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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바람 Sep 21. 2024

서울대 스티커와 명품 유모차

그날은 평온한 날이었다. 저녁에 뭘 먹을지를 고민하거나 요즘 핫한 게임이 무엇인지를 묻는 목가적인 날이었다. 차곡차곡 쌓이던 카톡 방에 문제의 링크가 나온 건 오후 4시였다. 평소 진보적인 주제를 좋아하던 친구가 던진 ‘서울대 학생 가족 스티커’ 문제가 화근이었다. 천박하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 친구는 장황하게 학벌 지상주의의 낯 뜨거운 현실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학벌. 대한민국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주제였기에 친구는 더 열을 냈다. 


언론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했다. 살짝만 검색해 봐도 이 주제에 대해 열을 토하는 이들의 글을 볼 수 있다. 노골적으로 서울대 학생 부모라는 것에서 위안을 느끼는 게 역겹다는 반응도 볼 수 있었다. 본인이 서울대 학생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꼴사나운데 부모까지도 자식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잘난 척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강남 OO팰리스 가족’이라는 스티커도 괜찮냐는 지적도 등장할 정도였다. 


‘학벌’이라는 단어가 주는 파급력. 그리고 서울대가 스티커 제작에 동참했다는 것에서 오는 영향은 상당했다. 그러나 단순히 이 문제를 ‘천박한 학벌주의’라 매도하는 것은 사태를 너무 간단하게 요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애초에 이 스티커를 기획했던 서울대학교 발전재단은 과시의 목적으로 스티커를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대 학생 학부모 맞춤으로 관심과 소속감을 제고할 목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실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중에 신청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서울대 학생 부모 스티커를 배부한 것이다. 최근 대학생 학부모들 가운데 학교 운영과 커리큘럼에도 개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펼치는 이들도 있기에 재단에서 이를 준비했다고 그들은 설명했다. 해명을 잘 살펴보면 학생만 서울대학교의 일원이 아니라 학부모도 서울대학교의 일원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학부모도 서울대의 일원이라는 발언. 그런데 학생만이 아니라 학부모도 이런 후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서울대’라는 특수성과 한국에서 가지는 위치를 고민해봐야 한다. 학벌이 공고화된 대한민국에서 서울대라는 세 글자는 함부로 쟁취할 수 없는 타이틀이다. 한 번 들으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타이틀.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만 누구나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서울대로 향하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이 타이틀을 얻으려면 피를 흘려야만 갈 수 있다.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긴 과정은 말하면 입이 아플 뿐이다. 


수능 성적 하나만 뛰어나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에 복잡한 ‘교육 공학적인’ 지식이 요구된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지만 학생 혼자서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더는 아니다. 어떤 과목을 준비해야 하고 ‘학종’에서 어떤 부분을 더 신경 써야 하는지 충분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최고 학벌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의대’는 아예 다른 영역이다. 평균 이상의 돈과 시간은 물론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렇기에 서울대는 학생-학부모가 같이 뛰는 경기다. 학생이 공부를 하면 학부모가 전략을 제공하고 거기에 맞춰 긴 마라톤을 같이 뛰는 것이 요구되고, 학부모는 제삼자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학종 시대의 이 코스는 복잡하고 길다. 학부모도 어떤 의미에서는 말 그대로 ‘수험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특출 난 성적을 거두면 서울대를 뚫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케이스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학부모 입장에서 그렇게 고생을 해서 들어간 서울대의 후광을 본인들이 누리지 못할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 ‘스티커’는 그동안의 보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재단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부모에게도 ‘보상’을 준 것이다. 학벌의 낯뜨거움으로 해석하기보다 노력에 대한 값진 ‘성과’라 보는 게 더 맞는 해석일 것이다. 이 스티커는 학부모에게 대단하지는 않아도 그나마 오랜 마라톤에서의 기념품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울대 말고도, 예일이나 하버드 같은 해외 명문대도 비슷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학벌에 집착하지 않는 해외에서도 이런 물건은 오히려 더 일반적으로 판매된다. 하버드는 하버드생 학부모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자동차 플레이트를 판매할 정도로 세분화되어서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것도 판매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이다. ‘학벌’이 주는 영향력이 한국과 외국이 다를지라도, 자기가 나온 명문 학교를 자랑하는 건 세계 공통이다. 


일각에서는 위화감 조성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왜 자랑을 하면 안 되는가? 이미 과잠이나 스패너, 소위 말하는 ‘명문대 굿즈’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학생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이것과 학부모 스티커를 다르게 매길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서열화를 공고하게 만드는 물건들은 이미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노골적이냐 노골적이 아니냐는 사실 무의미할 정도로 공공연하게 거래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 스티커를 걸고 문제를 삼는 것은 형평성에 있어 맞지 않는 문제 제기일 것이다.


이야기의 틀을 ‘학벌’이 아니라 ‘명품’으로 살짝 바꿔보자. 오픈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명품 구매에 있어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한다. ‘에루샤’로 대표되는 명품은 천정부지 비싼 가격에 판매되어도 ‘원래 명품은 비싼 것’이라는 이름으로 비싸게 판매되는 것이 용인된다. 오히려 이 물건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과시할지 고민하는 게 일반적일 정도다. 명품을 입고 당당하게 압구정 로데오를 걷거나, 혹은 청담을 가로지르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멸시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낸다. 명품 하나 정도는 가지는 것이 좋지, 이런 얘기를 공공연하게 할 정도로 명품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 때 사치스러운 명품을 걸치는 것을 경멸하는 시선도 있었고 이를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이제 과거의 관점이 되었다. 오히려 명품을 걸친 사람들을 선망하며 이를 질투한다. 누군가와 다르다는 것, 다른 누구보다 우월한 것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학벌만 다른 취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강남 OO팰리스 가족’ 스티커 문제를 제기한 사설을 기억하는가? 나는 스티커를 붙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팰리스 가족이라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충분히 붙이고 다닐 수 있다고 본다. 명품도 마찬가지고 학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자부심을 드러내는 지위재를 적극적으로 PR 하는 현 사회에서 학벌이라고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톡 방에서 이 주제를 꺼낸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말하기 싫다는 의사였다. 나는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하진 않았다. 이야기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늘 그렇듯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하는 이 방에서는 뜨겁게 이야기한 주제도 쉬이 식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친구는 올해 유행하는 고급 유모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자라고 있으니 좋은 걸 써야 한다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나은 유모차를 사용해야 하는데 걱정된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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