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서지사항: David Hamelin et Jérôme Lamy, L’ANARCHISME, CET AUTRE SOCIALISME, « Actuel Marx », 2019/2 n° 66, pages 11 à 25,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다비 아믈랭과 제롬 라미(David Hamelin et Jérôme Lamy)
“자, 자, 동지들 [...] 당신들은 고집불통에다가 구제불능의 몽상가들이에요. 자 봅시다. 우리를 실재 갈라 놓는게 뭡니까? 방법에 대한 작은 질문 따윈 완전히 부차적입니다. 우리와 같이 당신들도 혁명가들이에요. 우리처럼 당신들도 결국엔 아나키스트들이에요. 단지 당신, 당신들이 지체없이 당신들의 아나키즘을 창설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중간단계도 없고, 준비도 없이 말이요. 반면에 우리 맑시스트들은 자유의 왕국 안으로 단숨에 도약한다는 그런 ‘뛰어 넘기’ 같은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아요.”[1]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문헌들은 행위의 조직화에 있어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을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 따라 너무나도 대립하는 경향으로 만들어 버렸다. 1871년에 있었던 AIT[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네셔널]의 분열은 맑스와 바쿠닌 간의 적대에 의해 구체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해방의 정치학은 두 진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잘못된 역사기술의 증거를 재검토하고자 작성되었다. 이것은 단지 좌파 정치학의 역사가 가지는 특유한 계기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이론과 실천이 특수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서 출현했던 방식에 대해 캐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활용가능한 정치적 선택지들의 범위 안에서 아나키즘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투쟁, 즉 프롤레타리아의 방어와 그 모든 권위의 형태들을 폐기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구조화된 (상대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을 구성함으로써 종결되었는가? 동시대에 응결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형태들 사이를 연결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만약 오늘날 그와 같은 몇몇 질문들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선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들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며, 최근 몇 년간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주목할만한 재생작업[2]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과학은 실천적인 아나키스트들의 역사와 현재성 둘 모두를 탐구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적인 주제에 사로잡혔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성찰적 측면에서 반권위주의적인 사유 방식에 대한 반성을 위한 연구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의 최근의 이런저런 이론적 발전과정을 재소환함으로써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인식론적 활동에 비추어 진행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간의 대립과 절합이 전체적으로 재고찰되었던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
아나키즘 연구의 재생
인류학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 사회와 아나키즘적 형식의 관계를 묻는 작업을 해 왔다. 다시 말해 그것은 권위의 거부와 개인적 해방의 가치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 학문분야는 서구체제중심의 틀로부터 떨어진 지대를 연구함으로써 탈중심화하였기 때문에, 일찌감치 그 인식론적 쟁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1967년부터, 제라르 질(Gérard Gilles)은 철학과 정신분석을 가로지르며 ‘자유로운 인류학’의 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제안했다. 그는 – 구조주의에 지배된 지적 시기에 – “개별적인 것의 근본적 구조들을 기술”하는 것에 “세계 안에서 자기(soi)와 세계로의 투사, 구조화되는 것과 구조화하는 것, 구성되는 것과 구성하는 것”[3]과 같은 것에 대한 고려를 도입했다. 그렇지만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1974년에 출간한 저서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La Société contre l’État)에서 국가 관념의 ‘탈자연화’를 겨냥하여 아나키즘적 인류학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원시 사회가 어떤 결핍(국가 구조의 부재)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생각에 반대하여, 클라스트르는 “그 사회의 욕구들에 적합화되고 관련된 자연 환경의 지배를 확증하는”[4] 그들의 능력을 긍정한다. 이것은 노동의 필연성에 대한 자본주의적 확실성과 매우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5] 그들의 목적은 “소비된 에너지 스톡[비축물]의 재편성”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원시 사회”[6]의 “평등성”의 기초는 경제적인 것에 고착된 인간적 활동들의 위계적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클라스트르는 원시 사회에서 “경제가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해서 “정치적” 특성이 제거된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한다.[7] 인류학자는 국가적 구성요소들을 재도입하면서, “야만과 문명 사이의 전형적인 아주 큰 분할”을 재형상화한다. 즉 “한편으로 원시사회, 즉 국가 없는 사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를 향한 사회”다.[8] 1972년에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는 원시 사회와 그것의 가내생산양식을 “아나키적 형태”[9]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구축된 탈조직화, 하나의 역학적 연대”[10]에 기초한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서 지배의 형상을 결정하는 권력 관계의 국가적 술책에 관한 그런 역사적-인류학적 주제화는 수많은 탐구에 영감을 주었다. 그것은 특히 지속적인 주의를 요하는 대상이 되는 국가 – 그리고 그것이 가정하는 규범적 권위의 표명 전체 - 와 관련된다. 집단적 구조 안에서 수렵채집과 “자기-가축화”(auto-domestication)[11]의 특성을 지닌 신석기 시대에 관한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의 연구는 인구 구성의 재편에 대한 인류학적이고 생태적인 결과에 분명히 드러난다. 즉 전염병에의 창궐에서부터, 원국가들(premiers États)의 출현은 막대한 정치적 퇴행을 형성했던 것이다.
