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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Mar 08. 2022

헬싱키의 토요일 밤엔

핀란드라고 하면 무조건 추운 줄로 아는데, 나라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헬싱키는 서울보다 덜 춥다. 손 끝과 발 끝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스러운 추위는 헬싱키에서는 경험하기 힘들다. 토요일인 어젯밤도 영하의 추위를 달리는 서울과 달리 이곳은 영상의 온도를 유지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긴 비행에서 돌아와 며칠 째 쉬고 있던 중 몸의 피로가 풀린 것 같아 창문을 활짝 열고 집 청소를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바로 YES라고 대답한 후, 청소를 대충 접어두고 부랴부랴 샤워를 했다.


승무원인 내게 비승무원 친구는 좀 더 특별하다.

첫 번 째  이유는, 내가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치 안락한 집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서다. 승무원 친구는 다른 나라에 비행가 있거나, 집에 있다고 해도 시차 적응을 하느라 '쉬는 중' 상태인 경우가 많아 만나기가 힘들다.

두 번째 이유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승무원 친구들과는 일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물론 공감대는 더 많지만 휴식의 느낌이 덜 든다.


헬싱키 시내에 사는 나는 약속 장소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래 걸려야 15분, 친구는 한 시간 반이 걸리는 헬싱키 옆 도시 에스포오(Espoo), 그것도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은 숲에 산다.

(아, 갑자기 친구에게 미안해진다. 다음번엔 친구네 동네에서 만나자고 해야지).


헬싱키 시내, 차는 안되고 트램과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거리.


푹해진 날씨에 오랜만에 얇은 울코트를 입고 나온 나와 달리 두꺼운 패딩을 입고 나타난 친구. 그도 그럴 것이 눈이 제법 녹은 헬싱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발자국조차 나지 않은 눈이 켜켜이 쌓여있다. 게다가 친구가 사는 곳은 집이 띄엄띄엄 있는 숲 속. 단독주택이라 제설작업도 직접 해야 한다. 최소한 집 문 앞을 가로막는 눈을 치워 왔다 갔다 할 길을 터놔야 하고, 지붕이 가라앉지 않도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눈을 쓸어내려야 한다. 그렇게 치우고 쓸어내린 눈은 빙산처럼 군데군데 쌓여 봄이와도 한겨울의 분위기를 떨쳐 낼 수가 없다.


반면에 아파트에 사는 나는 눈이 오면 바로 그날, 늦으면 다음날 아파트 관리 업체에서 지붕부터, 공용 마당, 집 바로 앞 도로까지 제설작업을 싹 해 놓는다. 그 비용은 매달 꼬박꼬박 내는 수 백 유로(수십만 원)의 아파트 관리비에서 빠져나간다. (관리비는 공용 마당에 여름에는 예쁜 화분, 겨울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설치비용에 쓰이기도 한다. 주민들이 원든, 원지 않든.)

아무튼 바로 옆 도시에 사는데도 우리가 겨울을 나는 온도차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헬싱키에 살아도 실내 주차장이 없으면 삽질은 필수.


헬싱키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기차역 주변은 주말 저녁이 평일 저녁보다 오히려 한산하다. 주말이 되면 상점들이 더 일찍 문을 닫고, 버스나 지하철의 빈도수도 줄어든다. 중심이라고 해봤자 타도시에는 없는 백화점이 하나 있고, 영화관과 레스토랑 그리고 바들의 갯 수가 좀 더 많은 정도. 굳이 시내에 사람들이 나올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들리는 말로는,  주변지역에는 없는 클럽이 있어 타지역의 현지인들은 토요일 헬싱키 시내에서 놀다가 호텔을 잡아 하룻밤 자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백화점이 있고, 주요 상점들이 즐비한 중심거리에 코로나 때문에 폐점한 공간들이 여럿 눈에 띄어 도시의 생기마저 앗아갔다. 밖에만 나와도 흥이 돋아야 하는, 명색이 토요일 저녁인데 헬싱키 거리를 걷는 것 만으로는 기분을 내기가 참 힘들다.


커피를 마시는 평소와 달리 이 날은 바(Bar)에 가기로 했다. 나야 비행을 다녀온 후 며칠 전부터 쭉 쉬고 있었지만, 회사원인 친구에겐 황금 같은 주말.

그런데 들어가는 바마다 테이블이 만석이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도시가 휑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다 바에 모여있을 줄은. 그렇게 몇 번 퇴짜를 맞고 간신히 자리가 있는 바를 하나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들도 모두 차고 밖에는 줄을 섰다. 맛집도 아니고, 술 종류도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바 앞에서 줄을 서야 한다니.


바텐더의 말로는, 백신 패스 검사와 영업시간 제한 등이 바로 며칠 전에 전면 해제되면서 손님이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오랜만의 외출이니 평소 즐겨가던 바를 작정하고 찾아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 바에서 파는 술과 그 가격은 비슷비슷해도 바마다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고급져 보이는 2층의 바에는 나름 점잖지만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바로 그 밑에 바에는 들어가자마자 담배냄새가 나고 히피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맞은편의 아이리쉬바는 늘 그렇듯 흥 나는 파티 분위기, 그 옆으로는 라이브 음악이 시끄럽고 록스타처럼 검은 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가득, 우리가 간 곳은 가장 흔한 별 특징 없는 캐주얼한 바였다. 이 짧은 시간, 작은 범위 안에서도 튀지 않으려 하면서도 취향이 또렷한 핀란드인들의 성향이 엿보였다.


핀란드의 술 값은 남유럽의 술 값보다 거의 두 배는 더 비싸다. 세금이 많이 붙어서라는데, 그 가격이 핀란드인들에게는 익숙해서인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모습을 보며 핀란드 정부 예산이 주로 여기서 채워지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담배도 그렇다. 둘이 합쳐 한달 담배 값만 거의 백만원이라는 커플도 봤다). 파리에서 부담 없이 마시던 와인도 핀란드에서는 퀄리티는 떨어지면서 그 값이 만만치 않아 내가 바에 가는 횟수는 급격히 줄었다. 이 날은 친구와 오랜만에 스파클링 와인을 마셨다.



레스토랑을 겸하지 않는 바에서는 감자칩과 땅콩이 유일한 안주.


친구가 들려주는 핀란드 회사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 지옥이구나'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일반 회사원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핀란드의 회사원들은 모두 퇴근시간이 오후 네시). 나 같은 내향적인 인간에겐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보다 같은 동료, 그리고 같은 자리에 앉아 사람보다는 컴퓨터와 더 오래 마주 보는 사무직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도 일반 회사원일 때가 있었다. 지옥까진 아니었는데, 평생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죽을 맛인 내게 매일 아침에 일어나 정신 차리고 일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회사는 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지 않고, 저녁형 인간이 아닌 아침형 인간 중심으로만 돌아가는지가 늘 불만이었다. 아침비행과 오후 비행이 골고루 섞인 승무원일을 다시 하게 된 데에는 이 이유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파리에서 한 회사와 최종 계약을 코 앞에 두고 오후에 출근해도 되는지 물었다가 일이 꼬인 적도 있었다.)


밤 열시도 안되었는데, 친구의 막차시간이 다가왔다. 버스는 한 시간 전에 끊겼고 막기차를 타야 한다. 뭔 놈의 토요일 밤이 이모양인지. 친구는 서둘러 숲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문자를 주고받고 났는데도 일찍 헤어진 아쉬움이 남는다. 

토요일 밤이라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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