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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홍진 Jul 31. 2019

모멸에서 긍지로, <그랜 토리노>

 명성 있는 감독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천재적이라 할 만한 재능들이 보인다. 사실 아무데나 대충 갖다 붙여도 그럴싸해 보이는 칭호라 분야를 불문하고 남발되는 감도 없지 않은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천재라는 칭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의 영화 앞에서 천재적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결례가 된다. 이스트우드의 좋은 영화들은 절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재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과, 그 시간들에 대한 축적된 반성이 겹겹이 응축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화 한편을 보고서 마치 한 자씩 눌러쓴 짤막한 편지를 읽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편지에는 야만의 시간과 반성의 시간, 모멸의 시간과 긍지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그랜 토리노’는 그 모든 시간들을 가장 간결한 영상언어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러한 간결함 이야말로 삶을 진정으로 농밀하게 체험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겸허한 이스트우드 앞에서 더더욱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야만에서 반성으로


 웥트 코왈스키는 야만의 시대가 남긴 상흔을 계속해서 앓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싸우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전쟁터의 눈빛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다소 신경질적이다. 장례식날에 짧은 옷을 입고 온 손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을 월트라고 부르는 젊은 신부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돌려보낸다.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또 어떤가. 그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완전히 마음을 닫은 채로 산다.


 그러나 수와 타오의 등장이 월트를 바꾼다. 타오를 데려가기 위해 소란을 피우는 폭력배들을 총으로 쫓아낸 그는, 이후에 계속되는 타오네 가족의 선물공세에 당황한다. 자신의 영역을 지켰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얼마 후 그는 또 한번 총을 듦으로써 위기에 빠진 수를 구한다. 그는 수의 집에 초대받아 그들의 전통을 배우면서, 자신이 언짢아 했던 젊은 세대의 무례함과 자신의 타문화에 대한 무례함이 다르지 않았음을 배우고 반성한다. 또 동시에 성실히 일하는 타오를 보면서 새로운 세대의 희망을 보게 되고 차를 훔치려던 그를 용서하기로 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마음열기 과정은 월트로 하여금 스스로의 신념을 재정비하도록 한다. 다소 거칠긴 하지만 그가 재확립한 삶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타인을 존중할 것

성실하게 일할 것

폭력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 것


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왔던 이스트우드 답게 그의 메시지는 현학적 철학이 아닌 단순한 실천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월트가 실천하고, 이스트우드가 예찬하는 또 하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긍정할 것을 긍정하고 부정할 것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연마하는 것 즉, 반성과 실천을 멈추지 않는 태도 말이다. 야만의 시대가 남긴 유산들을 버리고 월트는 새로운 시대 속에서 다시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정비하고 담금질하면서, 그 가치를 공유하고 실천하려는 소년을 지키는 것. 그것이 월트가 찾은 자신의 자리이고, 노년의 소명이다.



 2. 모멸에서 긍지로


 그런 월트와 아이들에게 또다른 시련이 닥친다. 폭력배들이 타오의 집에 총을 갈기고 수를 공격한 것이다. 공격당한 아이들을 보고서 월트는 생각에 잠긴다. 긴 폭력의 시대를 지나왔는데, 여전히 폭력이 남아있다니. 세상에 폭력이 남아있는 한, 다음 세대도 그와 마찬가지로 총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자신을 한평생 괴롭혀왔던 적이 이제는 미래세대에게 까지 그 손길을 뻗치는데, 여전히 건재한 적에 비해 자신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때에 노인이 느꼈을 무력감은 가늠하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흥분한 타오를 진정시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그 어느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러니 그가 마지막 결단을 내렸을 때, 다른 이들은 몰랐다 해도 월트 본인만큼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죽음을 계획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는 총기 없이 죽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간다.


 월트의 죽음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 나는 이 죽음이 실상 이스트우드가 그리는 가장 명예로운 죽음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무력한 노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단 말이다. 그의 계획된 죽음은 역사상 가장 숭고한 죽음으로 기억되는 예수의 그것과 닮았다. 권력의 부조리 앞에서 돌을 던지는 대신, 죽음을 전시함으로써 폭로한 그 희생처럼, 월트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탄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자신의 희생이 단 한 줌의 폭력이라도 세상 밖으로 밀어내길 바라면서.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동네 주민들은 폭력의 민낯을 여과없이 목격했다. 폭력배들은 법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한 번 배웠다. 폭력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월트가 없는 세계에도 여전히 폭력은 남아 있겠지만, 동시에 그가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당당한 역사도 남는다. 죽음으로써 영원과 싸우고, 모멸의 시간들을 긍지로 재건하는 힘. 그 힘이야 말로 월트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이고, 그랜 토리노와 함께 타오가 상속받은, 오래도록 계승되어야 할 정신일 것이다. 월트에게는 총이 없었으나 빛(light)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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