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토이스토리’를 떠올릴 때마다 괜스레 뭉클해지곤 한다. 워낙 잔정을 잘 못 떼어내는 성격이라 팬임을 자처하는 시리즈들은 많지만, ‘토이스토리’는 다른 시리즈들, 이를테면 ‘스타워즈’나 ‘해리포터’와도 좀 다른 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스타워즈’가 에피소드7으로 돌아왔을 때도 분명 극장으로 달려갔고, 오프닝에 전율했고, 익숙한 장면들에 환호했다. 그러나 ‘토이스토리’를 관람한다는 행위에는 ‘스타워즈’나 ‘해리포터’가 주는 설렘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기숙사 방에서 혼자 ‘토이스토리3’를 보고서 펑펑 운 그날처럼, 극장에서 아주 흐느끼며 울어버렸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친구들
한동안 ‘토이스토리’만의 그 특별함에 대해 고민했다. 단지 시리즈에 관한 애착이 더 컸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에 ‘스타워즈’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이름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영화를 보고, 영화에 관해 글을 쓰고 있는게 전부 ‘스타워즈’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릴 적 아무도 없는 불 꺼진 거실에서 우유 한잔을 들고 ‘스타워즈’를 본 게 내가 기억하는 거의 최초의 능동적 영화활동 이었고, 나는 아직도 그때의 순수한 영화적 체험을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에피소드7의 오프닝과 함께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올 때 나는, 한순간 극장에서 벗어나 그때의 거실로 소환되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잠깐, 최근 ‘해리포터’를 다시 봤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아빠와 함께 노포동 영화관에 젤리를 사서 들어가던 순간을, 가족여행을 다닐 때 차안에서 마법사의 돌을 몇 번이고 돌려보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토이스토리’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내가 언제, 어떻게 ‘토이스토리’를 봤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어쩐 일인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좀처럼 소환되지 않았다. 이 차이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여기서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성질을 하나 발견했다고 하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의 ‘스타워즈’는 진작에 끝났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많은 역할로 분한 해리슨 포드를 봐왔다. 올드 시리즈의 배우들이 나이든 모습으로 스크린에 재림했을 때 느꼈던 애상감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에 가까웠다. 이는 7, 80년대의 미국이라는 겪어보지 못한 시대가 불러오는 근원적 노스텔지어임과 동시에, 불 꺼진 거실에서 누구보다 순수한 애정으로 영화를 바라보던 스스로의 시간을 향한 그리움이다. 그렇다. 나는 21세기에, 자본의 힘으로 다시 소환된 이 영화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영화 밖의 세상을 추억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울렸다. 그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토이스토리’는 다르다.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이미 닫혀버린 시리즈의 문을 무례하게 열어 젖혀 만든 신작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했다. 만화에는 어떠한 진실도 없기에, 나는 아무런 모순 없이 그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시네마의 진실성
영화는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 여기서 뤼미에르 형제까지 끌어와 가며 영화가 태초에 연극과는 다른, 진실을 다루는 매체였음을 역설하는 건 과잉일 듯 하다. 굳이 영화사를 개괄하지 않아도, 우리는 카메라 속에 진실의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7’에서의 해리슨 포드를 보라. 그의 얼굴은 흐르는 세월이라는 진실을 숨기지 못한다.
실사 영화와 반대로, 애니메이션에는 단 한줌의 진실도 없다. 한 점의 회화처럼 모든 점 하나하나가, 모사일지 언정 현실이 아니다. 앤디가 늙는다 해도 그건 우리네 세상의 시간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흐르는 물 조차도, 현실감이 있을 뿐 현실이 아니다. 우디는 절대 무대인사에 등장해, 자신이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중에 겪었던 어려움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한시적으로 열린 창호지의 구멍과도 같은 스크린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방향으로도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스파이더맨’의 막이 내리면 톰 홀랜드는 곧바로 현실로 돌아와 전세계를 돌며 영화를 홍보한다. 그러나 ‘토이스토리’의 막이 내린 뒤에도, 우디의 삶은, 그가 속한 세계 속에서 여전히 계속된다. 막이 내린 뒤에 극장에 남겨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시공간이 뒤틀려 스크린이라는 차원의 틈이 다시 한번 열리길 기도하거나,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의지로 살아질 그들의 삶에 안녕을 빌어주는 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은 어디로?
마틴 스콜세지는 ‘사이드 바이 사이드’에서 CGI에 대해, 앞으로의 어린 세대들이 스크린 속의 것들을 아무것도 믿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는 온통 초록색 바탕에, 우스꽝스러운 쫄쫄이를 입고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고도 웃어넘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슬프게도 영화는, 점점 현실이라는 뿌리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럼 애니메이션은 어떤가. 21세기의 애니메이션들(특히 픽사의 작품들)은 역으로 실사 영화의 뿌리를 지나치게 동경하는 듯 하다. 스튜디오의 향상된 기술을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토이스토리4’의 오프닝씬에서 내가 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들이 재현한 물은 마치 실제의 그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흐른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문제다. 현실과 고립됨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이, 구태여 존재하지도 않는 카메라를 있는 척 하며 실사 영화의 촬영기법을 모방하고, 얼마나 더 ‘실사에 가까운’ 영상을 만들 수 있는지를 놓고 경쟁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나. 기술의 발전을 칭찬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야오의 걸작들이 현실의 단면을 정교하게 묘사함으로써 위대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영화들이 영화의 근원에 대한 성숙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듯이, 애니메이션도 스스로의 뿌리에 관해 끊임 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도, 우리가 누렸던 것처럼 영화를 통해서 진실을 보고, 만화를 통해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실사 영화가 실상을 떠나고 애니메이션은 실사를 모방하는 시대가, 그리하여 더 이상 어떤 꿈도 진실도 기대할 수 없는 영화들 만이 만들어지는 시대가 나는 두렵다. 기술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현실의 영화를, 꿈의 애니메이션을 응원하려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