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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바람 Oct 25. 2024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리뷰

## <대도시의 사랑법>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못 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믿는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을 뿐, 영원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새벽녘 밝아오는 빛에 사라지는 어둠처럼 얄팍하고도 허망한 단어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랑을 믿고 하루를 영원처럼, 뜨겁고 찬란하게 사랑을 한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는 이상한 인물이지만 그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는 인물. 고영은 사랑을 찾고 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는 사랑을 찾는 인물이다. 


고영과 달리 영원한 사랑을 믿는 인물이 있다. 고영만 바라보고 그의 ‘카일리’도 기꺼이 받아줄 수 있는 인물. 규호는 고영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클럽 바닥에서 얼떨결에 이뤄진 첫 키스, 그리고 강렬한 피 맛. 그들의 사랑은 화려한 조명과 피로 시작되었다. 규호의 순수함에 고영은 그를 거부하지 못한다. HIV 보균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규호의 사랑을 의심한다. 나의 카일리, HIV를 규호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나 규호는 고영의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그를 온전히 바라본다. 동이 터오는 밝은 햇살이 그들을 비춘다.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으로, 온전한 사랑으로 규호는 고영을 품에 안는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을 원안으로 삼아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영화와 드라마가 개봉한 탓에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드라마를 본 나로서는, 드라마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슬픔과 재치가 공존한 박상영의 글쓰기를 고대로 화면에 옮긴 드라마는 소설에서 표현하지 못한 애잔한 슬픔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고영’은 게이다. 화려한 연애 편력을 자랑하면서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으며 방탕한 삶을 산다. 젊음을 한껏 낭비하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랑을 갈구한다. 드라마 1화부터 고영은 하룻밤 보낸 남자와 뜨거운 사랑을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남자의 양다리가 들통나면서 고영은 남자를 시원하게 찬다. 안타깝게도 고영의 애정행각은 8화 내내 이어진다. 온갖 남자와 잠을 자며 사랑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사랑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포토그래퍼인 김남규, 연상의 운동권 남자이자 ‘미제’를 혐오하는 마성의 남자 노영수, 방콕에서 만난 신비로운 남자 하비비 등 그의 주변에는 매력적인 남자가 끊이질 않는다.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는 그가 가장 애정을 쏟았고 잊지 못하는 존재는 바로 규호일 것이다. 이태원 클럽 바텐더로 일하던 규호와 마주한 날, 고영은 추한 모습을 보이며 클럽을 벗어난다. 하지만 규호는 그런 그를 잊지 못한다. 대담하게도 고영이 일하는 장소까지 찾아가 연하의 과감함을 선보이면서 그를 꼬시려고 한다. 이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선까지 이어진 그들의 플러팅은 결국 성공에 이르고 동거하기에 이른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된다. 사귀는 남자가 몇 주 만에 바뀌던 고영이 안정된 연애를 한 것은 규호가 처음이었다. 규호도 고영과 사랑을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바텐더와 간호사라는 이중 직업을 유지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가 고영을 만나고 바텐더 일을 그만둔 것은, 그와 좀 더 발전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다. 자격증을 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간호사 일에 전념하는 것은 물론, 작가인 고영을 물심양면 뒷바라지한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고영도 불안정한 작가라는 직업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판단해 무역회사 직장인으로 취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클럽을 오가며 방탕하게 살던 고영이 안정된 직장을 구해 글을 쓴 것은 규호와 만났을 시기였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 속에서 안정을,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발견하고자 스스로를 바꾸었다. 그들이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안정된 삶과 고정된 일자리를 그들은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의 변화는 급진적이었다. 사소한 일로 시작된 그들의 균열은 점점 벌어졌다. 직장인이 된 규영은 점점 지쳐갔고, 간호사가 된 규호는 불규칙한 업무 일정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사랑은 식었다. 더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고영은 규호와 방콕 여행을 제안한다. 제주 소년이었던 그는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었다. 신나서 떠드는 규호를 고영은 차분하게 바라본다. 


방콕이라는 공간에서 그들은 자유로운 젊음을 찬란하게 발산했다. 거리낌 없이 사랑을 드러낸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다리에 누워 무지개를 바라본다. 규호와의 사랑을 의심한 고영은 카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한 이유를 규호에게 묻는다. 규호는 그런 고영의 말에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오직 너였기에, 찬란한 사랑이자 영원한 동반자의 말에 규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영과 함께하는 사랑은 규호에게 완벽한 사랑이었다. 


5화부터 시작된 고영과 규호의 사랑은 8화까지 이어진다. 방콕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대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드라마의 탁월한 부분은 사랑과 슬픔의 배합이 5대 5라는 점이다. 방콕 여행 속에서 그들은 실컷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못 가 사라질 것을 예고한다. 기쁨 속에서 슬픔이, 행복 속에서 고통을 읽어낼 수 있다. 각본의 힘이기도 하지만 이를 고스란히 연기해낸 배우들의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찬란하면서 씁쓸한 양가적 감정이 여행 내내 드러난다. 


방콕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일상의 짜증으로 돌아온다. 규호는 중국의 큰 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잡게 되고 고영에게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한다. 무역회사에 일하던 고영은 상해지사 직을 지원하려 한다. 그러나 그를 붙잡는 것은 카일리, HIV 보균자라는 자신의 처지였다. 고영은 결국 규호의 손을 거절한다. 중국으로 향하는 규호는 끝까지 고영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것을 마지막이라 생각한 고영은 결국 쓸쓸하게 규호를 바래다주고 슬픈 눈으로 한강을 본다. 


현실적인 헤어짐을 담담하게 그려낸 대도시의 사랑은 게이의 사랑 역시 일반적인 사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려낸다. <대도시의 사랑>이라는 말처럼 규호와 고영의 사랑은 자그마한 균열로 끝난다. 극 중에서 규호가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지만 아마 고영은 규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규호를 그리워해 그를 대체할 하비비라는 인물을 만나지만 결국 규호와의 사랑이 끝난 것을 체감한 고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마음을 정리한다. 


담담한 표현과 절제된 감정으로 슬픔을 극대화한 이 드라마는 일상적인 헤어짐과 찬란한 사랑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남윤수 배우는 각기 다른 연출자의 손에서 펼쳐지는 극을 하나로 연결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면 쓰레기라고 매도 당할 수 있는 그의 행동과 태도는 보는 사람 입장에서 짜증나는 캐릭터일 수 있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면 그의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들 밖에 없다. 그럼에도 고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윤수의 천진함과 웃음 덕분일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고영은 사랑스러운 캐릭터고 밉지 않은 캐릭터로 남을 수 있었다. 


보기 드문 균형 감각을 성취한 드라마다. 게이를 다룬 드라마이자 방탕하게 사는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려 들면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은 찬란한 사랑 속에 스며든 서늘한 이별의 감각. 누구에게나 찾아온 열병 같은 사랑과 지옥 같은 이별의 경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영 작가는 드라마에 대해 ‘고영’의 성장기라고 표현했다. 20대 초의 고영부터 30대에 이른 고영은 많은 남자를 만났고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규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결국 그와 헤어지면서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과연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는가? 머리로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질문을 다시 되새김질하는 이유는 영원한 사랑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IF를 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F를 생각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사랑이 있기를, 고영과 규호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그들의 찬란한 사랑이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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