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하임 하나 먹고 생각해 보자.
대학 때 알던 오빠가 가끔 정말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담배를 한 대씩 피운다고 했다. 군대에서 참을 수 없는 화와 짜증이 밀려와 어쩔 줄 몰라할 때 선임이 한대 피워보라고 권한게 시작인데, 일단 한대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면 터질 것 같던 화가 사그라들면서 이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했었다.
누구보다 차가운 이성으로 누구보다 뜨겁게 누군가를 움직였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많은 명문들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쓰였다던데 과연 그래서일까?
아스팔트 보다도 저만치 아래에 깔린 흙먼지 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홍보대행사 인턴 시절, 급여는 70만 원이었고 퇴근 시간은 없었다.
그곳 대부분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는데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한 달 중 일주일 가량은 새벽 3-4시에 퇴근해야 했던 그곳에서 비흡연자라 함은, '야 담배 한 대 피우고 하자'가 의미하는 그나마 몇 분의 휴식도 착취당하는 존재였다.
담배연기가 하얀색인 줄 알았는데, 새벽 2시 40분, 압구정동 길바닥의 차가운 공기에 실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의 색은 푸르뎅뎅했다.
상의 탈의하고 멋있는 표정 지으며 담배 피우는 배우들의 화보가 전혀 멋있게 느껴지지 않은 시기가 그때부터이지 않을까.
담배는 멋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습관의 관성은 무서운 법. 가끔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가 솟구칠 때, 담배 한 대가 간절했다. 몸은 압구정동 뒷골목에서 테헤란로 한복판으로 옮겨졌지만, 때때로 그 모든 순간이 여전히 새벽 3시를 앞둔 차가운 밤공기 속 치열하고도 아슬아슬한, 그저 외로운 길바닥이었다.
하나도 멋지지 않지만, 이거라도 안 하면 젊은 나이에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사한 1인이 될 것 같아 비정기적으로 찾던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된 것은 순전히 미스터 문 때문이었다.
미스터 문은 우리 회사의 총무 담당 직원이었는데, 싹싹했고 배려도 많았으며 직원들이 필요한 것을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채워주는 정말 찰떡같은 센스의 고마운 사람이었다.
미스터 문의 업무 중 하나는 탕비실의 간식거리를 채워주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초코하임이 가득 들어 있어 기분 좋아하며 하나 꺼내 먹는 내게 '매니저님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채워놨어요.' 하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천사 같은 사람이 있나.
초코하임은 고급 과자였다. 어릴 때는 비싸서 자주 못 먹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너무 먹어서 피부에 트러블이 날 정도였다. 얼마나 초코하임을 좋아했느냐면, 이제는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처절한 다툼 후, 그때마다 전 남자친구들은 화해를 청하며 늘 초코하임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면 곧이어 나는 양손에 초코하임을 들고 우적거리며 '이런다고 내가 풀릴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야!' 하며 앉은자리에서 한 상자를 먹어치우곤 했었다.
그렇다. 내게 초코하임은 가장 즉각적인 행복과 쾌락을 주는, 가장 합법적 경로의 형태였다.
뉴욕 뒷거리에서 약에 취해 총 들고 인생을 말해야 래퍼인가? 초코하임을 양손에 든 이 이 순간, 내가 곧 드렁큰 타이거요 투팍이다.
미스터 문 덕분에 스트레스가 있던 없던 쪼르르 탕비실로 가서 초코하임을 까먹었다. 초등학생이 아트박스 그냥 못 지나치듯, 내가 그랬다.
너무 초코하임을 꺼내먹어서 탕비실 과잣값을 내 월급에서 떼야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을 때, 볼에 뾰루지가 하나 올라왔다. 그제야 미스터 문께 사정했다.
정말 부탁인데 이제 초코하임 그만 사다 줘.. 부탁이야..
예고 없이 주말 근무하라고 할 때, 허공에 돈 뿌리면 지나가는 행인에게 고맙다는 소리라도 들을 텐데 돼도 안될 아이디어에 돈과 노동을 소모시키는 삽질을 해야 할 때, 제품 결함과 서비스 문제는 생각 않고 마케팅은 돈만 쓰면서 매출도 안 나온다며 저 팀은 뭐 하냐는 말을 들어야 할 때.
그때마다 떨리는 손으로 초코하임의 봉지를 뜯어 입에 한 대 물었다. 푸르뎅뎅한 연기는 없지만 바로 코앞에 퍼지는 그 달큼한 향기와 바삭거리는 소리, 손에 닿는 그 기분 좋은 까까 촉감.
담배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초코하임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위치하고 원료도 맛도 다르지만, 내겐 초코하임이 담배였다.
한동안 회의나 일이 안 풀릴 때, 그렇게 말했었다.
초코하임 하나 먹고 생각해 보시죠.
초코하임 하나 물면, 생각이 정리됐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마음이 복잡할 때 창밖을 보며 초코하임 한 봉지를 뜯어 입에 문다.
달콤하고 무해한, 내 쾌락의 정점.
이 순간 여기가 이데아.
P.S: 얼리지 않아도 맛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