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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May 29. 2024

수영장의 아저씨들

수영장의 아저씨들



대학교에 진학해 가장 충격적이고 섭섭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담임 선생님의 부재’였다. 지도 교수가 있다곤 하나, 담임선생님과는 결이 다르다. 담임 선생님이란 자고로 매일 아침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고, 공지사항을 전달해 주고, 조언과 잔소리를 해주고, 하루가 끝날 때 다시 만나 오늘은 어땠는지, 내일의 과제는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길잡이가 되는 어른을 일컫는다. 지도교수님은 솔직히 그 정돈 아니지 않나? 담임선생님 같은 지도교수를 만난 분이 계시다면, 음. 진심으로 부럽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재수학원에서도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담임 선생님이 계시는 건 당시 내 19년 인생 중 영유아기 때 밖에 없었다. 나에겐 담임 선생님의 존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이런 역할을 해주는 담임교사 없이, 오로지 내가 알아서 내 시간표대로 수업에 들어가야 하고, 공지사항도 과대가 전달해 주고(과대도 그저 나와 처지가 똑같은 학교 생활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또래친구다.)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세세히 알려주는 어른도, 나의 발전과 성과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켜봐 주는 어른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때는 이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친구들에게 한탄할 정도였다. (친구들은 이게 왜 섭섭한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긴 했다. 사실 나는 워낙에 티쳐-포지티브 타입이긴 했다. 점심시간마다 교무실에 놀러 가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의 쉬는 시간을 제가 뺏었군요. 죄송해요.)

성인에겐 담임선생님일랑 마땅히 부재한 것이며 담임 제도란 어린 학생들만의 고유한 전유물이었다는 것을 서서히 인정하게 되었다. 이젠 학생으로 살았던 기간만큼이나 내가 밥벌이를 하는 어른으로 산 기간이 거의 비슷해진 때에서야 말이다. 어쨌든 나는 다시는 담임선생님과 같은 존재가 내게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영을 다니면서 내게 담임선생님이 생겼다. 일명 ‘초록수모 아저씨’이다. 이분이 나의 담임선생님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담임선생님으로 혼자 몰래 속으로 모시는 아저씨이다. 이 아저씨를 소개하자면 강습이 없는 화목토 새벽 6시에 나오시며, 매일 초록수모를 쓰셔서 나는 ‘초록수모 아저씨’라고 속으로 부른다. 당연히 본명이나 나이와 같은 개인정보는 모른다. 아저씨의 초록 수모에는 ‘뭘 봐?’라고 다소 과격한 멘트가 써져 있어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우리가 다가갈 필요 없이 아저씨가 항상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저씨의 성격상 ‘뭘 봐?’라고 써진 수모를 고른 이유도 그냥 강해 보여서(?) 고르시지 않았을까 싶다. 강습은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강습날인 월수금은 위층의 헬스장을 다니신다. 수모에 가려진 머리색은 제법 하얘서 센터 로비에서 아저씨를 마주쳤을 땐 ‘얼굴이 익숙한데 뉘시더라?’ 한참 생각했다.

수영 실력은 이젠 내가 더 앞서는 듯 하지만 수영장에 처음등록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셔서 우리 수영장에서 이 아저씨를 모르거나 이 아저씨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담스럽게 아무한테나 말을 거시는 건 아니고, 한 두 달 정도의 관찰기를 두신 뒤에 말을 거시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도 다닌 지 2달이 넘어서야 아저씨가 말을 거셨기 때문이다. 중도 이탈하는 회원님들도 많은지라 정을 줄지 말지 지켜보시는 기간이 아닐까 추측한다.

수영장에 입장하면 아저씨와 목례를 함으로써 오늘의 수영이 시작된다. 아침에 등교해(수영장 입장)-교실에 계신 선생님(물속에 계심)과 인사를 하고(목례)-오늘의 공부(뺑뺑이 돌기)를 하다 보면-선생님(초록수모 아저씨)이 다가오셔서-고쳐야 할 점이나 칭찬할 점(폭풍 피드백)을 알려주시고-오늘의 공부가 끝나면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하교(퇴수)한다. 누가 봐도 담임선생님과 학생의 관계 아닌가?

최근엔 부담임 선생님도 생겼다. 초록수모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그냥 내가 부담임 선생님으로 혼자 몰래 모시고 있다. 이분은 ‘빨간 수모 아저씨’이다. 빨간 수모 아저씨는 호리호리한 인상에 짙은 눈썹을 갖고 계신다. 초록수모 아저씨보다 I 성향이 더 강하신 듯하다. 초록수모아저씨는 눈을 안 마주쳐도 조언을 해주시는데, 빨간 수모아저씨는 눈을 마주쳐야만 조언을 해주시기 때문이다. 나의 추측이지만, 그 조언이 너무나도 프로페셔널하여 왕년에 수영강사라던가 수영 선수이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빨간 수모 아저씨는 절대 섣불리 조언을 나누지 않으신다. 하지만 내가 ‘평영 너무 못해 바보’ 시기엔 일부러 유아풀로 건너와 평영 발차기를 알려주시는 다정함도 지니셨다. (음. 일부러 건너오셨다는 건 나의 추측이긴 하다. 수영 강사급 수준을 지니신 분이 유아풀에 올 일은 정말 없으니까?) 나의 실력이 도저히 조언을 참을 수 없던 수준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지금도 여전히 조심스레 조언을 건네신다. 내가 아저씨의 눈을 보고 ‘뭐 해주실 말씀 없으신가요?’ 하는 표정을 지을 때만 말이다.

담임선생님보단 우리에게 덜 간섭하시고, 한 발짝 살짝 떨어진 관점으로 학생이 조언을 구할 때만 조언을 해주신다는 점에서 부담임 선생님처럼 느껴진다.

나는 가끔 수영이 가기 싫거나 귀찮을 땐 초록수모 아저씨와 빨간 수모 아저씨를 떠올린다. 나의 결석을 행여나 걱정하실까 봐. 그냥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등교하지 않아 선생님의 마음을 쓰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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