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자세하게 말하면,
내 남사친'들'은 게이다.
내 주위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을 정도로 나는 인싸도 아니며 친구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게이 친구(혹은 동료)는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꼭 있어왔다.
내가 처음 '게이'를 본 건 멕시코에서였다.
더운 날씨와 풍요로운 채광 때문에 낮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영업을 하는 상점이 많았는데, 자주 눈에 띄는 곳 중 하나가 미용실이었다. 그 안에는 살 집이 많은 여자 손님과 그 손님의 머리를 고데기로 열심히 피고 있는 미용사가 주된 풍경이었다.
미용사는 어딘지 모르게 여성의 분위기가 흐르는 남성인 경우가 많았다. 여장을 한 것도, 지금의 한국 남자 아이돌처럼 눈썹이나 아이라이너 같은 화장을 한 것도 아닌데, 보통 남성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내가 밖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챈 미용사는,
'올라, 께딸?'
(Hola, Qué tal? ;안녕하세요)
하며, 보통 여자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그렇게 그들과는 너무 부드러워 살짝 닭살이 돋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때부터 '남자 미용사'라고 하면 그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멕시코 대학에서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도 비슷한 애가 한 명 있었다.
비쩍 마른 그 애는 앙상한 다리가 돋보이는 통이 좁은 진에 일명 '쫄티'를 자주 입고 다녔다. 마치 가짜처럼 입술은 두꺼웠고 눈매가 너무 또렷해서 아이라이너를 한 건가 의심도 들었다. 그 아이 역시 말투가 부드러워서 그 애가 하는 스페인어는 프랑스어만큼 아름답게 들렸다. 특히 말할 때마다 기다란 손가락을 우아한 새처럼 움직였는데, 그게 이따금씩 생각이 나서 따라 해 본 적도 있었다.
나와 어울리던 멕시코 친구들은 그가 없을 때 게이를 뜻하는 안 좋은 단어로 그 애를 칭하곤 했다.
당시 나는 '게이'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기에, 그 단어를 들어도 '동성애', '성 정체성' 등과 같은 연관어들이 머릿속에 가지를 치며 떠오르지 않았다.
비슷한 방식으로, 간혹 우리는 짓궂은 단어를 골라 서로의 애칭으로 부르곤 했다. 나를 치니따 (Chinita; 중국 여자 애)로, 정말 뚱뚱한 애는 고르도(Gordo : 뚱뚱한 사람), 피부가 하얀 캐나다 퀘벡 출신의 애는 그링고(Gringo; 미국인을 부르는 속어), 피부색이 어두운 애를 인디오 (Indio ; 고대 인디언)로.
모르는 사람이 불렀다면 바로 멱살 잡았을 원색적인 단어들로 말이다.
이렇게 서로를 놀리듯 부를 때, 아시안 혐오, 민족주의, 인종차별과 같은 심오한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남들이 그를 뭐라고 부르든, 어느 누구도 그를 배제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토론도 함께 했고, 조별 과제도 함께했다.
그리고 내게 그 애는 늘 아름다운 말투와 우아한 손짓을 하는 애였다.
내 주변에 '동성애자'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 '승무원'일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남자 미용사'하면 떠올랐던 이미지들은 승무원들 중에도 꽤 많았다.
국적과 인종도 다양했고, 말투가 부드러운 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깐깐한 애, 새침한 애, 낯 가리는 애, 똑똑한 애...
게이가 아니어도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일했던 글로벌한 회사였다. 그리고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직원들이 많다 보니 일하다가 기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잦았는데, 나랑 머리 끄덩이 잡고 싸우기 직전까지 간 게이 동료도 있었다. 그러고는 나중에 다시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호 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여자들과만 하는 화장품 이야기서부터, 요리, 다이어트, 패션, 운동, 식단, 잘 꺼내 놓지 않는 속마음까지.
대홧거리가 넘지 못할 선이란 게 없으니 쿵짝이 잘 맞을 수밖에.
그들 또한 어찌 보면 제각각이지만 전반적으로 보통 남자들보다 섬세하고, 보통 여자들보다 털털하다는게 내 소견이다.
