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삶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대로 영화 같았다.
3개월 전에 간신히 예약한 병원에 늦을까 봐 헐레벌떡 뛰어가는 날에도,
실업 급여를 신청하려 아침 일찍부터 부스스한 꼴로 몇 시간 줄을 섰지만 결국 서류 몇 개가 안 맞아 실랑이만 벌이다가 오는 날에도,
내가 오가는 길은 로맨틱한 프랑스 영화 속의 장면들이 깊게 배어있어 나의 찌질한 상황까지도 마치 영화 속의 한 에피소드처럼 느껴졌다. 그 길에서 주인공들은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에 괴로워하고,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찌린내 나는 지하철도 영화 속의 것과 모습은 똑같았다.
내가 파리에 산다고 하면, 열의 아홉은 앞 뒤 사정은 듣지도 않고,
"우와~"
하고 자동 감탄사를 뿜어냈다.
내게는 뉴욕이 그랬다.
누군가가 "I am from New York"이라고 하면,
나는 "Wow~" 했다.
영화에서만 보던 그 뉴욕?
몇십 개국, 몇 백 개 도시를 가 본 내가 뉴욕은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 동티모르의 땅 끝 마을 <뚜뚜 알라>는 가봤지만 뉴욕은 처음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 뉴욕에서 4박 5일을 체류하게 될 거야"
스톡홀름을 떠나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2교대 휴식을 마치고 기내 벙커에서 나오는데 한 동료 승무원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자마자 '짠' 하고 나타나 말했다.
1박 2일짜리 비행을 떠나며 동료들과 아쉬움을 주고받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하늘 위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뉴욕에 예견된 눈 폭풍으로 우리 팀이 타고 돌아가야 할 비행기가 다음 날 못 오는 상황, 다음 비행기를 타려면 4박 5일을 체류해야 했다.
내 생에 첫 뉴욕, 시작부터 이렇게 영화 같은 스토리라니.
다소 심심한 북유럽에 사는 우리들에게 미국, 그것도 뉴욕은 단연코 인기 취항지일 수밖에 없다. 4박 5일,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기쁨과 설렘 뒤, 조그마한 캐리어에 이틀 치 짐만 싸온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늦은 밤,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서 맨하탄의 호텔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평소와 달리 동료들의 수다는 다소 부산스러웠다.
"속옷도 사야 하고, 난 화장품도 사야 해. 하루치 양 밖에 안 갔고 왔거든"
"1박 2일이라, 운동이나 하려고 트레이닝 복 한 벌밖에 안 챙겨 왔는데"
"누나가 뉴욕 근방에 사는데 연락해봐야겠어, 이번에 보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방금 도착한 회사 메일 봤어? 체류기간 추가로 인해 발생하는 생필품 비용은 보험회사에 청구할 수 있대"
<맨하탄의 아침>
코로나 때문에 호텔의 조식 뷔페가 일시 폐쇄되었다. 대신, 앱으로 아침 식사를 신청하면 다음 날 시간에 맞춰 호텔 리셉션에서 음식을 픽업해가라고 전화가 왔다. 첫날 아침, 음식이 담긴 일회용 식기가 차곡차곡 들어있는 종이 가방을 받으며, 혼자 배달음식 시켜먹는 독거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일반적인 호텔 룸서비스와 다른 점은 스티로폼 식기, 그리고 플라스틱 포크와 칼. 두툼해야 할 팬케익은 배달 중 한쪽으로 기울어 잔뜩 눌렸고, 랩으로 꽁꽁 싸여 일회용 컵에 담겨 온 커피가 실망감을 더했다.
그래도 가지런히 정리해서 그 순간을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보니 뉴욕이라 그런가 그 마저도 힙하다. 그 안에 담긴 속사정까지 알리 없는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니 팔로워들로부터 부러움이 담긴 이모티콘이 쏟아졌다.
해쉬태그, 뉴욕 일상
해쉬태그, 맨하탄의 아침
<폭설의 뉴욕, 여긴 어디?>
휘이, 휘이 바람소리를 들으며 자고 눈을 뜨자마자 티비를 켜니, 밤새 8-10인치의 눈이 왔다는 뉴스 속보가 떴다. 바람소리가 여전히 거센 창 밖을 내려다보니, 눈을 치우는 일꾼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다.
