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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Feb 06. 2022

필리핀 아니고, 핀란드요.

'필리핀에 산다고 했나?'


나는 분명 핀란드라고 했고, 상대방도 그땐 분명 핀란드라고 알아 들었다. 핀란드 나라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 나누었으니, 당시에 혼동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카톡으로 대화를 하는데, 이렇게 물어왔다.


'아 맞다, 핀란드'


핀란드라고 대답하니 상대방도 바로 수정했다.


정말 필리핀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핀란드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입에 더 익은  필리핀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온 건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어느 이유 든 간에, 나는 상대방이 이 두 나라도 구분 못할 만큼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누군가가 필리핀에 산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핀란드라고 하면 보통 거뒀던 시선을 되돌려 한 번 더 흘끔 쳐다본다. 핀란드에 사는 나 조차도.

핀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이 나라에 대해 들어 본 적도, 내 입술로 그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외국을 꽤나 많이 다니는 나 조차도.


따라서 본인도 모르게  필리핀으로 기억했거나, 핀란드라는 이름이 바로 안 떠올랐을 수 있다.

게다가 나의 까무잡잡한 피부는 핀란드보다 필리핀에 산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린다.


Finland와 Philippines, 영어 스펠링이 완전히 다른  두나라를  헷갈려하는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다. 절대로.


프랑스 파리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어디 사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프랑스어로 '팔(f)랑드'(핀란드) 라고 했는데, 상대방은 '따일랑드'(태국) 라고 알아들었다. 발음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혼동하기엔 엄연히 다른데, 이 역시나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프랑스에서도 같은 유럽 나라인 핀란드 사람보다는 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일상적이고, 내 얼굴이 핀란드 인보 다는 태국인에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었다. 졸지에 핀란드도, 필리핀도 아니고 태국인이 되어 버린 일.


미국 L.A 에서는 좀 더 황당한 일이 있었다.

예정시간보다 한참 지연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장 벤치에 나와 나란히 앉아있던 현지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짧은 대화를 하다가, 내게 이곳 사람이냐고 물었고 나는 정확하게 '핀란드'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냐는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곳까지는 차를 타고 왔어요?"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차를 타고 올 수 있나? 너무 자연스럽게 물어서 순간 나도 잠시 착각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독일 친구가 들려준 이와 똑같은 그의 경험담이 생각났다. 미국을 여행할 였는데, 독일에서 왔다고 하니 한 현지인이 차를 타고 왔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설마?' 하고 되물었다.

독일인 친구의 말로는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며 그들의 무지함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 설마 했던 상황이 내 앞에 이렇게 벌어진 것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던 정신을 가다듬으며,

'비... 비행기...'라고 마치 힌트를 주듯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가 자신의 무지했던 질문에 무안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초 간의 정적이 흘렀고,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는듯 큰 소리로 웃더니,


"아, 내가 잠깐 헷갈렸어요. 핀란드라고 했죠? "


나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미국에 비슷한 도시, 지역 이름과 헷갈렸어요. 필라델피아, 플로리다....."


이번엔, 내가 '아차'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국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다 한 번 내 귀로 직접 들을까 말까 한 지역명이지만, 미국인들에게는 핀란드보다 백 배는 더 익숙한 그 이름들이 혼선을 빚는 일 말이다. 상대방의 무지함을 탓할 것이 아니었다. 유럽 대륙 전체와 그 규모가 맞먹는 미국에 도시나 마을 이름이 좀 많으랴. 필라델피아, 플로리다 말고도 찾아보면 핀란드와 흡사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올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버스정류장에서 핀란드에 사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보다는 미국의 어디 마을에서 온 사람을 마주치는 것이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


사람은 낯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경험과 배경지식을 이용해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낯 선 단어를 들었을 찰나에도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참 재미났다.


예전에 터키를 여행하다가 두명의 자전거 여행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자,


"오스트리아요,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아니고 오스트리아."


 라고 대답해서 내가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두나라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유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아마도 터키인들이 이 두나라를 혼동했던 모양이다.


나도 상대방이 잠시나마 혼동해서 무안해하는 일이 없도록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필리핀 아니고, 핀란드요.


필라델피아 아니고, 핀란드요.


오스트리아의 기념품 점에서 봤던 마그넷 문구 : 오스트리아에 캥거루 없음.



*타이틀 사진 - 헬싱키 시장에서 구입한 핀란드 국기가 그려진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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