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곳은 부동산 투자운용 회사였다. 파리 중심을 벗어나 외곽쯤 위치했고, 여의도처럼 회사가 즐비한 곳 중 크게 면적을 차지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약 30명으로 구성된 '회계팀'으로 들어갔다. 프랑스와 전 유럽을 통틀어 소유한 부동산을 회사에 소속된 회계사들이 나눠서 회계처리를 하고, 분기별로 주주들에게 보고를 하는 형식이다.
내가 입사를 한 1월 달은 각종 세무신고와 연말 회계보고서 작성으로 가장 분주한 시기였다. 코로나로 인해 감사의견 받는 기간이 늘어난 걸 포함하면 1월부터 6월까지는 거의 '죽음의 레이스'에 가까웠다. 재무제표 만들기, 감사 의견 받기, 부동산 별 주가 계산하기 등등 굵직굵직한 업무가 맡겨졌다.
회사 로비
회상하건대 갓 입사한 1월은 '허니문 기간'이었다. 회사에 콩깍지가 씌어 제대로 분별하기 어려운 기간 말이다. 외벽은 통유리로 반짝반짝 빛이 났고, 내부 인테리어는 '쩍' 소리 나게 멋있었다. 게다가 소규모 강당의 스크린에 올라온 내 이름 석자는 감히 회사를 다니며 가슴 설레게 할 만한 일이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회사 건물 내부에 있는 '카페'였다. 크로와상과 빵 오 쇼콜라가 70 쎈트, 캡슐 커피가 50 센트 하던 그곳.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1유로 20 센트에 소소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 던 그곳이 참 좋았다.
1월은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갔다. 처음 입사한 터라 기본적인 신입 직원 오리엔테이션과 여러 인사 관련 업무를 처리하느라 빠르게 지나갔다. 2월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부동산에 관련된 회계 처리와 세무신고는 일반 수출입 회사에 비해 복잡했다. 배워야 하는 것들로 노트를 금방 꽉 채웠다. 아무리 경력이 있어도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한 달 짧게 배운 것 만으로는 아직 닥쳐올 '100프로 재택근무'에 대한 준비가 덜된 상태였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어제 파스타 면 10박스, 토마토 페이스트 20개 쟁여뒀어'라고 말하는 남자 동료에게 혼자 좀 오버가 심하다고 놀리기가 무섭게 3월 15일 덜컥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스크린을 3개를 놓고 일하던 환경과는 달리 집에서 일하는 건 너무 불편한 일이었다.
스카이프에 온라인이라고 켜져 있는 것 너머로 동료들에게 말을 거는 게 이렇게 부담스러울 줄이야. 바쁜데 방해하는 건 아닌지, 전화를 걸어도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스크린에 대고 말하는 건 다를 텐데 어쩌지 라는 부담감이 컸다. 그리고 역시나 그랬다. 바쁘고 예민한 시기, 5분도 부담스러워하는 몇몇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오는 장벽이란... 너무도 높았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는 걸 줄이는 대신 눈치게임처럼 나는 작년 서류를 찾아 혼자 처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선 일처리 후 이해를 반복했다. 이해하고 처리하기에는 일이 많이 밀려있어, 사치인 것만 같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해'
정신을 차려보니 곧 4월. 처음에는 멋모르고 배우기 시작했던 일들에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의문점도 늘어났다. 대기업에서 처리하는 방식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방식. 한국 회사에서 1시간이면 처리할 일을, 빙빙 돌아 5시간이 걸려 하는 일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굳이 이렇게 일하는 게 맞는 걸까라고 의문점을 가졌던 시점. 4월과 5월 사이 훌쩍 찾아와 버린 파리의 봄 날씨에 내 마음은 점점 얼어만 갔다.
입사 첫날부터 봤던 바로 맞은편 자리 팀장의 '퇴사'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던 퇴사와 동료들의 불만족한 목소리.
겉에서 보던 그 멋지고 견고한 성은 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한 직장은 없겠지만, 매일 불행하다고 느끼는 직장에 오래 있고 싶진 않아.
마음의 방황은 4월과 5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와 '그래도 버텨'라는 속마음 사이에서의 갈등.
나는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에 손을 들어줬다.
무모하고 과감한 결정임을 알았지만,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결정이 났을 때, 정말 자유로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