아침을 먹고, 한 벌뿐인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왜 항상 내가 가는 방향 반대쪽으로 부는지, 솜털 같은 눈이 바람의 힘을 받아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새로 산 가죽 부츠가 쌓인 눈에 푹 잠길 정도로 한참을 걸으니 불편했던 발에 감각이 사라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구글 지도에 보이는 커피숍들은 보이는 족족 문이 닫혀있다. 뉴욕에서 미국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잠시 눈을 피해 문을 연 쇼핑 몰에 들어갔다. 통유리로 된 창 밖을 바라보다가 궁금한 게 생겨 때마침 가까이 서있는 경비 아저씨에게 물었다.
"바보 같은 질문 하나만 할게요, 이 앞에 저 높은 건물은 뭐죠?
세상에 바보 같은 질문은 없다며 아저씨가 대답했다.
"세계 무역 센터예요, 9.11 테러 때 붕괴되고 새로 지은 거죠"
<앤디 워홀, 마하트마 간디>
미술품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갤러리를 다녀오면 기분이 적어도 일주일은 무척 좋았다. 천재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 경이로웠고,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마음속 깊숙이 응어리처럼 진 것들이 그림 한 점이나 조형물로 표현된 걸 발견할 때면 가슴이 뻥 뚫리기도 했다.
뉴욕에서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였다면 가지 않았을, 뉴욕 현대 미술관 (MoMA)에 갔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마음껏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감상이라고 하기엔 예술에 대한 조예가 부족해 '구경'이 더 맞다)
앤디 워홀, 반 고흐, 샤갈, 피카소, 백남준 작가, 요즘에서야 알게 된 핀란드 예술가, 아이노 알토의 작품도 있다. 이 사람들보다 더 늦게 태어나 이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이, 뉴욕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칠레 작가, 알프레도 자르가 통 거울에 잉크로 새긴 <마하트마 간디의 일곱 가지 사회 죄악>을 읽는데 그 거울에 내 모습도 비쳤다.
<Seven Social sins 일곱 가지 사회 죄악>
Wealth without work. 노력 없는 부
Pleasure without conscience. 양심 없는 쾌락
Knowledge without character. 인격 없는 지식
Commerce without morality. 도덕 없는 상업
Science without humanity. 인성 없는 과학
Religion without sacrifice. 희생 없는 기도
Politics without principle. 원칙 없는 정치
<뉴욕의 한식당>
평소 한식을 즐겨먹는 편은 아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없는데 굳이 찾아 먹을 만큼 식탐이나 먹성이 뛰어나지 못하다. 맨하탄 다운타운을 걷는데, 폭설로 인해 문 닫은 식당들과 상점들을 지나다 조명이 켜진 한식당을 발견했다.
"유럽에서 오셨네요"
들어가자마자 백신 패스 검사를 하는 바람에 신분이 드러났다. 뉴요커 행세는 할 수 없게 되었군.
영어와 한국어가 섞여 알파벳으로 적힌 메뉴를 보고 주문했다.
"씨푸드 순두부찌개요"
한국에 이런 음식이 있었나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해물 순두부찌개>가 맞다.
매울까 봐 걱정을 했는데,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췄는지 오히려 싱겁다.
한국처럼 반찬이 이것저것 나온 것이 신기해 사진을 찍어 한식을 좋아하는 프랑스 친구에게 보냈더니, 답장이 왔고 그렇게 식사 내내 채팅을 했다. 웃기게도 때마침 프랑스 노래가 흘러나온다. '뉴욕에서 한식당에 왔는데 프랑스 노래라니'라고 말하니, 친구가 답했다.
"그게 뉴욕이지"
계산서가 나왔다. 메뉴판에는 17달러라고 적혀 있었는데, 계산서에 적힌 가격은 23.6달러.
미국은 모든지 가격에 세금과 서비스 비용이 별도로 붙는 것이 참 익숙하지 않다. 매 번 돈을 낼 때마다 속은 기분이다. 계산서를 쳐다보고 있으니, 한국인 직원이 와서 말했다.
"팁은 포함되어 있으니, 따로 내지 않으셔도 돼요"
<뉴욕 카페>
독서가 취미는 아니지만, 여행을 할 때에는 책을 꼭 챙겨간다. 하룻밤 이상 해외에서 체류해야 하는 비행을 갈 때에도 그렇다. 일이나 여행에 필요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충전하는데 책만 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뉴욕에서 지낸 4박 5일 동안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날씨도 날씨지만, 많이 걷고, 처음 타본 지하철에서 헤매고 핀란드와 달리 수많은 인파 속에 있자니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었다.
