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삶은 이렇다. 바쁘게 일하고 저녁 느지막이 집에 오면 뭔가를 생각할 기운이 없다. 퇴근 후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서는 왜인지 항상 볼 게 없지만 손이 가는 TV를 켠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전전하며 볼거리를 찾다가 이내 그만둔다. 아무렇게나 자동으로 재생되는 화면은 그대로 둔 채,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 같은 것들이나 댓글, 브런치, 전자책 등등을 떠돌며 무신경하게 읽다가 말다가 한다. 그러다 12시 반이 되면 워치로 알람이 온다. 그럼 얼추 시간에 맞춰 잘 준비를 마친 후 잠이 든다.
이렇듯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저녁에 문득 ‘좁아진 인간관계’라는 주제가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물론 이내 지워버리고 다른 일을 하거나하며 그 주제를 다시 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관계는 장점도 정말 많지만 묘하고 피곤하기도 하다. 평생 친하게 지낼 것 같다가도 한 순간에 멀어지기도 하고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오랜 인연이 되기도 한다. 그 모든 인연에는 표면적인 계기가 있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사적인 인간관계일 경우이다. 나에게 공적인 인간관계는 또 다른 영역으로 느껴지는 영역이다. 공적인 인간관계란 주로 회사 안에서 업무적으로 엮인 관계 들일 것이다. 공적인 관계인 사람들과는 애초에 가까워질 일이 잘 없긴 하다. 그 사람을 판단할 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업무적으로 잘 처리하는가와 더럽고 치사하게 성과를 가로채거나 하지는 않은지. 따위의 공적인 부분이 훨씬 중요해진다. 물론 사적인 부분도 자연스레 얽히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왜인지 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었다. 내 마음의 벽이 상당히 높은가 보다. 이런 태도는 사회생활을 못하는 인간의 특징으로, 회사 생활에 이로운 태도는 아니다… 라는 것쯤은 물론 나도 알고는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회사는 일하는 공간인데 왜 친목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왜 그런 사적인 감정들 때문에 업무가 방해받아야 하는지도.
앞서 말한 공적인 관계에 반하여 사적인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아니 오히려 단순한가? 단순하게 바라본다면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관계는 누구 한 명이 서로 잡고 있던 끈을 놓으면 끝난다. 물론 오래된 관계일수록 관계의 끈을 놓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많이 어릴 적에는 인간관계에 목을 매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쪽에서 쉽게 정리를 해버린다던지 하는 미숙한 모습도 많이 있었다. 나이를 좀 먹은 요즘은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많은 기회를 주고 대화를 해도 ‘함께하는 시간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결국에는 멀어지고 만다. (나의 그러려니…를 잘 못하는 성질머리 탓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여도 이거는 아니지 않나… 같이 있는 시간이 오히려 버거운데, 친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받아주고 보듬어줘야 하는 건가… 아니 이건 너무 가치관이 안 맞는데…’
이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면 두 가지 방향이 잡힌다. 첫 번째, 대화를 시도한다. 변화를 요청하고 협상이 결렬되면 결국 멀어진다. 두 번째, 아무 일도 없는 척 조용히 멀어진다. 나는 주로 첫 번째 방식을 사용해서 협상을 시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주로 대화가 끝난 뒤에는 높은 확률로 사이가 더 악화된다. 싸움으로 번지거나, 오히려 먼저 손절을 당하거나. 여러 가지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요즘에는 정말 소중한 관계가 아닐 경우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식, 조용히 멀어지기를 사용하면 좋은 점은 편하다는 것이다. 해명할 이유도 없고, 뒤에서 말이 나올 일도 없어진다. 제삼자로부터 요즘 멀어진 것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글쎄? 바빠서 그런가?’로 무신경하게 일관하면 되지 않은가? 대신 모든 관계에 대한 고민과 상처는 손절당하는 사람이 떠안게 된다는 점이 안 좋은 점이다. 물론 그런 관계로 결말을 맞게 된 데에는 손절당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양 쪽 다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손절한 사람도 많은 스트레스를 오랜 시간 감내했을 것을 예상해보면 결국 서로 비슷한 아픔을 교환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나를 계기로, 이직을 계기로, 연애를 계기로, 결혼을 계기로, 육아를 계기로, 실언을 계기로, 실수를 계기로... 다양한 상황들로 사람은 멀어지고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표면적인 이유들일뿐 사실 명확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관계는 그런 상황들을 다 떠나서 지속되기도 하니까. 흠, 그러고 보면 20대 중반 무렵에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었다. 너무 소중하면 잃기가 싫어지는 법이다. 30대에 접어들며 갈래갈래 각자의 길을 떠날 상황이 눈에 뻔히 보여서였을까. 괜스레 그때가 오면 관계가 멀어질까 봐 걱정이 앞서기도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히려 정말로 30대를 넘어가고,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이직을 하고, 창업을 하고… 하면서 느낀 것은 관계라는 것도 결국 사람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 따라 관계가 바뀐다는 것은 애초에 그 관계의 끈이 약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나의 짧은 인생에서 인간관계는 늘 20대 초반까지 사귄 친구들에서 점점 좁아져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 들어가면서는 사적으로 친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직은 미성숙하던 나의 어릴 적 관계들은 이런저런 잣대로, 상황으로 계속 정리되고 정리하며 지금까지 흘러왔다. 되돌아보니 요즘은 몇 남지 않아서 역시 그러려니..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는다면 먼 훗날 고독사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그래서 예로부터 죽을 때까지 진정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거라고 하나 보다. 어릴 때는 한 명쯤은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나만 봐도 30대에 벌써 남은 사람이 몇 없는데, 100세까지 우정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70년이 더 남았다. 세월이 흐르며 계속 상황들은 변할 것이다. 그에 따라 사람의 가치관이나 태도, 수준은 계속 변하기 나름이다. 아주아주 깊은 신뢰와 적당한 포용력, 배려가 없다면 관계라는 것은 그 겉의 모양이 바뀔 때마다 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모든 것을 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자신이 제일 소중하니 말이다. 관계를 맺어서 이래저래 고통만 받는다면, 혼자 살다가 고독사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도 스친다.
소위 슬픈 일을 같이 슬퍼해주는 것보다 기쁜 일을 같이 기뻐해 주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사실 둘 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계속해서 사회적 상황과 위치, 경제적 상황 등은 바뀌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도, 주변의 인간 관계도 변화한다. 성공을 하면 성공을 한대로, 배경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사람들이 떠나가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외로워질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오고 가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의 필요에 의한 관계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스쳐가는 짧은 인연들도 나쁘다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모든 관계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주는데 도움이 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니까.
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스쳐간 인연들은 ‘단 한 명의 평생 친구’의 범주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평생 친구’라는 타이틀 정도라면 상황이 어떻든 간에 그 사람 자체를 바라봐 줄 수 있고, 함께하면 웃음이 나고 행복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나이 4-50쯤이 되면 지금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추정컨데 더 커지지는 못할 테고 좁아지던지 그대로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때쯤에는 관계라는 게 더 심플하게 느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