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늘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몰려다니며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때로 술 한잔도 했으며 퇴사하는 날에는 조촐히 식사도 함께 하던.
친구라 하기에는 선이 있고 지인이라기에는 너무 자주 보는 동료들과의 인연은 어쨌든 친한 사이라 부를만했고 함께 있던 회사를 떠나서도 종종 연락을 하고 가끔 만나 밥 먹는 사이 정도는 됐었다.
그 인연들의 유효기간은 명확하다. 서로 얻어갈 것이 없어지거나 얻을 것이 조금이라도 적어지는 순간 바로 끝난다.
물질적 이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한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되어주는 사이에서 내 삶의 찌질을 저쪽도 만만치 않게 이고 지고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던 동병상련, 그 남루한 일상이 눈에서 멀어지는 순간 쏘 쿨하게 굿바이.
몇 년 전 극도로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대형폐기물처럼 떠들려 휴직을 하고 난 뒤 자연스러운 퇴사가 이어졌을 때 수많은 시절 인연들이 사라졌다.
이별의 한마디가 있을 리 없는, 고깃집 불판 위에서 열심히 연기를 빨아들이는 흡입환풍기가 거세게 한번 돌아가듯, 10년이 넘는 직장생활 속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카톡 친구에서 나를 차단했음이 명백한 사람들의 얼굴 없는 프로필 사진들을 보며 이 산뜻한 결별은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얼굴과 상반신이 채 붙어있지도 않은, 눈코입도 없는 프로필로 보이는 한때의 인연들을 보며 나를 차단함과 동시에 내 리스트에서 완벽히 사라질 수 있도록 해야지, 왜 이런 달걀귀신 페이스로 원치도 않는 사람의 카톡 친구 목록에 남도록 했는지 카카오톡 관계자를 향한 물음표만 떠오른다.
퇴사라는, 그저 살며 비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이벤트에 의미를 부여해 보지면, 아스라이 사라지는 또 하나의 시절을 정리하며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시덥지 않은 인연들과의 작별이다.
사실 그 인연들에 ‘시절’이라는 말에 담긴 낭만을 나눠 주기도 아까운, 그것은 그저 기간제 인연이었다는 것을. 시작과 끝이 명확한 기간제 인연들에 감정 얹은 것은 정말 부질없는 것.
샴푸 한통을 사서 다 쓰면 갖다 버리는 것처럼 당연히 돌아오는 기간제 인연의 종료에 대한 상념은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분리수거일에 함께 내다 버리는 정서 디톡스가 진정한 퇴사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절의 시작임을 열여섯 번째가 된 퇴사로 다시 생각한다.
퇴사의 마무리는 짐싸들고 나오는 헛헛한 하루가 아니었다. 한결 산뜻해진 카톡 친구목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