생각보다 별 볼일 없었던 소호(SOHO)에서 빈티지 옷 가게 몇 군데를 구경하다가 한 카페 (Butler Bakeshop & Expresso Bar)에 들어갔다. 안에는 나처럼 혼자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들은 뉴요커일까. 책을 읽다가 여기가 뉴욕이라는 그 영광스러운 사실을 잊을까 봐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서너 군데의 카페를 더 가고, 마지막 날엔 이름이 익숙한 프렌치 카페 (Pain Quotidien)에 갔다. 뉴욕의 카페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인지 그중 책이 가장 잘 읽혔다. 두 시간이 훅 지나갔다.
"꼼짝도 않고 책을 읽던데, 무슨 책인지 물어봐도 돼요?"
계산서를 갖고 온 직원이 물었다.
"아일랜드 작가의 책인데..."
갑자기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책 표지가 여행 중 더럽혀지는 걸 막으려고 해 놓은 포장을 뜯어서라도 보여주려는데,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책을 좋아하는 같은데 제가 책 추천 좀 해도 될까요?
지금 읽는 책은 스톡홀름 공항 책방 점원의 추천, 그리고 다음 책은 뉴욕 카페 점원이 추천해 준 책이 될 것 같다.
<미국 말투>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영화보다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던 어릴 적, 엄마와 거실에 누워 TV 토요명화에서 본 미국 영화배우들의 말투는 더빙된 목소리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웠다. 영화임에도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그들이 하는 표현들은 내가 평소 듣고 쓰는 말들과 너무 달라서 마칙 책을 읽듯 어색하게 들렸다.
Isn't it so lovely?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요?)
옷가게에서 맘에 드는 옷을 거울에 대고 보는데, 다른 손님을 상대하느라 분주해 보였던 직원이 내게 물었다.
How was your day? (오늘 하루 어땠어요?)
슈퍼에서 고른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놓았을 때 계산원이 건넨 첫마디.
손님인 나에게 그들은 연인 사이에서나 쓸법한 애칭으로 불렀다.
Lovely (러블리),
Sweetheart (스위하트),
Honey (허니)
나 역시나 소설의 말투로 어색하게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It was a great day. (아주 훌륭한 하루였죠)
<월스트리트>
영화, 소설책, 최근 뉴스에까지 살면서 꾸준히 들어왔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없을 것 같았던 그곳. 호텔은 월스트리트에서 꽤나 가까웠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지하철을 타러 갈 때도, 나는 이 월스트리트를 지나갔다. 유명한 블루보틀 커피를 맛보러 갈 때도. 호텔에서 제공되는 아침식사를 먹고 나서 월스트리트의 푸드트럭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기도 했다.
뉴욕을 떠나기 전 날 밤, 동료와 루프톱 바에 가기로 한 게 취소가 되어 혼자 칵테일을 마실 곳을 찾다가 월스트리트에서 가까운 바에 들어갔다.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칵테일을 파는 작은 바였다. 안에 들어가니 여리여리하고 잘생겼지만 바람기가 다분한 배역에 어울리는 남자 바텐더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유일한 점원인 그는 나를 바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곳엔 이미 세 명의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여자였다.
"책을 읽을 생각이었는데, 조명이 완벽하군요"
내가 소설체로 말했다.
"아주 잘 찾아오셨어요"
점원이 소설체로 대답했다.
진(Gin)과 향신료, 생강이 어우러진 <에스토니아>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향신료의 향이 책 몇 장을 거뜬히 넘길 때까지 입 안에 오래 남았다.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건 처음이었는데, 최소한 칵테일과 책은 최고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이 길게 남는 칵테일이예요"
"바로 그거예요, 제 동료가 그걸 노리고 개발한 거죠"
바텐더가 다른 여성들과 대화를 주고받다가 틈이 생겼을 때 나도 한 마디 말을 그와 주고 받았다.
밤이 깊어가고, 양복을 딱딱하게 차려입고 술에 이미 취한 듯 한 네다섯 명의 남자들이 들어와 시끌시끌해졌다. 급기야는 바텐더와 거친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낌새가 보여,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쌓인 눈을 밟으며 호텔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월스트리트를 지나갔다.
내 생애 첫 뉴욕은 짧은 한 편의 소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