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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지바람 Nov 08. 2024

아그리콜라와 자리 뺏기 게임

최근 카더가든이 주인인 유튜브 채널에서 기획한 보드게임 콘텐츠를 자주 본다. ‘찐’ 보드게임 덕후인 넉살과 그와 함께 오랜 기간 보드게임을 플레이한 목사님(넉살의 친구다) 그리고 주인장 카더가든과 그의 오랜 지인 오존이 고정 멤버로 게스트와 함께 보드게임을 플레이 한다. 반응이 좋아 어느새 5화까지 나왔다. 촬영이라는 틀이 있는 상황에서도 이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 생각이 난다. 새벽이 넘어가는 시간에도 보드게임을 붙잡고 플레이 했던 20대의 추억. 


본격적으로 보드게임 세계에 입문한 계기는 군대 시절이었다. 후임이 가지고 온 ‘아그리콜라’를 플레이해보고, 그 전략적 깊이와 다회차를 부르는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던 시절. 그 시기를 기점으로 넓은 보드게임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마침 주변 친구들도 보드게임에 환장했던 터라, 당시 유행하고 있는 보드게임이란 보드게임은 섭렵하는 것은 물론이고 구매까지 하는 열정을 보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그리고 지금까지도 곱씹는 보드게임은 아그리콜라다. 첫 보드게임 경험이 아그리콜라였기에 오랜 기간 플레이를 하기도 했고, 애정도 가장 깊다. 안타까운 것은 같이 보드게임을 했던 친구들은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아그리콜라를 싫어했다는 점이었다. 아그리콜라가 싫다고 부르짖는 친구들은 내가 아그리콜라를 꺼낼 때마다 신경질을 낼 정도로 기함을 질렀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억지로 아그리콜라를 권하기도 했지만 친구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내심 짐작할 수 있었다. 


아그리콜라는 농장 경영 게임이다. 지금은 그렇게 독특한 점은 아니나 당시 출시되었을 때만해도 아그리콜라의 독특한 점은 ‘일꾼 놓기’ 게임이라는 점이다. 행동 칸에 내가 플레이하는 말을 놓았을 경우, 다른 플레이어의 말을 놓을 수 없는 배타성. 순서가 굉장히 중요한 게임이었고 내가 어떤 순서에 있는 지에 따라 최적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손에 쥔 카드를 놓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순서가 꼬이면 행동이 의미가 없어지는 게임이다. 


그리고 밥 먹이기 행동이 아그리콜라 시스템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흑사병이 창궐하고 하루하루 먹기 힘든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기에, 게임의 경영자이자 플레이어는 일을 끝마친 후 돌아온 가족들에게 밥을 먹여야 했다. 물론 매 턴마다 밥을 먹이는 것은 아니고 특정 주기가 끝나는 시점마다 밥을 먹어야 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밥 하나, 성인들은 밥 둘. 식량을 얻는 과정을 굉장히 힘들게 디자인한 게임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구걸 카드를 받아야 했다. 구걸 카드는 최종 라운드에서 마이너스 3점으로 계산되기에 승리를 하기 위해선 최대한 구걸 카드를 받지 않아야 한다. 


친구들이 그렇게 아그리콜라를 싫어했던 이유는 아그리콜라의 배타성과 밥 먹이기 시스템 때문이었다. 내가 계획한 플레이를 상대방의 행동으로 하지 못해 억지로 다른 행동 칸에 말을 놓아야 하는 불쾌한 경험. 그리고 밥 먹일 타이밍을 생각하느라 해야 하는 행동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 이런 것들이 쌓이면서 친구들은 아그리콜라를 불쾌한 게임으로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모든 것을 계획대로 해야 하는 파워J형 인간인 친구는 보드게임 마니아지만 유독 아그리콜라를 싫어했다. 자신이 해야 하는 행동을 타인의 개입으로 인해 망치는 순간을 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던 그 친구는 그 답답함에 몸서리를 치곤 했다. 아그리콜라는 이런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시작 플레이어 되기’ 행동 칸을 만들어 두었다. 만약 순서가 밀린다고 느끼면 행동을 소모해서 시작 플레이어 되라고 말이다. 


