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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xperiencer Sep 12. 2023

생각은 복잡해지는데, 경험은 단순화되고 있다.

세미나에서 얻은 인사이트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란 직업이 인하우스에서도 하청의 하청의 하청 취급을 받았던 적이 많이 있었다. 사실 디자이너로 일을 안 한 지 오래라 현재는 어떻게 잘 바뀌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변 디자인을 하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봐도 확실히 옛날보단 디자이너에게 기회도 많이 주고 권한을 많이 주는 회사들이 점점 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친척 언니가 영국으로 ‘디자인 경영’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을 때 ‘디자인 경영’이란 말을 처음 접했다. 당시는 뭔지도 모르고 그냥 디자인 이론 수업인가?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나도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을 했고 영국 유학 준비 중이었지만 디자인 경영이란 단어는 너무 생소했다. 그 뒤 언니는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취직 준비를 꽤 오래 했는데 오랫동안 취직이 잘 안 됐다.

언니의 스펙은 누가 들어도 인정할 만큼 좋았다. 그런데 면접을 갈 때마다 디자인 경영이 어떤 전공인지 정확히 모르는 면접관이 태반이고 설명하면 디자이너가 무슨 비즈니스에 참여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그림이나 그리는 거지라며 무안을 주는 면접관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디자이너들이 적극적으로 비즈니스에도 참여하고 오히려 솔루션을 내놓는 관점에서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시각이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지만 당시는 내 기억에도 디자이너, 기획자, 개발자가 같이 일을 하면 언제나 디자이너의 직급이 최하위였다.


그 이후 4년 정도 이후에 본격적으로 UI, UX 디자인이 인기 있고 국내에서도 디자인 씽킹, HCI 등 디자인 이론이나 디자인 사고 방법이 나오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나도 우연히 인터랙션 디자인을 영국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디자이너도 기획이 필요하구나, 디자인적 사고방식도 중요하구나! 깨달음을 얻던 시기였는데 해외에서의 디자인 개념, 직무와 국내에서 디자인 개념과 직무가 많이 달라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공부한 인터랙션 디자인은 전체적인 디자인 개념으로 설명되어 ‘인터랙션이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을 설계한다.’는 전제 아래 기술이 툴로서 어떤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국내에서 처음 접한 인터랙션 디자인은 앱이나 웹 디자인을 할 때 어떻게 반응해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터치 기반의 인터랙션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개념을 정리한 책이나 관련 전공이 국내에도 많이 생기면서 폭이 더 넓어졌지만, 당시는 인터랙션 디자인을 설명해도 앱 디자인으로 대신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 전문성을 이해하고 써먹는 리더가 별로 없어서 매번 아쉬웠다. 일을 시켜보니 이런 거 잘한다고 하며 일을 시키는 리더가 대부분이었고 내 전문성을 이해하려고 관심을 두고 업무에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리더는 아직까진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전문성이 뒤처질까 두려워서 회사에 다니면서 관련 서적을 읽거나 워크숍, 세미나 등에 종종 참석해서 공부를 계속했지만 아직도 어떻게 해야 최적화된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지는 계속 고민 중이다.


몇 년 전에 디자인 씽킹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UX 디자인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이라 아직 정확한 개념이 정의되기 전이었고, 디자인 씽킹, 디자인 경영이라는 비즈니스도 많이 등장했었다. UX 디자인을 오프라인 공간, 서비스 개념으로 접근해서 경험을 개선한 사례들에 흥미가 있어서 참석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세미나에 참석해서 놀랐었다. 그래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구나 싶었다.

업계 여러 관계자가 내용을 집필해서 외국에서 회사에 다니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 등 다양한 분들이 책을 쓰면서 고민했던 부분을 공유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그중 한 분의 연설이 굉장히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그분은 외국에서 UX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분이라고 하셨는데, 책을 집필하면서 국내에선 이 디자인 씽킹 이론이 통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셨다고 한다. 실제로 국내 기업 대부분이 적용에 실패하기도 했다고 예시도 들어주셨는데, 그 이유가 내가 고민하던 문제와 동일해서 놀랐다.


기존 서비스에서 문제점을 찾고 경험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꾸준히 관찰하고 문제점을 발견하면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 개선하는 것이다. 사실 이때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매출에 즉시 연결되기 어려움이 있고 수익을 바로 계산하거나 이익을 창출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방법이 대부분이다. 경험을 개선한다는 자체가 서비스의 퀄리티를 높여서 장기적으로 고객들이 로열티를 가지고 우리 서비스를 오래 사용하고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인데 매출 측면으로 봤을 땐 ‘10만큼 투자했으니 10을 거둬들여야지’를 증명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이 고작 몇 개월 길어야 1~2년 정도 도입해 보고 계속 매출 챌린지만 하다가 엎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견 미용샵의 서비스를 개선했다고 가정해 보자. 기존의 애견샵은 로비에 강아지 용품을 팔기 위해 잔뜩 쌓아놓고 강아지를 넣어놓을 철장으로 된 켄넬 몇 개만 바닥에 두었다. 로비 뒤로 애견 미용실과 목욕실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새로 개선한 애견 미용샵은 강아지들이 자유롭게 놀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로비에 강아지 용품을 다 치워버리고 바닥에 인조 잔디도 깔아서 강아지 놀이터를 만들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강아지들은 분명 개선된 애견샵을 좋아해서 미용하면서 스트레스도 덜 받고 오히려 애견샵 가는 길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주인들이 개선된 애견샵을 방문하면서 충성 고객층을 확보하고 이 충성 고객들이 새로운 고객들을 데리고 오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애견용품을 하나라도 더 팔고 싶은 주인이 이 서비스 개선안을 반대만 하지 않으면 이론적으로 더 매출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내 기업은 하나라도 더 용품을 팔아야 하므로 매출을 들먹거리며 반대한다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이 우선이다.

문제는 이야기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대부분 참석자 (특히 국내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혹은 중소기업 대표)의 질문은 하나같이 단기간에 수익을 내기 위해 디자인 싱킹 방법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나요? 사례가 있나요? 쳤다는 것이다.

그분은 여기저기 손을 들어 질문하는 질문자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창피했다. 단기간 이익을 내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나 작은 사업체일수록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이익만 좇아가다간 고객이 진짜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서 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지금은 확실히 많이 개선되어서 경험 디자인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지하는 기업들이 꽤 있는 것 같아 그런 사례들을 볼 때마다 재미있다. 그렇게 만들기까지 내부에서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했을까? 어떻게 설득했을까? 그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고 경험이 더 많아질수록 나는 오히려 뭐가 우선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이제는 수익을 빼놓고 생각하는 방법이 얼마나 무모한지도 깨달아서 그런 것 같다. 뭣도 모르던 시절엔 ‘당연히 돈 벌지! 그걸 왜 못 기다려!’ 라도 했는데 이젠 그 말의 위험성도 알고 있다. 그래서 점점 더 생각만 복잡해지고 경험은 단순해지는 것 같아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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