만약 인류학자들이 아나키즘의 문제를 연구했다면 – 특히 국가 구조 전체 너머 조직화된 사회라는 측면에서 – 그것은 [그들에 의해] 탐험된 대지(지역들, les terrains)가 반권위적인 조직의 양상들과 서구 세계 안에서 보다 더 평등한 역능(권력, pouvoir)의 분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비교연구는 인류학적인 질문 전체에 대해 불가피한 탈중심화라는 경로로 작동하는 것이며, 오늘날 국가-중립주의(stato-centrisme)와의 상관성을 설립했다.
데이비드 그레버(David Graeber)는 아나키즘 이론과 인류학적 실천 사이의 잠재적인 결합이 더 많이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애석해 한다. 그러므로 그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적 실체들(entités)”[12]로 이해 영역의 범위를 확장하기를 권유한다. 예컨대 그는 “전반적으로 노예제에 의해 형성되었던 [...] 최소한의 정부 기구”[13]로서 아테네 고대사회의 경우를 재사유한다. 그레버는 또한 자본주의를 전체적으로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시기로 재사유할 필연성을 내세운다.[14] 그는 “소외되지 않는 경험”[15]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한다. 아나키즘적 인류학의 일반적 프로그램의 출현은 오직 엄격한 비교연구의 방법론적 원리에 더욱 더 기반함으로써 태어나며, 연구에 있어서 국가-중심성의 도식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이때 아나키적 실천 자체의 기반을 떠난 지점에 천착하는 논증들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16] 즉 권위와 위계를 거부하면서, 소외의 다양한 형식들을 분석하고, 폭력 등등에 기대는 원리들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지리학도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적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특별히 하나의 학제가 구성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자유지리학자 네트워크’(le Réseau des Géographes Libertaires)가 페데리코 페레티(Federico Ferretti), 피에르 라파르드(Pierre Raffard)와 필리프 펠레티어(Philippe Pelletier)에 의해 2010년 경에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함께 아나키즘적 주제와 관련된 것들로 알려진 지리학적 실천을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쓸모있게 잘 벼루어진 도구들로 당대의 문제들에 맞섰다.[17]
그것은 텍스트들과 지리학자들을 활동하게 했던 아나키즘 운동과 관련된 다른 것들의 한계 너머에도 있다. 엘리세 르클뤼(Élisée Reclus)는 매우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그의 풍요로운 저작들에 대한 재독해가 날조되거나 어렴풋한 분석들을 해소하기 위해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식민주의 지역에 대한 르클뤼의 호의적인 가설은 알제리에 관한 그의 노작들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를 통해 논파되었다. 즉 지리학자로서의 그러한 언급들은 “민중(프롤레타리아)의 식민화와 군사적 정복”[18] 사이에 작동하는 차이를 잘 분별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건적인 것은 “사회주의와 아니키즘 이념들에 대한 연구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잘 고려하는 것”이다.[19] 근대 유럽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아메리카 인디안 말살에 관한 르클뤼의 확신은 식민지 개척자들의 폭력에 대한 거부와 학문적 진보를 유지해야할 필연성 사이에 지리학자로서의 생생한 긴장이 구체화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20]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로 르클뤼는 수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의 과학적인 진행의 토대를 환기하는 것은 아나키즘적 지리학의 실천에 닻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 클라크(John P. Clarck)가 르클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하나의 의미 이상으로 총체적(global) 아니키즘에 관한 전망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던 지리학자가 그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한 전지구성의 첫 번째 의미는 총체적으로 망라된 비판이지 파편적인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 지배, 가부장적 지배, 국가적 지배, 관료 지배, 기술 지배,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지배, 비-인간적 공간과 자연에 대한 지배에 관한 다형적(multiforme) 비판으로서의 무정부성(무원리성, anarché)을 이론화하는 첫 번째 사유였다. 이 총체성의 두 번째 의미는 르클뤼가 총체적 서사 안에 그와 같은 비판을 기입함으로써 대지의 역사(l’Histoire de la Terre)를 자유와 지배 간의 투쟁으로 완결지은 첫 번째 사상가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21] 그러므로 무정부주의적 지리학자들은 그들의 합당한 실천들에 관한 어떤 종류의 계보학을 수행한다. 르클뤼가 그러한 가능성들에 대한 탐색을 허용할 경우, 인식론적 쟁점을 수립하는 것과 성찰적 사유의 수행은 더 넓게 펼쳐진다.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아나키스트의 구체적인 실천을 지향하면서, 최근 아나키즘의 문제에 접근했다. 그러한 시도는 무정부주의 역사학의 보다 사변적인 시기들의 재독해를 통해 거쳐 간다. 이것은 특히 존 메리맘(John Merriman)이 그의 저서인 『다이너마이트 클럽』(The Dynamite Club)에서 언급했던 “사실에 따른 선전”과 같은 것이다.[22] 그러한 폭력에 관한 역사적 인류학은 결국엔 19세기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국가적 응답을 재설립하도록 한다.
