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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예 Apr 16. 2024

그래서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벌써.


시간이 참 빠르다.

10번째 16일이 왔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조금은 스트레스풀한 글이니,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라면 읽지 않으시는 게 좋다.




얼마전에 SNS 피드 추천에서 매우 불쾌한 글을 봤다.

(요즘 내가 느끼는 불쾌의 80%는 각종 SNS에 오는 듯)

하필 최근에 큰 선거가 있었으니... 선거철을 맞이하여 자신과 반대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저격하는 글이었는데 대충 골자는 다음과 같다.


니가 아무리 그래봤자 니 가난, 니 인간관계, 니 외로움은 안 없어지거든? 결국 니가 사회를 바꾸고 싶어하는 건 니 상황에 대한 분풀이야. 넌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어. 세상은 자본가들이 바꾸는 거지 너 같은 사람들로 바뀌지 않아.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글을 대단한 통찰이라고 써놓은 그 게시글에는 반대 댓글조차 달리지 않았다. 이른바 '먹금' 당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요즘들어 자신의 무력감을 과잉확대해서 '내가 못 바꾸니 나와 비슷한 남도 못 바꿀 걸?' 식으로 사회적인 무력감으로 포장하려는 시도가 잦아진 것 같다. 아직 세상을 바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저런 글을 보고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저런 사람들을 '보이스 커터'라고 하는데(그냥 제가 만든 단어임ㅋㅋ)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르고 싶어하는 부류라는 뜻이다. 보이스 커터는 보수적인 사회관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다. 보통 보수적인 사람들은 기득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저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런 부류는 또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자신은 기득권이 아닌데, 그렇다고 사회에 다른 목소리를 내지도 못할 때. 그 무력감을 타인에게도 전이시키고자 나쁜 통찰을 현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스 커터는 언제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이길 수가 없다. 너무 당연하다. 그 이유는.



1. 사회운동 > 사회분노

우리 주변에는 여러 영역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음 예시를 나열하기가 힘들만큼 많다. 생존/생업/사상/진로/이권 등 매우 다양하다. 대부분의 운동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때로는 사회운동을 하지만 정치적 목적보다는 미시적인, 개인의 이권을 우선시 하기도 한다. 아무튼간에 사회운동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사회운동이 오로지 '사회분노'에서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분풀이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우물 안 개구리다. 사회분노가 큰 동력이 되고, 대부분의 씨앗이긴 하지만 어떤 운동은 분노없이 이뤄지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더 좋은 사회상이 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단계로 진입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꼭 분노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이른바 연대나 박애로 시작하는 운동들은 그 참여자들이 사회를 향해 분풀이를 하고 있다고 평가절하 할 수 없다.


그러니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외롭고/낙오되어' 화가 난 사람이라 낙인 찍는 건, 발화자의 짧은 식견만 대변할 뿐이다.


2. 자본가 = 혁명가?

세상은 오직 자본가(기득권)만이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외침은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쓰임새가 없는 외침이라고 본다. 자본가는 세상을 좀 더 쉽게 바꿀 수 있다. 그걸 사람들이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에는 큰 손보다 많은 입이 필요하기도 하다. 1명이 1억을 내는 것과 1만명이 1만원씩 보태서 만드는 금액은 동일하다. 전자의 영향력은 오직 개인에게만 머문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다르다.


보통 자본가들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쪽이지 바꾸는 쪽이 아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바꾸려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소위 '혁명'이나 '투쟁'이라는 단어는 브루주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의 단어이다. 자본가는 혁명가 역할을 하지 않는다.


3. 원래 세상은 박해받는 사람들이 바꾸었다.

역사는 항상 그랬다. 박해하는 사람들은 결국 뒤안길로 사라지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끝내 시대를 바꾸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미 정규 교과과정에서 배우지 않았나(...) 그런데 왜 박해받는 사람들을, 그 사람과 같은 처지이면서 앞장서 박해하려는지 이해가 안 된다. 단지 그사람들의 운동이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나는 그사람들만큼의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는 게을러서 메세지를 전달하는 일을 못 하기 때문에? 하지만 동참하지 않는 것과 목소리를 잘라버리는 일은 다르다.


찰스다윈의 <종의 기원> 에서는 변종이 진화를 초래한다는 대목이 있다. 기존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특이점'을 갖고 태어난 변종. 그 특성이 대물림되어 개체 수가 증가하면, 변종이 기존의 종을 압도하고 종특성을 대변하게 된다. 이렇게 종은 '진화'한다.


결국 "너는 아무것도 못하니 안주하라."라고 말하며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르는 사람들은, 먼미래에 '대체'당한다. 끝내 바뀜을 계속 시도하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이스 커터들의 조롱에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은 언제나 '바꾸려는 사람들에 의해' 바뀌었다. '어차피 우리는 못 바꿔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마련된 자리는 뒷골방이지 안방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못 바꿨다고 해서, 지금 바꾸려는 사람들까지 억누르지는 않았으면. '그래서 니가 뭘 할 수 있는데?'는 지금 당장의 성과로 증명하는 명제가 아니다. 변화에 동참할 심적 여유가 없다면 그냥 놔두면 된다. 굳이 앞장서서 조롱하고, 무시하고, 너는 못할 거다 찍어누르는 사람의 말로는 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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