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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Jul 14. 2023

90세 노인과 미국 댈러스의 트램

과거 나의 프랑스어 선생님은 주로 60-70대의 여인들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청바지를 입은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새 하얀 중단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사라졌다. 특히 청바지를 입은 매무새는 20대 여성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 보였다. 내게 파리지엔느는 바로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보며 노년기에 접어든 멋스러운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이던 날, 미국 댈러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호텔 밖을 나갈 계획조차 없었다.

뉴욕과 라스베이거스가 아닌 댈러스와 같은 도시에 여러 번 비행을 가면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가는 동료들 또한 거의 없다.

'아예'없다라고 하려다가 '거의'없다라고 한 이유는, 한 동료가 도심에서 조금 어진 카우보이 마을 투어를 할 목적으로 열다섯 살의 아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호텔 체크인을 하며 2박 3일의 체류 기간 그저 호텔에서 푹 쉴 예정이라는 말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아들을 데리고 온 동료가 우리에게 할 거리 하나를 추천해 주었다.


"시내를 순환하는 엠 트롤리 (트램과 유사함)라고 있는데, 호텔 근처에 정류장 하나가 있으니 혹시 심심하면 한 번 타봐. 시에서 운영하는 거라 무료고, 근사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심심풀이로는 괜찮을 거야"


댈러스 도심에 볼거리가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바, 우리는 형식적으로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텔 조식 뷔페에서 동료들과 모였을 때, 그녀는 다시 한번 더 트롤리에 대해 설명했다.


방에만 처박혀 있을 동료들을 걱정했던 건지, 아니면 볼거리는 없다고 했지만 그녀 본인은 좋은 경험이 있었던 것인지, 어쨌든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것이 내심 고마워 그날 오후 나는 트롤리를 타기로 했다. 두 번이나 권유한 그녀의 성의가 완벽하게 묵살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성격등이 떠밀린 것도 있었다.



트롤리에 올랐다.

무료라 자리가 없을까 우려했던 것 과는 달리 승객은 나 혼자였다.

'정말 근사한 볼거리는 없는 것인가'


중앙 출입문 앞에서 나를 맞아준 백발의 노인은 수동으로 문을 닫았고,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려진 줄을 잡아당겨 운전기사에게 신호를 주는 벨을 울렸다.


트롤리가 출발했다.

다음 역이 다가오자, 노인은 목청을 높여 정거장 이름을 외쳤다.

그다음 정거장에서도, 다음다음 정거장에서도.

그때 까지도 승객은 오직 나 혼자였고, 조금씩 부담감이 느껴졌다. 


'괜히 탔나, 다음 정거장에서 그냥 내릴까.'


중간쯤 운행했을 때, 다행히 한 명이 더 탔다.


운행 중 노인이 잠깐 트롤리 뒤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내 등받이를 잡고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노인을 좀 더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래서 올려다본 그의 입안으로는 최소한 윗니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 가까이서 보니 그는 단순히 백발의 노인이 아니라 적어도 90세는 되어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 좀 전에 탄 승객이 내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부담감이 다시 나를 옥죄어왔다.


'나 때문에 노인이 계속 일을 하네. 내릴까.'


그러기엔 호텔이 아직 멀었고, 내가 내리고 손님이 한 명도 없을 걸 생각하니 그 또한 신경 쓰여서 그냥 불편한 마음을 견디며 끝까지 가기로 했다.


마지막 정거장이 다가올 때쯤, 앞에서 트롤리를 운전하느라 뒤통수만 보였던 운전사가 노인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내일 어디쯤에서 픽업할까?"


운전사는 노인보다 적어도 육십 살은 어려 보이는 앳된 여자였다.


트롤리 중앙 쪽에 서있던 노인은 똑같이 큰 소리로 받아쳤다.


"XX 랑 XX 거리가 교차하는 곳 모퉁이는 어때, XX 방향 쪽 말이야"


노인이 귀가 밝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좀 전까지 내심 노인이 적어도 이 트롤리의 책임자 정도의 타이틀 정도는 갖고  있기를 바랐는데, 대화를 들어보니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출근하는 그냥 노인이었다.


운전사가 다시 물었다.


"그쪽은 좀 그렇고 XX 쪽으로 나올 수 있어?"


노인이 쿨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괜찮아. 나한텐 그게 그거야. 네가 편할 대로 해."


마치 동년배기 동료의 대화 같았다.