대부분은 자기 관리에도 철저하고 감각도 좋다.
나는 그들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에 한 번 더 킁킁거리고, 그들이 내가 입은 옷을 칭찬해 줄 때면 기분이 두 배로 좋다.
파키스탄 출신의 한 게이 동료는 '동성애'가 파키스탄 사회에서는 금기시되기 때문에 그곳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다고 했다. 에미레이트 출신의 한 동료는 며칠 전 엄마와 이탈리아로 휴가를 갔다가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는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 눈시울도 젖어왔다.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커밍아웃을 했다가 가족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아 바로 옆 나라 터키로 도피하는 이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도 있다.
이런 것들은 이슬람 사회의 사정인 줄 만 알았다.
이상하게도 내 주위에 '게이 남사친'이 없었던 적은 유일하게 한국에 살 때였다. 내 친구의 친구가, 지인의 지인이 '동성애자'라는 소리 또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정우성이나 공유 같은 완벽한 스타일의 사람은 TV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 게이의 존재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요즘 들어 내 눈에는 게이보다 더 게이 같은, 하얗게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두덩엔 아이섀도를, 입술에 핑크빛 립글로스를 바른 남자 연예인들이 수두룩한데 그들은 게이가 아니라 하니 그 또한 비현실적이다.
그런 와중에 평소 호감 있게 봐오던 홍석천 같은 연예인이, 잘 지내왔던 친구이자 동료인 (고인이 된) 변희수 하사 같은 사람이 커밍아웃을 하면 정치적, 종교적, 의학적, 온갖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과는 개인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와 회초리질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놈의 에이즈, 개인적 친분도 없는 동성애자로부터 에이즈에 옮는 것을 걱정하느니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감기에 옮는 것을 걱정하는 편이 본인 건강에 더 좋을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이라면, 지구 온난화나 미래 식량 위기 또한 그렇게 열정적으로 염려해 줬으면 좋겠다.
프랑스 지인의 지인인 게이 부부가 아이를 입양했다는 소식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엄마만 둘, 혹은 아빠만 둘이 있는 가정은 나 또한 상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관해 가장 진보적인 나라로 여겨지는 프랑스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된 것은 2013년, 전 세계에서 세 번째가 아닌 열세 번째 나라라는 사실 역시 놀랍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핀란드는 2017년에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시기로 따지면 북유럽 국가 중에서는 가장 꼴찌다.
현재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도 동성과 결혼을 해서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중 한 명이 입양을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파트너와 20년이 넘는 끈끈한 사랑을 이어왔지만, 남자 둘이서 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같은 레즈비언 커플과 함께 공동 육아를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는데, 여러 개인의 인생이 달린 문제이다 보니 제 삼자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스스로 결정을 하기도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리고 앞으로도 깊게 생각해 볼 일이 없는, 그러나 상당한 무게가 느껴지는 고민이었다.
지난 2월 핀란드 의회에서는 만 18세 이상의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자기 선언'만 하면 법적으로 성별을 변경해 주는 새로운 법안이 찬성 113표, 반대 69표로 가결되었다. 과거에는 의사의 소견서가 필요했던 절차마저 없애버려 말 그대로 성전환자 개인의 권리가 확대된 것이다.
이번해에도 핀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되면서 6년째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나는 신선한 연어 요리를 즐기지도, 겨울 스포츠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핀란드인들이 감사하게 여기는 자연 친화적인 삶에서 큰 힐링을 느끼지도 않아 매일의 생활에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사소한 행동 하나를 하려고 해도 사회적 통념이라는 것과 남의 이목이 끊임없이 신경 쓰여 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의외로 쉽지가 않다. 내 이웃일지도, 직장 동료일지도 모르는 불특정의 다수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내 인생 통째를 두고 말도 안 되는 찬성과 반대론을 펼치고 있다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핀란드는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비난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
혹시라도 내 삶을 이끌어가기 힘든 순간이 올 때, 국가가 그 삶을 지켜줄 것이며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받쳐줄 것이라고 신뢰해도 괜찮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