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 전, 과외로 돈을 벌던 시절이 있었다. 주로 맡았던 과목은 영어와 수학이었다. 다만 수학은 한계가 있어서 중학생들만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과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학생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인 학습자의 요청이 빈번했다. 학부모님의 전화인 줄 알고 받았던 전화였는데 알고 보니까 본인이 수학을 배우길 원해서 전화한 케이스도 여럿 있었다.
수학을 배우길 원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너무나 부족한 수학 실력 때문에 무시 당할까봐 두렵다는 분들. 수학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칠 실력이 되지 않아 급하게 실력을 끌어올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분.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케이스는 의외로 자기 만족이었다. 수학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행복하다는 답. 어렸을 때 수학을 좋아했는지 물어보면 다들 수학을 싫어했다고 답하는 그들은 성인이 되어 배우는 수학을 좋아했다.
누가 때려도 절대 수학을 공부하지 않던 이들이 성인이 되고서 자발적으로 수학을 배우는 모습.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의무적으로 공부를 해야 할 때는 절대 안 하던 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돈을 써가면서 수학을 공부하겠다는 사고가 어린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어 수학을 더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원래 관심이 없던 이들이 왜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수학의 매력에 빠진 것일까?
의외로 답은 가까이 있었다. 수학은 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답? 성인 수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답을 내는 수학에 매력을 느낀 것이었다. 인생을 어느 정도 거친 이들은 인생에 정확한 정답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다. 답이 없는 미로에서 그들은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답이 맞는 지, 아닌 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그 답이 맞을 거라고 믿고 계속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수학은 다르다. 문제가 있고 그 문제에는 정확하게 해당하는 하나의 답이 있다. 논리로 구축한 답은 명쾌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름답다고 해도 될 정도로 깔끔한 정답이 존재하는 T의 세계다. 어렸을 적 이러한 독단의 세계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서는 이 세계에 돌아오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답만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수의 답에 질려버린 성인들은 정답이 존재하는 수학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수적인 혜택도 성인 수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었다. 수학은 기도와 비슷하다. 반복되는 행동, 그리고 거기서 오는 정신적 고양감. 반복되는 훈련과 그로 인한 정신적 쾌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자신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하나 어려운 문제를 돌파하며 더 나은 자신을 매번 확인할 수 있기에 수학은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학문이다.
성인이 된 우리들은 답이 없는 문제에 매달리게 된다. 좋든 싫든 그 문제를 마주하며 삶을 영위한다. 그렇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문제에 정신력을 소모하며 살 수밖에 없다. 자기효능감은 더욱 확인하기 어렵다. SNS로 인해 촉발된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끝도 없이 존재한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다른 사람의 SNS 페이지를 보면서 나 자신은 초라해진다. 효능감이 실종된 사회에서 수학만큼 확실하게 나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는 곳은 없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학 책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2020년 교보문고 과학분야에서 '이상한 수학책'과 '이해하는 미적분 수업'이 상위 10위 권 안에 든 것은 이를 보여준다. 여러 출판사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잇따라 출시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플 것 같은 '이해하는 미적분 수업'은 2020년 상반기 1만 권 이상 판매되었다.
혹자는 이러한 성인 수학 학습자가 느는 요인으로 의대 열풍을 지적한다. 물론 그런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의사들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고 앞으로도 엄청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린 아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의대 진학 열풍은 과거 공무원 열풍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한 느낌을 줄 정도로 광풍이다. 얼마 안 남은 신분 상승의 기회에서 수학을 잘하면 의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 의미에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인 수학 학습자의 상당수는 초등수학-중등수학의 기본 개념을 공부하고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의대를 진학하고자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다른 궤적을 보이는 것이 현재 수학 공부를 하는 성인들의 상황이다. 프로그래머들이 각광을 받기 때문에 이를 위해 수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는 지적도 있다. 물론 틀리지는 않다. 고급 인재가 되기 위해선 프로그래머들은 수학을 잘해야 한다. 고도의 알고리즘을 구현하기 위해 수학적 지식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서 구몬 학습자의 니즈를 설명한 것처럼, 이러한 고등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자기효능감을 끌어올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습이 현재 성인 수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잔혹한 현실이지만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해 ‘수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열심히 하는 것은 ‘문제풀이’에 가깝다. 간단한 연산과 빠른 계산을 통해 답을 찾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이들이 하는 수학 공부의 실체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과 가장 비슷한 프로그램은 바로 치매 예방 프로그램이다.
스펠링을 쓰고 연상되는 단어를 빠르게 적는, 그런 치매 예방 프로그램과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수학은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찾는 학문이다. 깊은 의미에서 수학은 우주의 비밀을 밝히고 아직까지 암흑 영역에 있는 답을 헤매는 도구에 가깝다. 필즈 상을 탄 허준이 교수는 자신의 작업의 고독함을 토로하며 답이 없는 수학 문제를 보면서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사실 답이 없는 문제에 즐거움을 느끼며 나름의 해답을 찾는 게 수학자 작업의 본질일 것이다.
수학 공부를 통해 위안을 찾는 성인들을 그렇다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은 필요하다. 답이 없는 항해에 결국에는 다시 나가야 한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면 다시 답이 없는 세계에 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인생은 고통이다. 삶 속에서 우리는 자신만이 찾을 수 있는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