나는 속으로,

웬만하면 노인이 처음에 말한 쪽으로 픽업을 와주지 젊은 사람이 어찌 저리 배려가 부족할까 생각하다가,

또 한편으로는 노인을 '노인'으로 보지 않고 자신과 동등하게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인 대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그러다가,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70세 정도 되는 노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당신이 70세가 넘으면 모두가 당신을 굉장히 늙은이 취급할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70세의 인간이 힘이 바닥에 부칠 만큼 무능하지 않다는 의미로 들렸다.


젊은 운전기사는 노인을 최소한 이런 취급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종착역에 내렸고, 트롤리에서 내리자마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떠나는 트롤리를 한 동안 지켜보았다. 그 안에 있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좌석에 앉아 목구멍을 가다듬으며 한숨 돌리고 있을까.

아니면 계속 목청을 높여 운전기사와 대화를 이어갈까.


댈러스 시내를 한 바퀴 돌며 딱히 기억에 남는 풍경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대신, 노인의 움직임과 목소리가 담겼던 순간순간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필름처럼 지나갔다.


다음 날, 헬싱키로 돌아가기 위해 모인 동료들에게 난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내가 어제 트롤리를 탔는데 말이야...'


그러자, 우리 팀에서 가장 어린 긴 금발 머리에 인상이 상냥한 옌니가 내 말을 낚아 채더니,


'어, 나도 탔는데. 혹시 봤어? 그... 그..."


내가 재빠르게 받아쳤다.


"노인말이야?"


우리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노인의 작은 행동들이 준 강렬한 인상이 주제였다.


흔들리는 트롤리 안에 중심을 잡고 서있던 노인의 균형감각,

그의 정상적인 청력과 목청,

정거장 이름을 외치는 그의 기억력과,

손님의 수와 관계없이 올바르게 수행해 낸 임무.


옌니 또한 노인의 나이가 적어도 90은 되었을 거라는 말에 동의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의 눈은 너무 빛이 나서 마치 글썽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정확하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감동시켰을까.



그가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자동으로 열린 문을 수동으로 닫고, 벨을 울리고, 버스 정거장 이름을 외치는.

그동안 우리는 90세의 노인은 이 정도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단정 지으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우리 회사 승무원 한 명이 45년 근속을 하고 67세의 나이로 정년퇴직을 한 사실이 사내 뉴스로 올랐다.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조종석에서 파일럿들과 함께 미소 짓는 녀가 담겨 있었다. 다크 브라운으로 염색한 짧은 앞머리와 풍성하고 둥글게 올린 뒷머리, 짙은 인조 속눈썹, 그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은 마치 오드리 헵번을 연상하게 했다.


그녀와 함께 비행을 한 동료들에 의하며 젊은 시절 그녀는 모델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늘 아름다웠고, 자세가 굉장히 꼳꼳했으며 밝고 씩씩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는 여러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끔 정년퇴직을 앞둔 60대의 동료들이 자신들의 노년 계획을 읊어줄 때면 그들의 창창한 미래가 너무 빛이 나서 내가 설렐 때도 있. 노년기, 인생 2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은 새로운 꿈을 꾸고, 그 모습은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내 주변의 멋진 여성들이 몸소 가르쳐주었다. 그런 내가 90대의 노인 앞에서 멈칫한 것이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90대의 노인은, 리모컨을 누를 손가락 힘조차 없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침대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 거라고 상상해 왔다. 가끔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하는 90대의 노인들을 보긴 했지만, 그 나마도 상당히 지쳐보였다.


그렇기에, 그런 90대가 '노동'을 한다는 사실은 감격에 가까웠다.

아무리 팔팔한 내 동료들도 70세가 되기 전에 일터에 물러나는데,

그것도 흔들리는 트롤리 안이라니.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고 보험체계도 복잡하다던데 푼돈이라도 벌어야 하는 슬픈 사연이 있는 건 아닐까.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그 트롤리에서 일하면 얼마를 벌 수 있을지 궁금해져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우리와 함께 봉사합시다-

<<365일 운행하는 트롤리의 성공의 열쇠는 자원봉사자 분들입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유연 근무제로 운영되고 있으니 자원봉사 지원 양식을 작성해 주세요>


노인은 배려와 양보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도 아니었고,

슬픈 사연의 주인공도 아닌,


자원봉사자였다.

90대에 이보다 더 멋질 수 있을까.



 비스켓과 물. 트롤리 안 노인의 자리.
정거장에서 갓길로 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표지판을 드는 노인.
댈러스 거리의 한 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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