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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Nov 14. 2022

방송인도 아닌데, 스탠바이.

나도 '큐'를 기다린다.

스탠바이 (stand-by) 뜻:

1. 정식 방송을 하기 전에 준비 또는 그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 흔히 프로듀서가 방송이 시작되기 직전에 제작진과 출연자에게 준비하라는 뜻으로 외치는 말을 이른다.

-국어사전


오늘 나는 새벽 다섯 시부터 오전 열 한시(05:00-11:00)까지 여섯 시간 동안 스탠바이를 했다.


어제도 같은 시간 스탠바이를 했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고,

오늘도 결국엔  연락이 없었다.


오늘은 오전 아홉 시쯤 까지 전화벨이 울리지 않길래, 아예 마음을 놓아 버리고 잠옷을 입은 채 여유롭게 아침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비행 승무원에게도 <스탠바이>라는 근무 스케줄이 있다.

만약의 비행에 대비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것이 임무.


여기서 준비란, 이미 예고된 시간 안에 언제든 연락이 오면 "Yes"라고 대답하고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방송의 '큐(cue)'사인인 샘이다.

빠르게는 60분 안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기에, 집에서 공항까지의 소요시간에 따라 '준비상태'는 승무원마다 제각각이다.


저녁 형 인간인 내게 새벽에 시작하는 스탠바이는 부담스러운 업무 중 하나다.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잠에 들어야 하기에 그 전 날들부터 조금씩 수면시간을 조절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걸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나는 평생을 저녁형 인간에 머물러 살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에 최대한 늦게 일어날 수 있도록 잠에 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 놓는 것이 그나마 노하우.

-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랐다. 바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얼마 전에 마음에 드는 베이지 색 매니큐어를 발견했다. 평소 손톱까지 신경 쓰는 세심한 사람이 된 건 늘 직업 덕이라 생각한다.


- 1분 안에 입을 수 있도록 검정 스타킹과 유니폼을 한 곳에 정리해 두었다. 스타킹이 나간 곳이 없이 온전한지 확인하는 것은 필수.


- 집 열쇠, 사원증, 여권을 가방 앞 주머니에 미리 넣어 놓았다. 유니폼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세 가지. 사원증과 여권이 없으면 비행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백 살이 넘은 우리 아파트는 열쇠 꾸러미만 한 주먹. 열어야 하는 문만 세 개, 그중 하나는 부루마블 (Blue marble) 보드게임판에 있는 황금열쇠를 닮았다.


- 회사 아이폰 충전. 두꺼운 비행 매뉴얼을 들고 다녔던 옛날과 달리, 이젠 아이폰에 중요한 정보가 다 들었다. 근무 스케줄, 그날그날의 비행 정보, 출근 도장 모두 이 아이폰 안에 들었다. 회사 자체 어플만 20개 정도 깔려있다.

지금까지, 깜빡하고 아이폰을 집에 두고 왔다는 동료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중요하다.


어젯밤 결국엔 밤 열두 시가 넘어 잠에 들었다.

'(출퇴근 시간 빼고, 근무 시간만 총 열 시간이 넘는) 스페인 말라가(Malaga) 비행에 불려 가면 난 죽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스탠바이 (stand-by) 뜻:

2. 돌발 사태로 예정된 방송이 취소될 것에 대비하여 마련해 두는 임시 프로그램.

- 국어사전


승무원이 스탠바이를 하는 이유도 방송의 것과 비슷하다.

돌발 사태로 예정된 승무원이 나타나지 않을 것에 대비하여 대기시켜 놓는 상비군과도 같다.


비행 기종마다 그에 맞게 반드시 탑승해야 하는 '최소 승무원 수'라는 것이 있는데, 승무원의 수가 최소에 달하지 못하면 그 비행기는 비행 법규 상 출발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수백 명의 승객과 회사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야기할 수 있기에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보통의 회사원들이 큰 부담 없이 어느 정도 자기 관리만으로도 매일매일 출근을 해내듯 승무원들도 평소의 자기 관리로 그 부담을 덜어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출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어느 직업이든 생기기 마련이다. 출근 바로 전 날 혹은 몇 시간을 앞두고 갑자기 아프거나, 돌봐야 할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그때 회사에 전화를 걸어 출근 불가 상태임을 알리면, 그 펑크를 채우기 위해 차례대로 불러내는 사람이 바로 스탠바이 승무원들이다.


그런데 진짜 돌발 사태는 비행 출발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발생한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승무원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던가, 멀쩡하게 출근한 승무원이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국제선을 타는데 공항에 도착해서야 여권을 두고 온 사실을 알아차렸을 경우다.


다른 직업에는 있는데, 이 직업에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지각'.

사무실은 늘 그 자리에 있어 늦어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지만, 비행기는 떠나버리면 열어야 할 문이 사라진다.


이러한 '진짜 돌발 사태'에 대비하는 또 다른 상비군이 있다.

바로 '공항 스탠바이' 승무원들.


비행 스케줄에 '공항 스탠바이'가 뜨면, 유니폼을 갖춰 입고 예정된 시간 동안 공항 바로 옆 회사 사무실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큐'사인이 오면 공항으로 바로 출동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구 어디로 불려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캐리어 가방에 어떠한 날씨도 커버할 수 있는 옷가지에 생필품까지 단단히 챙겨 나가야 한다는 것.


***


이 막중한 업무인 스탠바이를, 새벽에 일어나 이틀 동안 했건만 회사는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오 예~'


이 기분은 보통 회사원 입장에서 보면 아침에 출근하려고 준비를 다 마쳤는데 전화가 울리고,

'오늘은 회사 나오지 마시고 집에서 쉬시면 됩니다. 내일 봬요!'

라고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순간적으로 허망하지만, 그 끝엔 아마 '오 예~'


승무원 월급의 상당 부분은 수당으로 채워지기에 비행을 덜 하면 돈을 덜 버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비행을 한 것보다는 적지만, 스탠바이 수당이 나온다.

새벽부터 일어나 여섯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그에 합당한 수고비를 받는 것.

비록 급여는 줄지만, 나는 일하는 것보다 쉬는 게 더 좋다.


나의 경우, 스탠바이 스케줄이 쉬는 날이 되어 버리면 기분이 업되고 그 하루에는 조금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일하려고 모아놓은 에너지를 쏟아 보통 휴일에는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해내며 알찬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도 오늘 해낸 일 중 하나.


지금쯤이면 구름 위, 비행기라는 작은 공간에서 200여 명의 사람들과 숨 쉬고 있어야 하는데,

탁 트인 하늘 아래 마음껏 거닐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소중하게 와닿는다. 산책을 하고픈 마음이 생긴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그나저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에서

나는 어쩌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나.



오늘 새벽 5시 30분 경 핸드폰으로 담은 헬싱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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