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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Apr 23. 2023

실버들의 섬, 실버들의 파라다이스

핀란드 사람들과 휴가 이야기를 할 때면 꼭 언급되는 곳이 있다.


연중 기온이 따뜻하며, 저렴하고 맛있는 로컬푸드, 현지인들은 친절해서 언제 가도 환영받는 기분이 드는 곳.

그곳은, 일곱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카나리 제도 (Canary islands)다.


스페인에 속하지만, 위도상으로는 아프리카에 가까워 겨울에도 햇살이 풍부하기에 유럽인들에게는 특히 겨울 휴양지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까나리 액젓'으로 친숙한, 바로 그 까나리.

(현지 발음으로는 까나리가 정확하다.)


헬싱키에 베이스를 둔 우리 항공사는 겨울이 되면 일곱 개의 섬 중 가장 크고 유명한 개의 섬에 운항한다.

가장 큰 순서로, 테네리프(Tenerif), 푸에르테 벤투라 (Fuerte Ventura), 그란 카나리아(Gran Canaria),  란사로테(Lanzarote).


비행기 안에는 젊은 층보다는 아이가 있는 가족이나 노인층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 이유가 뭘까?




내가 처음 카나리 섬에 간 건 무려 10여 년 전, 프랑스에 살 때였다.


갑작스럽게 휴가를 떠나기로 하고 한국으로 치면 일명 '땡처리 패키지'를 알아보다가 한눈에 사로잡혀 바로 클릭한 것이 <란사로떼 3박 4일 패키지>.

(3박 4일이었는지, 4박 5일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파리에서 출발하는 왕복 비행기 티켓과 호텔까지의 셔틀버스 그리고 조식과 중식, 석식까지 모두 포함된 올 인클루시브 호텔 패키지가 400유로 정도였다.

한국 돈으로 약 55만 원.


여행 당일날, 비행기 티켓과 호텔 예약권 등을 수령하기 위해 오를리 공항에 패키지 여행자들이 모였는데, 대부분이 아이를 동반한 가족과 노인들.

그중에는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그리고 그 보다 조금 더 큰아이는 손을 잡고 혼자 온 애띈 엄마도 있었다.

부모도, 노인도 아닌 젊은 층은 나와 일행, 그리고 몇몇 뿐인 것이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었다.


우리가 도착한 호텔은 수영장이 딸린 리조트였다. 우리 그룹 말고도 다른 여행사를 통해온 패키지 여행자들로 가득했는데, 눈에 띈 전부가 프랑스인들. 첫날엔 이게 우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옆 호텔은 영국인들, 그 옆 호텔은 독일인들로 가득했다.


호텔에는 세끼 뷔페 식사뿐 아니라 다양한 거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침에는 수영장에서 워터 에어로빅 강습,

낮에는 레크리에이터들이 골목대장처럼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놀이를 했고, 그러는 동안 부모들은 수영장 파라솔 아래에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레크리에이터들은 노인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고, 노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은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저녁에는 호텔 내 공연장에서 마술쇼나 콩트 같은 다양한 공연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니 아이, 부모, 노인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트거나 친해졌고, 부모와 함께 온 십 대 아이들 중에는 썸을 타는 애들도 눈에 띄었다.


딱 한번 휴화산을 방문하는 버스투어를 했는데, 그때 가이드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크리스틴.

영국인인 그녀는 란사로떼 섬에서 25년을 살았다고 했다. 키가 작고 마른 체격에 태닝 한 피부, 주름이 자글자글, 못해도 65살 정도는 돼 보였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신선하고 다양한 야채와 과일은 저렴하기까지 해서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스페인의 급여는 비록 작지만 물가가 저렴하여 돈 걱정 따위는 영국에서보다 오히려 덜한다고. 연중 풍부한 일조량은 그녀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현지인들은 따뜻하고 관대하여 이방인이 느끼는 위화감을 덜어준다고. 마지막으로, 영국에 살았으면 그녀의 나이쯤이면 퇴직하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었겠지만 자신은 이곳에서 활발하게 노동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물론 그녀가 정말로 행복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행복의 이유로 꼽은 요인들은 너무나도 사실임이 분명해 보였다.




내가 다시 카나리섬을 찾은 건 두 달 전 테네리프 비행을 했을 때였다.


