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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Nov 15. 2022

떨어지지 않으면 낙법을 배울 수 없다

슬로우스타터 레터 #7

아웃사이드, 데드포인트, 카운터밸런스, 힐훅 등등…


여러 기술 중에 클라이밍에서 제일 중요한 기술이 무엇일까? 어려운 문제일수록 멋지게 점프하고 화려해 보이는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난도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술은 ‘낙법’이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볼더링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잘 떨어지기가 어렵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무리하게 탑 홀드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는데 손이 닿지 않아 떨어진 적이 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떨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된 낙법을 구사하지 못했다. 다른 홀드에 왼팔이 긁히며 상처가 났다.


또 한 번은 (역시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무리하게) 코디네이션 문제를 풀다가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끗했다. 그 후로 6개월 넘게 클라이밍을 쉬게 됐다. 안전하고 오래 클라이밍을 즐기기 위해서는 잘 올라가는 것보다 잘 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몸소 깨달았다.


하지만 올라가지 않으면 오르는 법을 알 수 없듯, 떨어지지 않으면 낙법을 배울 수 없다.

스무 살, 나는 처음으로 인생의 낙법을 배웠다.



사고는 꼭 탑 홀드 직전에 벌어진다.



내 세상이 무너졌어



“그레고리력*이 도대체 뭐라는 거야?”

(*역대 수능 언어영역 최고난도로 손꼽히는 지문이다.)


수능 시험장을 나서며 친구들은 언어영역을 출제한 익명의 국어학자를 욕했다. 실제로 그해 언어영역은 전무후무한 불수능으로 유명한데, (약간 자랑이지만) 난 잘 봤기 때문에 우쭐해져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뱉고야 말았다.


“야, 수능 별것도 아닌데? 그냥 모의고사랑 똑같잖아. 또 봐도 되겠다”


그랬다. 말이 씨가 되어 이듬해 두 번째 수능을 보게 되었다. (난 언어영역 빼고 나머지는 폭망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는데 수능에서는 통하지 않는 표현이었다.


인생 두 번째 수능일. 그해 언어영역은 전년도를 의식했는지 물수능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열심히 준비한 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손이 떨려서 연신 OMR카드 마킹을 실수했다. 원래는 지문에 밑줄 치지 않아도 읽고 바로 문제를 풀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밑줄 없이는, 아니 밑줄을 쳐도 한 줄 읽기가 버거웠다.


집에 갈까? 지금 가면 엄마가 뭐라고 할까? 어디 걷다가 시험 끝나는 시간 맞춰서 집에 들어갈까? 이래서 1교시 끝나고 뛰어내리는구나…


쉬는 시간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만큼 멘탈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래도 화장실에서 눈물을 찍어 닦으면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2교시 시험을 보러 들어갔다. 이미 망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자신감이 생겼다. 어차피 망한 거 엄마가 새벽부터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이나 맛있게 먹고 가자!는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그렇게 사회탐구영역까지 마치고 털레털레 걸어가며 첫 수능 때보다 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전례 없는 물수능인데 언어영역을 망쳐서 문과생으로서는 인서울에 갈 만한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삼수하면 뭐가 달라질까? 또 지옥 같은 재수종합반에 가고 싶진 않은데… 초중고부터 재수까지 13년을 들이부은 결과가 이거라고? 내 인생은 끝났고,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이제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성인이 되었지만 삶의 목표는 빼앗긴 스물. 어른들은 영어 공부를 해야 할 시기라고 했지만, 그것이 수능을 대체할 만큼 커다란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당장 정해진 길이 없기에 갈팡질팡 살았다. 뜻밖에 대학에 합격하기 전까지.



떨어진다아아아.ing



Life goes on-



가고 싶었던 대학은 아니지만 어쨌든 합격하고 나니, 그동안 뭐가 그렇게 허무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수능을 망쳐도 인생은 계속되는 거였잖아?! 인생의 목표가 오직 대입인 줄만 알았는데 인생의 갈림길은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선택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타인이 정해준 목표가 아닌 나만의 목표를 세우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인생은 쉽게 망하지 않았다. 수능보다 더 큰 언덕이 내 앞길에 있었고 조금씩 걸어 나가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조금 못하면 어떻고 잠깐 무너지면 어때. 이 마음을 10대 시절부터 배울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수능을 끝낸 열아홉, 스무 살의 나는 더 안전하고 사뿐하게 떨어질 수 있었을 텐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본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작년 이맘때, 클라이밍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탑 홀드를 잡지 못한 채 떨어지고, 다른 홀드에 부딪히고, 포기하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오르는 게 클라이밍의 매력이라고. 떨어지면 좀 어때, 수없이 많은 다른 문제가 펼쳐져 있는걸! 그리고 클라이머들은 떨어지며 낙법을 배우고, 더 성장하는걸!


우리네 인생도 넘어지고 포기하고 좌절하고 우당탕탕 무너지고,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나고 나아가고 살아가는 것이 매력이라고. 수없이 많은 갈림길이 있는걸! 그리고 다들 그렇게 성장해가고 있는걸!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이 과거의 나처럼 너무 깊은 상실감에 빠지지 않기를. 넘어지지 않으면 일어나는 법을 배울 수 없기에, 잠깐 넘어져도 괜찮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해본다.



PS. 수능 끝나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면, 클라이밍을 추천해 드려요. 암장에는 수많은 목표가 준비돼 있답니다. 일단 벽에 붙으면 속세를 잊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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