문제는 그 행동 칸은 ‘시작 플레이어 되기’ 외에 다른 기능이 없다는 점이다. 오직 앞 순서를 잡기 위해 그 행동 칸을 사용하면, 다른 행동 칸의 효율에 비해 떨어진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카드를 놓을 수 있는 기능을 덧붙였지만, 사실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순서가 다른 행동들에 비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게임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 가장 혜택을 보는 사람은 시작 플레이어 다음 사람이다. 시작 플레이어는 행동 하나를 소모해서 ‘시작 플레이어 되기’를 선점해야만 하지만, 그 다음 사람은 그런 행동을 소모하지 않고도, 단지 그 사람 옆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다 유리한 순서로 행동을 플레이 할 수 있다. 2번째 순서이기에 최선을 선택할 수 없어도, 차선의 선택은 쉽게 고를 수 있기에, 최종 결과를 보면 2번째 순서에 많이 걸린 친구가 승리하는 경우가 잦다. 


이를 뒤집기 위해 보조 설비나 직업 카드 등, 다양한 변수를 도입했지만 이는 다른 플레이어에게도 공평하게 지급된 카드이기에 큰 변별력을 가지긴 어렵다. 재밌게도 아그리콜라는 순서라는 요소가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다회차 플레이어들 가운데 승리를 노리는 이들은 자주 선을 잡는 플레이어 옆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어찌 보면 친구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요소인 자리 운에 의해 게임이 좌지우지된다면 그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내가 플레이해야 할 베스트 칸이 친구의 행동에 의해 막힌다면, 그것 또한 불쾌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그리콜라가 주는 매력은 바로 그 운과 불합리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만약 모든 행동을 ‘효율’에 따라 베스트 플레이를 할 수 있게 설정해 놨다면, 이 게임은 이렇게까지 큰 인기를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아그리콜라를 하는 사람들마다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험은 바로 ‘아쉬움’이다. 조금 만 더 턴이 있었으면 집을 돌집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혹은 가족을 더 늘려서 점수를 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등등. 이들은 다시 한번 플레이를 하길 원한다. 다시 플레이를 하면 조금 더 완벽한 형태의 농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지만 같은 플레이를 하더라도 그 기대는 여전히 배반을 당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턴이 부족하게 설계되어 있는 게임이기에 어떤 행동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카드의 운이 잘 맞아 떨어져 모든 것들을 해볼 수도 있지만 그런 경험은 사실 많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와 자원을 잘 배분해 농장을 효율적으로 가꿔야만 이 게임에서 높은 점수를 거둘 수 있고, 또한 승리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다가 망하는 게임이 바로 아그리콜라다. 


앞서 말했던 상대방의 플레이와 순서에도 영향을 받기에 정말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플레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그렇기에 이 게임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완벽한 농장을 꿈꾸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매번 도래하기에, 사람들은 여러 번 농부의 삶을 반복하며 이상적인 농장을 향해 끊임없이 매진한다.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면서 느낀 것은 게임이 삶의 모습을 소름 돋을 정도로 많이 반영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순서에 따른 운을 게임의 영역에 끌고 온 것은 정말 탁견이라고 할 부분이다. 누군가가 운 좋게 차지한 자리에 들어가려면 그 사람이 빠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 이권을 누리는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옆자리에 있는 사람은 혜택을 보게 된다. 의식을 하든 의식을 하지 않든 그런 이점은 게임에 영향을 주고 조금씩 이득이 쌓이면서 게임은 전체적으로 크게 바뀐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운의 방향을 바꾼 자만이 게임을 흔들 수 있다. 치열한 자리 차지 경쟁은 필연적으로 밀려나는 자를 전제한다.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꼭대기를 차지해야 한다. 설사 그게 게임을 이기는 결론에 닿지 못하더라도, 최선의 한 수라고 생각하면 플레이어는 달려갈 수밖에 없다. 게임은 냉혹할 정도로 삶의 일면을 담아냈다. 게임의 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플레이어는 게임 속 현실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덧대어 볼 수밖에 없다. 


삶이라는 보드판에서 누군가의 옆자리에 위치해 이득을 거두는 것도 하나의 플레이 방식이다. 그걸 거부하고 내가 맨 앞자리를 차지해 이권을 쟁취하려는 것도 하나의 플레이 방식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이득을 챙기는 이들의 플레이도 존재한다. 각기 다른 사고와 패턴 속에서 승리의 방정식은 하나가 아니다. 때론 엉뚱한 활로를 개척해 우승을 거두는 이들도 있다. 카드를 사용해 역전하는 방식도 게임에서는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자리 뺏기 게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타인은 들어올 수 없다. 우선권을 가진 자가 많은 자원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다른 선택의 포기를 의미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삶은 실로 배타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야 말로 생존에 있어 유일한 해답일 것이다. 원리조차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게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고 이야기했다. 애들 장난과도 같은 보드 게임을 보면서 놀라운 삶의 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안타까운 것은 다시 이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들이 없다는 것. 다시 한번 아쉬움의 순간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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