이코노미 좌석으로만 구성된 작은 비행기 안은 체격이 큰 북유럽인들, 주로 핀란드인들로 가득 찼다. 승객들은 샴페인과 와인, 맥주를 끊임없이 시켰고, 이와 함께 초콜릿 바, 젤리, 포테이토 칩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오물 조물 맛있게 먹으며 모처럼만의 여행에 잔뜩 들뜬 듯한 그 모습은 백발의 머리와 술만 아니면, 소풍 가는 어린이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왜 나는 동심이 어린이들만의 것이고 노인은 노인들만의 마인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우리 승무원들이 묵는 호텔이 위치한 곳은 테네리프의 한 중심가였다. 늦은 밤에 도착했는데, 화려한 네온사인이 가득한 다른 휴양지와는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조식 뷔페를 먹으러 갔을 때에는 특이한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백발의 서양 할아버지들. 핀란드어를 하길래 우리 팀 파일럿들인가 하고 다가갔는데, 아니다.


접시에 음식을 담아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 가니 이번엔 백발의 커플이 식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 테이블에 앉아 동료들은 언제 내려오려나 기다리며 핸드폰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새 내 주변 테이블을 가득 메운 백발 군단들.

이번엔 내 검은 머리가 괜히 민망하게 느껴졌다.



전 날 비행기 안에서와 조식 뷔페에서 마주한 풍경 때문인지, 호텔 밖을 나섰는데도 계속해서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형광색 반바지를 입고 빨리 걷기 운동을 하는 할머니,

웃통을 벗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조깅을 하는 할아버지,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 몸을 적시는 할머니,

비치체어에 누워 태닝을 하는 할아버지.


이 광경을 핸드폰에 사진으로 담아 '다 늙어서 뭐...'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부모님께 보내드리기로 했다. (우리 부모님은 이 말을 한 50 여세 때부터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난  부모님이 항상 늙었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보낼 때, 부연설명을 달기 위해 눈에 보이는 노인들의 나이를 대충 가늠해 보니, 평균 75세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60세 정도 돼 보이는 사람들은 굉장히 젊어 보였다. 구릿빛 피부의 그들은 걸음걸이도 나보다 더 빨랐고, 깔깔대는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카페들이 즐비한 해변에 으니 20-30여 명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 모여서 단체 체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팔을 크게 움직이거나, 허리를 크게 돌리는 간단한 운동들이었는데, 주변에서 바라만 보고 있던 노인들이 중간에 참여하는 것을 보니 아마 이곳의 아침일상인 듯했다.


지나가다 보이는 여행사에서는 60세 이상들을 위한 다양한 투어상품을 홍보하고 있었다. 보트 투어, 화산 방문 투어, 버기카 투어까지. 이 섬에 오면 누구나 다 가는 투어이지만, 아마도 그들의 체력과 취향에 맞춰 진행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섬에서 노인들은 따뜻한 햇살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과 다름없는 건강하고 활기찬 삶 또한 누리는 듯 보였다. 물론 건강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여유로운 퇴직금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유한 유럽 도시에 살고, 돈이 많다고 해서 노년에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더 비싼 차를 타고, 비싼 취미를 즐기고 고급 레스토랑에 다니는 것이 풍요로운 걸까? 


더 늙어서는 퇴직자들을 위해 저렴하게 내놓은 아파트에 사는 혜택을 누리거나, 돈이 더 많으면 다양한 활동을 주관하는 요양원, 아니면 아예 같은 건물에 간호사가 상주하는 호텔급의 요양원에 들어가 자신보다 더 건강하거나 아니면 덜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주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유럽에서도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기 전까지, 몸이 쇠약하고 삶이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노인'이라는 편견과 나이에 구속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보면 이 섬은 전체가 하나의 실버타운 같아 보였다. 실버타운 중에서도 가장 톱클래스. 요양원보다는 파라다이스에 더 가까워 보이는.



다시 헬싱키로 돌아가는 비행을 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 모였을 때,

나는 내가 이곳에서 느낀 생각들을 동료들과 공유했다. 그리고 해변가 카페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이 1.9유로로 아주 저렴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러자 한 동료가,

- 내가 어젯밤 호텔 근처 바에서 마신 맥주 한 잔은 얼마였는지 알아?

  1.5유로. (한화로 약 2천 원)


핀란드에서는 맥주 한 잔에 못해도 한국 돈으로 만원이 넘으니 아주 복에 겨운 가격이었다.


동료는 마치 내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듯 한 마디 더 했다.

- 네가 아침에 나갔기 때문에 건강에 치중하는 사람들만 본 것 같은데, 어젯밤에 바에서 본 노인들은 술을 입에 막 붓더라. 그러다가 병원에 실려가겠더라고.


좌우지간, 이곳은 실버들에게 파라다이스가 맞다.

건강하거나,

복에 겹거나,

아니면 둘 다 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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