 일이 없고 이런 일까지 겪는다고? 할 정도로 별일을 다 겪어서 아빠 기억 속에 거대한 책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툭 펼치면 그땐 그랬지… 스토리가 나온다. 그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고 인사이트 있어서 어느샌가 나 혼자 듣고 있기 아까워 녹음했었다. 기억했다가 주변 친구나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나눠주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아빠의 경영 노하우를 공유하는 측면에서.
아빠의 사업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엄마는 항상 17번이나 부도를 맞고도 사업을 하는 대단한 사업가라고 표현했다. 어려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가 태어난 이후로 사업을 시작해서 아빠는 30년 넘게 사업을 운영했고 엄청 많은 경험을 했다.
18살 때 돈을 벌기 위해 처음 안테나 설치를 배우고 안테나 설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전문 기술자까지 찾아갔을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 기술을 바탕으로 방송사와 방송 공사를 계약해서 조그맣게 사업을 시작하였고 방송 사업을 발판으로 점차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진득하게 한 종목만을 하다가 자리를 잡고 다른 사업으로 확장하려고 하면 꼭 한 번씩 작게 부도가 났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무리하게 투자하는 것도 있고 새로운 종목을 시작하면서 적응이 안 된 상태로 사업을 추진하면서 겪는 과정인 것 같았다. 처음 부도를 맞았을 땐, 당황해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지만 여러 번 겪으면서 오히려 사업적으로 더 단단해지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대처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얻었다.
17번이나 크고 작은 부도를 맞은 아빠 사업은 내가 중학생쯤 됐을 때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운영됐었다. 그 뒤로 15년은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된 줄 알았는데 20살이 넘어 우연히 아빠 지인분들에게서 아빠의 경영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사업을 운영하면서 여러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신뢰’라고 강조하셨다. 사업을 할 때 영업하기 시작하면 영업을 바탕으로 운영이 되면서 사람에 좌지우지되지만, 영업하지 않고도 그 회사의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맡기면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아빠는 직원들한테 영업하지 말라고 강조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 거래처가 대부분 오래 유지되었다. 심지어 부도를 크게 맞아서 회사가 힘들어졌을 때 아빠를 믿고 일 년가량 대금을 기다려 준 회사들도 많았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신뢰라고 강조하셨다. 회사는 잘될 때도 있고 잘 안 될 때도 있는데, 잘될 때 베푼 호의가 잘 안될 때 돌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들 관리도 각별히 신경 쓰셨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라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보너스를 챙겨주고 각종 복지를 늘리려고 시도하셨다. 실제로 아빠 회사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일했던 직원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10년이 넘게 근무하신 분이 많아서 가족같이 지냈었다.
요즘은 가족 같은 회사에 대한 평이 안 좋지만, 직원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물론 복지가 좋고 제때 연봉만 올려준다면 온 맘을 다해 회사에 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정’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회사에서 역할을 아빠는 인정해 줬다.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직원들의 말을 믿어주고 설사 실수하더라도 나무라지 않았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하셨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나는 동의 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높은 것은 신기했다. 그래서 다들 자기 회사처럼 진짜 온 맘을 다하는 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빠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월급이 밀리거나 정리해고를 해야 했을 때 직원들이 스스로 월급을 삭감하고 일부는 월급날을 스스로 딜레이 하면서 회사를 다 같이 지켰다. 지금의 나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마 월급을 밀리기 시작할 때부터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시는 어렸을 때라 신기하기만 하고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회사였다. 스스로 희생하면서 회사에 다니던 게 당연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도대체 어떤 믿음이길래 회사에 그렇게 마음을 쓸 수 있을까?
대학교 3학년 때 휴학하고 인턴으로 회사를 잠깐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입사 당시 33명이었던 회사가 정확히 한 달 만에 6명으로 줄었다. 그러더니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이사를 하고 정리해고 당한 선배들한테 연락이 와서 월급을 받았는지 물어보곤 했었다. 당시는 너무 어린 나이에 첫 회사라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못 하고 계속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그곳에서 약 10개월을 일했다. 처음 들어간 팀의 팀원은 팀장 포함 4명이었는데 한 달 만에 팀장과 인턴인 나만 남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팀장님도 그만둔 후였다. 마지막 그만두기 두 달 전에는 나와 대표님만 남았었다. 나는 회사에 대한 애정이나 믿음, 신뢰가 있어서 계속 다닌 게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만둔다는 말을 못 했고 약간은 계산적으로 휴학 기간 인턴 업무를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약간은 그 직원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가 잘 됐으면, 다시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고 점점 몰락해 가는 회사가 안타까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먼저 그만둔 선배이자 팀장님을 만나 차 한잔한 적이 있는데, 내가 입사하기 전이 회사가 승승장구하던 시기고 대표님이 첫 창업 후 한 번의 성공을 맛보면서 직원들 분위기도 좋았다고 한다. 일이 없지도 않았는데 어려워졌단 이유로 갑자기 대거 정리해고를 하면서 회사가 기울어졌다. 당시 그 직원들로 조금만 버텼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정리해고는 했지만 일은 많았고,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거래처의 신뢰도 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에 대표님과 둘이 마지막 점심을 하면서 대표님의 우울한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아빠의 경험 이야기를 해줬다. 대표님은 이제 고작 한번 부도를 경험했으니, 앞으로 많은 성공과 실패가 남았다고, 우리 아빠는 이미 17번의 부도를 경험했다고, 그래서 힘내야 한다고 충고해 줬다. 생각해 보면 그때 대표님의 나이 고작 31살이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리다.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나이인데 경험이 없어서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게 안타까웠다. 어쩌면 지금은 우리 아빠처럼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실패하면서 자신만의 신념을 찾고 인사이트를 얻는다면 다시 일어나서 충분히 잘할 수 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