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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모연 Sep 16. 2023

하지만 우리는 성장한다

천선란 [이끼숲]을 읽고 쓴 독후감

 어려서부터 SF장르를 좋아해 왔다. 주로 미래의 허구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SF물은 나에게 즐거움과 통쾌함을, 때로는 슬픔과 감동을 줬다. 어렸을 때는 여러 SF물 중 스타워즈나 건담 시리즈를 자주 봤던 기억이 있다. 특히 건담 시리즈는 1979년에 처음 나온 [기동전사 건담]까지 찾아서 봤을 정도로 좋아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예전에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SF장르를 접했다면, 요즘에는 앤디 위어의 [아르테미스]나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같은 SF소설을 가끔 읽는다. 이 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미래 과학도시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러 단편소설로 풀어냈는데, '차가움'과 '메마름'이 먼저 떠오르는 과학도시에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인상 깊었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어서일까? 월간 베스트셀러 목록 중 어떤 책을 읽을지 뒤적거리다가 제목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데 SF 소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끼숲]이 눈에 띄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천 개의 파랑]의 저자 천선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도 책을 고르는 데 큰 영향을 주기는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이라면 중간은 가겠지라는 생각?




 [이끼숲]은 미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더 이상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인류는 땅을 파 거대한 지하도시를 세우고 그곳으로 이주해 살아간다.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가기 위해 인류는 엄격한 통제체계 안에서 관리된다. 지하에서의 삶에 도움이 된다는 이상한 알약을 매일 먹어야 하며(진짜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전 신고된 아이보다 더 많이 낫게 되면 신고되지 않은 아이는 아무도 모르는 어디론가 데려간다(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안정'이라는 탈을 쓴 '통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다숲>, <우주늪>, 그리고 <이끼숲> 총 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 지하도시를 그린다. '연작 소설'이라는 소개답게 각 작품은 동일한 미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동일한 등장인물들이 나오며,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결국은 연결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작품이 진행될수록 여러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지하도시가 조금씩 익숙해진다.

 

 첫 번째 <바다숲>에서는 '마르코'라는 인물을 위주로 지하도시의 불합리한 노동 이야기를 들려준다. "새 회사에 불만이 있는 자는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 간단한 논리 앞에 굴복하지 않을 노동자는 없었다. 마르코도 그랬다.([이끼숲]-<바다숲> 중)" 노동자들은 투쟁하지만 굴복하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였던 마르코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현실을 깨닫는다. 모든 것에 서툴렀던 마르코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주했을 때조차 서투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다음 이야기인 <우주늪>은 철저한 인구통제 하에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야만 했던 '의조'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의주야, 나는 비밀일까? 비밀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어떤 것을 숨기거나 감추는 거잖아. 까발려졌을 때 잃거나, 뒤틀리거나, 잘못되거나 나아가는 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근데 나를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이끼숲]-<우주늪> 중)" 의조는 환풍기 통로로 지하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쌍둥이 '의주'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밀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

 "나 말고 누군가가, 나와 같은 누군가가, 이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누군가가, 세상의 늪에 빠져버린 누군가가 또 있구나. 나에게 해야 할 게 생겼어.([이끼숲]-<우주늪> 중)" 그러던 중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존재할 이유를 찾아간다. '의조'에게는 같은 고민을 가지고, 같은 처지에서 살아가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살아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마지막 <이끼숲>은 사랑하는 '유오'를 잃은 '소마'와 친구들이 유오를 위해 감행하는 모험을 다루며 지하도시의 비밀을 폭로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무의 뿌리에라도 가닿으려던 그 애의 마음을 무엇으로 꺾을 수 있었을까 싶다. ... 지상이 황무지라고 하더라도 어쩌다 남은 들꽃 한 송이에 그 애는 모든 걸 가진 듯 행복했겠지. 세계를 지배한 절망보다 나약하게 핀 희망을 사랑했을 테니까.([이끼숲]-<이끼숲> 중)" 유오를 잃은 소마는 모험을 통해 조금씩 유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되새긴다. 이 되새김은 소마에게 상실을 받아들이고, 유오를 보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애는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내가 확신할 수 있다.([이끼숲]-<이끼숲> 중)" 소마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유오의 기억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점차 소마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으로 변화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쓰고 싶었던 '구하는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인물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불합리한 노동환경을 점차 깨달아가는 것, 뭔지 몰랐던 혼란스러운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 존재할 의지를 다잡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 인물들은 각자가 마주한 현실 속에서 부딪히고 상처받고 절망하지만 이를 통해 성장한다. 그래서 나에게 [이끼숲]은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 사진은 여수 여행 중 풍경이 예뻐서 사진으로 남겨놓았던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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