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을 해서 온통 갈색일 때에는 아무 칭찬도 듣지 못하다가 검은 머리가 나기 시작해 제법 그 비율이 높아지면 핀란드 동료들에게서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그들은 나와 달리 금발이다. 그것도 진하지 않은 14K 금정도. 아예 은발에 가까운 아이들도 있는데, 회색빛에 가까운 파란 눈과 함께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간혹 좀 더 어두운 금발이나 붉은색으로 염색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검은색은 그들에게 범접하기 힘든 색상이 아닐지 싶다. 그래서 검은 머리는 흔치 않다.
아무튼, 너도 나도 금발인 이 나라에서 나의 검은 머리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못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 보인다니. 빈말을 하지 않는 성격의 핀란드인들임을 알기에 그 칭찬이 내겐 더욱더 어색하게만 들린다.
검은 머리가 당연한 한국에 살았을 때에는 나의 머리 색이 유독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냥 검은 게 아니라 아주 새카맣네요"
자연갈색으로 염색을 하러 미용실을 찾을 때면 미용사는 내 머리를 휘적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강한 악센트까지 줘서 말한 '새카맣네요'라는 표현은 마치 내 머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해서 꾸지람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어린 나이에 괜히 주눅이 들고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그 언짢은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새 머리가 날 때마다 다시 미용실을 찾게 만들었다.
남미에 살 적, 검은 머리는 어두운 피부색과 함께 부유하지 않음의 상징이었다.
상류층 중에는 남미 토착민이나 혼혈보다는 스페니쉬 혈통들이 많았고, 티브이 드라마의 좋은 배역이나 광고는 백인에 금발인 사람들이 꿰차다시피 하고 있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토착인의 혈통이 강한 사람, 그들의 머리는 나처럼 유독 새카맸다. 물론 나는 아시안이니 열외가 될 수 있겠지만, 나의 검은 머리가 선망의 대상이 아닌 건 확실했다.
프랑스에 살 적엔 나의 풍성한 머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검디 검고 두껍고, 게다가 숱까지 많아 머리부터 발 끝까지 꽃단장을 할 때면 늘 옥에 티 같았던 내 머리가 칭찬을 받아본 건 난생처음이었던 것 같다.
미용실엘 자주 가지 않으니, 나의 머리는 길고 숱이 많은 그대로 풍성한 날들이 많았다. 반곱슬이라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자연스럽게 웨이브가 졌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고데기로 웨이브를 줘서 하나로 묵고 다녔다. 그러면 친구나 동료들은,
"넌 정말 아름다운 머리를 가졌어"
라고 칭찬하며 내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실크 같아"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내 눈엔 실크는 아니었지만 검고 단단한 머리카락은 그 단면이 두꺼워 빛까지 반사시킬 정도니, '반곱슬은 개털'이라는 편견이 없는 프랑스인들에겐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랬다, 두껍고 반곱슬인 내 머리, 한국에 살 적 학교 친구들이나 미용사들에게 개털 같다는 말은 자주 들어봤다. 미용사들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추가 비용을 내야 하는 트리트먼트를 권장했다.
"다 상했네, 상했어~"
가 한국에 살 적 내가 만난 미용사들의 단골 멘트였다. 내 머리는 그야말로 시커멓고, 개털같이 두껍고, 숱이 무진장 많은 상한 머리였다.
그런 머리가 프랑스에서는 실크 같은 머리가 되었다.
그렇게 부러움이 묻어나는 말을 몇 번을 들으니, 아프리카인들처럼 심히 곱슬거리지 않으면서, 아랍인들이나 보통 아시안들처럼 직모까지는 아닌 나의 반곱슬 머리가 조금 괜찮아 보이긴 했다.
한국에 살 적 숱이 많은 머리는 당연히 쳐내야 한다는 걸로 알았고, 그 이후에는 별생각 없이 그 방식을 고수했던 나는 풍성한 머리가 아름다운 것임을 지구 반대편에 와서야 알았다. 그것도 누군가의 칭찬에 의해서.
풍성한 머리에 대한 칭찬이 이미 익숙해졌을 때, 핀란드인들은 나의 검은 머리가 아름답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자랑스러운 적 없는 내 머리가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니다. 한 껏 꾸밀 때면 두툼한 머리를 만지는 것이 늘 골칫거리고, 검은 머리보다는 갈색 머리가 여전히 더 좋다.
그래서 프랑스나 핀란드에서도 염색을 하러미용실을 찾는다. 그러면 현지인 미용사는 염색을 왜 하느냐고 물어 온다.
"그냥 검은 머리가 싫어서요"
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숱이 많아 염색약이 많이 들어간다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서도 풍성한 머리에 대한 칭찬은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는 또 마디 한 덧붙인다.
"머리카락이 아주 튼튼하네요,
트리트먼트 같은 건 따로 안 받아도 되겠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갔을 때는 한국에서였다. 동네 미용실을 찾았다.
그 전에는 프랑스, 그 전전에는 핀란드, 그 전전전에도 핀란드에서였었기에 오랜만에 한국의 미용실을 찾으며 제대로 머리를 할 생각에 마음이 한 껏 가벼웠다.
"아유, 아주 새카맣네. 숱도 칠 거죠?"
자리에 앉자마자 미용사의 첫마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예전에 자주 듣던 말이었음이 기억났다. 한국에서 내 머리는 여전히 못난 머리인가 보다.
"숱은 치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려는데,
"눈썹 문신하셔야겠어요."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이번엔 좀 더 당황했다. 요즘 한국에서는 눈썹 문신이 유행인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 채 거울에 비친 내 눈썹을 흘끗 쳐다봤다. 왜 처음 보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난 한 번도 불만 인적 없는 내 눈썹이 그렇게 못났나,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요즘엔 눈썹 문신 다들 하는데, 연예인들도 다 한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미용사는 한 번 더 했다. 마치 죄 없는 머리로 꾸지람을 듣고 아무 말 못 하던 어린 내가 다시 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외모를 지적하는 일이 여전히 왕왕 있는 것 같아 내 잣대를 갖다 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하면 또 뭘 지적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