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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로디 Jun 28. 2020

사라진 그녀,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는 정말 예수의 수제자 였을까? 

13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흑사병)은 3백년간 지속된다. 처음 발병했을 때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갔지만 오히려 교회가 전염의 온상이 되며 문제가 더 커졌다. 하지만 교회와 교황은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 하지 못한다. 그렇게 수백년이 지난 16세기에도 교회와 교황은 흑사병은 인간들의 죄 때문이라며 '면죄부'를 얻어야 전염병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외쳤고, 그렇게 면죄부를 팔아 완성된 성당이 그 유명한 '성 베드로성당'이고 역사상 가장 웅장한 성당이라는 아이러니가 가득한 곳이다. 그리고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종교개혁을 이끌었다는 '마틴 루터'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마틴 루터의 동생이 흑사병으로 죽었고, 같은 대학의 동료 교수 3명도 흑사병으로 죽게 된다. 이런 중에도 종교가 본래 해야 할 역할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면죄부를 팔아 역사상 전례 없는 웅장한 성당을 짓는 모습에 마틴 루터가 면죄부를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고, 이것을 시작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또 한번 전 세계에 전례 없는 전염병이 몰아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자고 했던 개혁 교회, 즉 개신교회가 끊임 없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개신교 국가인 미국이 자신들의 종교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하는지를 보면 중세의 가톨릭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런 즈음에 과연 그동안 승자의 역사였기에 가려져 있던 기독교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그 첫 시작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여성인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살펴 보았다. 이렇게 찾아가다 보니 정말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았다. 




스승인 예수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르고 부활의 첫 순간의 자리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흔적도 없이 성서에서 사라진다. 예수의 남성 제자들은 예수가 잡혀가고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한다. 하지만 여성 제자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다. 이 기쁜 소식을 절망에 빠진 남성 제자들께 전했지만 그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딱 여기까지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성서의 기록이다. 그리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 어느 곳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쳤다. 그런 예수가 죽고 부활했던 자리를 처음 목격한 이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가 그토록 전하고자 했던 가르침이 죽음과 부활 이었다면 왜 성서는 이 첫 자리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아무것도 전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일까?



막달라 마리아는 ‘회개한 창녀’ 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옥합을 깨뜨려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회개한 창녀’라고 알고 있다. 이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591년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세라는 교황의 설교로부터 기인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무명의 죄 많은 여인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누이 베다니의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라고 설교한 것이다. 


“우리는 이 여인이 누가의 죄 많은 여인, 곧 요한이 마리아라 부르는 그 여인이자 마가가 마리아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다고 말하는 그 마리아임을 믿습니다.”(『복음서 강론』 33편)


그레고리우스 1세의 이 같은 주장은 1969년에 이르러 실수가 있었다는 것이 인정되어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내용을 철회한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실수는 성서의 서로 다른 인물을 동일 인물인 것처럼 해석한 것 뿐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을 ‘창녀’로 해석해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전락 시킨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과연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 설교를 통해 한 이런 주장이 단순한 실수였을까? 게다가 1천년이나 이런 주장이 교황의 권위로 이어져 왔다면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을까? 


신약성서 마가복음 16장 9절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 자신의 제자들 중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장면이 기록되고 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가복음 16:9)


왜 마가복음은 예수가 부활 후 처음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전에 일곱 귀신을 쫒아내어 주신’이라고 한 것일까? 무언가 부활의 사건과 연관이 있기에 그렇게 표현 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성서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성이 있는데 특히 일곱 이라는 숫자는 다른 순자에 비해서도 특히나 상징성이 강한 숫자이다. 이는 단지 성서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고대 중근동의 세계관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은 특별했다. 그래서 예수가 쫒아내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일곱 귀신은 고대 중근동의 죄악에 이르는 일곱 가지 악덕(교만, 호색, 시기, 분노, 탐욕, 폭식, 나태 등)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베드로를 비롯한 남성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  하려고 다투며 벌였던 교만, 시기, 분노, 탐욕 등을 생각해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스승인 예수를 만나 일곱 귀신에서 벗어났다는 말씀과 부활의 의미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일곱 표상을 가졌으니그 첫째가 어둠이요, 둘째가 욕망이요, 셋째가 무지요, 넷째가 치명적인 시기심이요, 다섯째가 육신에 대한 집착이요, 여섯째가 중독된 지혜요, 일곱째가 사악한 지혜니라.”(「마리아복음」 16쪽)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마가복음이 예수께서 치유하신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라는 언급이 대단히 영적인 의미라고 보여지는 이유이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영지주의 문서인가?  


