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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Dec 15. 2022

헬싱키의 평범하지 않은 출근길

나는 평범하지 않은 핀란드의 직장인.


남들이 쉬는 주말에 일을 하기도 하고,

여름휴가, 스키 휴가를 떠나는 기간에는 더 빡쎄게 일을 한다.

대신,

남들이 일하는 평일에는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집에서 유튜브 짤을 보며 혼자 낄낄대고,

쇼핑몰과 헬스장의 한적한 시간대를 즐기는 것을 이 직업의 낙으로 삼는다.


(다른 승무원들도 이런 걸 낙이라고 생각할까.)


출근하는 날 만큼이나 출근하는 시간도 평범하지 않다.

(러시아워의 지옥철을 피할 수 있어서 낙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헬싱키에서 지옥철은 본 적이 없다. 버스도, 트램도 지옥스럽지 않다.)


시간대 별로 독특한 출근길 풍경을 정리해 보았다.


- 새벽 다섯 시.

가장 고요해야 할 시간, 현실은 정 반대다.

말끔하게 유니폼을 차려 입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일명 '술꾼'들마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마주하기 전 괴성부터 들릴 때 도 있다.

평소 어색해서 인사도 간신히 하는 이웃 청년과 그의 친구들이 아파트 앞마당에 누워 개 꼬장 부리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그 와중에 나를 알아봐서 평소보다 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기억도 있다.


특히, 핀란드 여름의 새벽 다섯 시는 대낮처럼 밝아서, 이미 술에서 깨서 좀비처럼 왔다 갔다 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보고 정말 대낮인 줄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던 적도 있다.


이 시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버스 안에서 펼쳐진다.

새벽을 달리는 직업을 가진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 타 있을 것 같지만, 이 역시나 정 반대.

밤새도록 코가 비뚤어지도록 달린 술꾼들이 가득 타 있다.

술 냄새, 담배 냄새, 그리고 지독한 핫도그 냄새.


오전 일곱 시 대에 출발하여 유럽의 각 도시로 향하는 첫 비행기를 타게 될 나의 출근길은 이 모양이다.

유니폼에 구역질 나는 냄새가 배었을까 봐 공항에 도착해서 향수를 한 번 더 뿌린다. 아니 여러 번.


과연 이 날 내게선 어떤 향이 날까.



- 오전 일곱 시.

버스정류장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반듯하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며,

나도 평범한 직장인이 된 것 같은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람들의 옷차림새와 버스에서 내리는 곳을 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혼자 상상하기도 한다.


핀란드에서는 정장을 입은 남성,  단정한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는 여성을 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런 옷차림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과하다'라는 느낌이 있어 일반적이지 않다. 만약에 이런 옷차림의 사람을 본다면 회사의 CEO나 적어도 원급, 아니면 정치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버스 안에서 가장 과하게 차려입은 사람은 나다.

검은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정장과 흡사한 유니폼.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오성과 한음의 댕기머리나 겨울왕국의 엘사 머리를 하고 있다. 쪽머리는 과함의 극치라 피하는 편, 덜 과해 보이려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문질러 잔머리들을 좀 빼내는 것이 포인트.

최근에 하이힐 대신 캐주얼 신발이 허용되어 나는 요즘 유니폼으로 검정 스니커를 신는다.


이 과함이 싫고, 과함이 불러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 사복을 입고 출근한 후 회사 라커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동료들도 있다.

핀란드는 나 말고도 투명인간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 오후 열 두시.

가장 한적한 시간.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이 버스에 많이 탄다. 가장 많을 때에는  대 까지 탄 걸 본 적이 있다.

핀란드의 버스는 출입문이 세 개인데, 그중 가운데 문이 있는 부분은 좌석이 없는 빈 공간. 이곳에 유모차나 휠체어, 자전거가 탈 수 있다.

버스 출입구에는 계단이 없고, 정류장에 정차를 하면 버스 높이를 승강장에 맞게 조절할 수 있어 몸이 불편한 승객뿐 아니라 바퀴가 달린 것들이 용이하게 타고 내릴 수 있다.



- 오후 네시.

저녁형 인간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출근 시간대.

이 시간은 보통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기도 하다. 모두가 파김치, 젖은 양말이 되어 축축 늘어져 있는데, 나는 정오까지 꿀잠을 자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샴푸 냄새를 풍기며 빛을 발하는 간.


보통은 헬싱키 밖에 살며 헬싱키로 출근을 하지만, 나는 반대로 헬싱키 시내에 살며 헬싱키 밖에 있는 공항으로 출근을 한다. 

(매달 비싼 월세를 낼 때, 그리고 이 시간에 출근할 때 '나는 왜 헬싱키에 사는가' 하는 셀프 질문을 하게 된다.)


버스뿐 아니라 자가용으로 퇴근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헬싱키 밖으로 향하니 가장 길이 막히는 시간대. 아니, 핀란드에서 길이 막힌다는 표현은 좀 오버다. 차 구경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시간 대. 앞, 뒤, 옆으로 계속해서 차가 한 대 이상씩은 있다.


차가 많이 막힐 때에는, 출근길이 평소보다 최대 5분 정도 더 길어진다.

핀란드인들은 이를 두고, '교통 체증(Traffic jam)'이라는 표현을 쓴다.


나중에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핀란드 친구들 편을 한 번 더 촬영한다면, 그땐 '서울 지옥철 체험', '명절 귀향길 체험'을 하면 재미있겠다고 상상하며,

혼자 ㅋㅋㅋ 웃는다.


12월 새벽 다섯시, 밤 새 내린 눈을 지그시 밟으며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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