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스타터 레터 #5
“점심은 어떻게 하세요? 같이 드실까요?”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우리 팀원들은 점심시간마다 돌아가며 내 안부를 물었다. 신규 입사자가 혹시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배려심 넘치는 따스운 사람들. 하루는 남은 일을 처리하고 나가려고 점심시간에 혼자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지나가던 팀원이 갑자기 옆 팀 직원과 함께 먹으라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 정작 그분은 병원 예약이 있다며 홀홀 떠나버렸다. “여러분~ 저 혼밥 잘해요~”라고 회사 옥상에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나의 혼밥 레벨은 이미 대학생 때 만렙을 찍었다. 독일어과에서 홀로 국어국문과를 복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시간표가 전혀 달랐다. 자연스럽게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많았다. 혼밥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쇼핑도 여행도 곧잘 혼자 잘한다. 그렇지만 혼자 하기 정말 어려운 일이 있다. 못 하지는 않지만 혼자 하려면 평소보다 몇 배의 용기가 필요한 그런 일. 바로 클라이밍이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은 모두 SM엔터테인먼트 지하 연습실에 있다던데,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은 모두 클라이밍장에 있는 것 같다. 처음 암장에 갔을 때 그들의 엄청난 인싸력(力)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응원해주고 서로 영상을 찍어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세계라니… 무엇보다 내가 오를 때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니?!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아싸는 첫 클라이밍 후 모든 에너지가 소진돼 사흘을 꼬박 피곤해했다.
하지만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관종이 깨어난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클라이밍의 매력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해주고,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기보다 배움의 초석으로 삼는 사람들. 가족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조건 없이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일은 어렵다. 때로는 가족도 쉽지 않다. 그 어려운 일을 클라이머들은 해낸다.
그렇다면 클라이머들이 응원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무엇일까? 굳이 통계를 내보지 않아도 높은 확률로 “버텨”가 1위일 듯하다. “버텨”는 두 글자밖에 안 되지만 ‘할 수 있어’와 ‘잘했어’의 의미가 함축된 깊이 있는 표현이다.
“버텨”를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어!
탑 홀드를 찍느냐 마느냐 하는 짧은 순간에 외치기엔 너무 길다. 두 글자가 딱 알맞다. 신기한 건 뒤에서 누군가 버티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왠지 버틸 힘이 생긴다. 물론 버티지 못하고 떨어진 적도 많지만, 다시 도전하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용기도 생긴다. 완등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승부욕도 불타오른다. “버텨” 두 글자가 가진 에너지가 있다.
한 달 전 테니스 앱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COO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 막바지에 ‘스타트업 씬 동료들에게 응원 한 마디’를 요청했는데 뜻 밖에 “버텨”를 들었다. 암장에서만 쓰는 응원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스타트업이라는 항해에서 포기하지 말고 우리 함께 버텨요!”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완등하지 못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을 해내기 위해 버텼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잘 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마주했을 때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 나뿐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보지 않았을까. 그러니 혹시 홀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버텨”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떤 조건도 없는 순수한 클라이머의 응원법이니 부담 없이 받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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