18세기 계몽주의가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 할 때, 1984년 영국 의사인 아스큐의 집에서 346쪽에 이르는 콥트어 방언으로 기록된 문서가 발견된다. 대영박물관은 이 문서를 구입해 아스큐 사본Askew Codex이라 불렀다. 이 문서에서 처음 발견된 사본이 <피스티스 소피아> 사본 이었고, 그 내용은 지혜의 여신 소피아와 예수의 대화였다. 그리고 발견된 것이 브루스 사본Bruce Codex이었고, 예수가 제자들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여행담이 그 내용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발견된 것은 베를린 사본Berlin Codex인데, 여기서 <마리아 복음>이 발견 되었다. 학자들은 이 문서들이 2세기경의 문서라고 추정하고 있다. 2세기의 문서가 18세기가 되어서야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발견 된 <마리아 복음>은 베를린 국립 박물관 이집트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세계 2차 대전이 지나고 나그함마디 문서라 불리는 문서들과 함께 세상에 소개되었다. <마리아 복음>은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항아리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소개된 것은 소위 ‘정경’이라 불리는 성서에 없던 내용이 서로 보완을 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경에서 사라진 사람들과 사라진 시간 그리고 사라진 내용이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와 <마리아 복음>에서 서로 보완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예수가 부활하자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매여, 주님께서 당신을 어느 여자보다도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 그분께서 하신 말씀 중에 당신만 알고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시오.”(마리아복음 10쪽)


부활의 첫 소식을 남성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했던 것처럼 마리아는 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 준다. 하지만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안드레가 형제들에게 이르노니, 자매의 말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주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던 것과 너무도 다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길, 우리가 모르는 비밀을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니 가당키나 합니까? 관습을 뒤엎고 여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옳습니까? 정녕 우리보다 더 사랑하사 이 여자를 택하신 것입니까?”(마리아복음 17쪽)


이런 반응은 사도행전 10장에도 유사하게 나오고 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사도행전 10:14-15)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베드로를 비롯한 남성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로마의 제국주의적 편견으로 대했다. 단 한 번도 마리아를 ‘동료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하찮은 여자’로 취급하며 무시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물론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베드로와 다른 남성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때 레위가 가로되 베드로 형제, 성격이 불같더니 우리 원수를 닮아 여자를 거부하고자 함인가요? 주께서 그녀를 귀히 여기셨다면 거부해선 안됩니다. 그녀를 우리보다 더 사랑하사 그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속죄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주를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게 합시다.”(마리아복음 18쪽)


수 천 년을 단일 민족으로 살아왔고 온갖 외세의 압제에 시달려 왔던 유대인들에게 유대교의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방 민족들은 접촉도 하지 말아야 할 악한 것으로 규정했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는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예수처럼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까지 더해지니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와 혼란함으로 멘붕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은 더욱 더 유대교의 배타성 뒤로 숨어 과거로의 회기로부터 안정감을 찾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을 독려하고 격려하고 앞장선 것은 다름 아닌 막달라 마리아 였다. 


“부디 슬픔과 회의에 젖지 마세요. 그분의 은총이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찬미합시다. 그분께서 오늘을 예비시키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선 우리가 완벽한 인간(안드로포스)이 되길 바라십니다.”(마리아복음 9쪽)


이런 마리아복음서는 소위 영지주의 문서라 낙인이 찍힌 나그함마디 문서와는 다른 시기에 다른 곳에서 발견된 문서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영지주의 문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다. 그런데 왜 정통 교회는 마리아 복음을 나그함마디 문서와 함께 엮어 영지주의 문서로 낙인찍은 것일까? 


유대교의 배타성, 로마의 제국주의 그리고 로마의 국교가 된 기독교. 과연 마리아 복음서가 역사에서 사라진 이유와 영지주의 문서라는 낙인은 이런 것들과 얼마나 연관이 있던 것일까? 


** 이 내용은 도서 하희정 저,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참고 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세요. https://youtu.be/wqrhVXbNC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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