또한 무정부주의 문화는 특히 일련의 심오한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가에타노 만프레도니아(Gaetano Manfredonia)는 무정부주의 집단의 문화적 실천에 대해 확장된 연구를 주도했다. 20세기 초엽에 그것은, “시장경제의 커져가는 영향력에 대항하는”[23] 정치교육의 방향력으로서 무정부주의적 송가에 대한 방어를 분명 드러냈다.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결집된 폭넓은 문화적 참고 자료들은 “전망들의 풍부함과 다면적인 시각으로”[24] 어떤 괄목할 만한 “아나키즘적인 상상적 유토피아”의 모습을 남겨 놓았다. 셸린 뵈데(Céline Beaudet)와 토니 레장드르(Tony Legendre)의 연구는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나키즘적 공동체의 기획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5] 자연성을 지향하는 아나키즘의 이론적 기반은 자연주의자(Naturiens) 그룹에 대한 연구 안에서 아르노 보베로(Arnaud Baubérot)에 의해 명확하게 제시되었다.[26] 아나키즘의 어떤 형상에 대한 관심이 재개된 것은 제임스 기욤(James Guillaume)[27]이나 피오 튀로니(Pio Turroni)[28]가 만든 [아나키즘의] 이미지 또는 무정부주의적 공동체에 대한 어떤 생각들, 이를테면 구스타프 랑도에(Gustav Landauer)[29]나 마르틴 부버(Martin Buber)[30]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들로부터이다. 이들은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사회 변혁에 대한 그들의 기획의 목표에서, 아나키스트에 의해 수용된 정치적 요구에 대한 역사적 관점들을 새롭게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카탈로니아의 경험은 무정부주의적 경험들에 대한 더욱 완결된 사항들을 구성했다. 즉 역사적 분석은 주목할 만한 페미니즘적 전진을 거기서 드러냈으며[31], 노동 해방의 방식을 드러내기도 했다.[32]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분석들을 그것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밀도있게 만들면서, 정치적 흐름을 조망하는 관점에서 변화하는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에 그 새로운 측면들이 얼마나 연루되는지 평가할 것이다. 현대의 연구들은 보다 고전적인 시도 – 주로 이념의 역사 안에 천착하는 시도 - 로부터 초연해진 상태인데, 이로써 아나키즘의 지적인 계보를 재구성한다. 인류학적(국가에 의한 집합적 삶의 조직화에 대한 상대성을 성찰하는 것을 통한), 지리학적(사회적 양상에 의해 드러나는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 지칭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뚜렷하게 가르는) 그리고 역사학적(구체화된 무정부주의적 경험의 다양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 차원의 구체화는 결국 19세기와 20세기 초 정치적 실천들의 프리즘을 통해 아나키즘을 재해석하려는 역사지리학의 상당히 깊이 있는 결과를 제공한다. 맑스의 사회주의와 바쿠닌의 아나키즘을 갈라 놓은 1871년 분열의 지루한 반복은 재평가 받을 필요가 있다.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경향들의 다양성, 즉 전투적 환경의 다공성(porosité), 논증가들과 행동가들의 순환은 산업 혁명의 지난 자취에서 탄생한 해방의 경험들과 사유들을 전지구적 네트워크 공간으로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평등주의적, 반권위주의적 정치학을 향한 사회주의의 잠재성과 같은 어떤 특별한 흐름보다 다소 덜 드러난 것이다. 정치권력의 획득과 선거 참여에 관한 토론들은 해방적이고 급진적인 실천의 보다 폭넓은 앙상블에 관한 정치 행위의 양상들을 구성한다.
아나키즘 그리고/그러나 사회주의: 끈질긴 정치적 질문
1960년대부터, 에릭 홉스봄(Eric J. Hobsbawm)은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이의 어떤 완전한 단절에 관한 생각을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논증은 “맑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가진 궁극적인 대상들 사이의 차이, 다시 말해 착취, 계급과 국가 안에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는 없다는 그런 식의 차이”[33]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인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맑시스트들은 국가에 대한 즉각적인 청산을 미루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경유하는 길을 상상한다. 이것이 바로 “아나키즘의 독트린과 불화하는” 지점이며, 이러한 불화는 동시에 “총체적이며 분명하게 정의된다.”[34] 불화의 다른 지점은 다음과 같다. “맑스주의자들은 탈중심화나 연방주의보다 중앙집중의 우월성에 기반한 행동을 신뢰했다.” 또한 그들은 “명료한 ‘자발성’에 기반한 운동”[35] 전체와의 거리를 고집했다.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전복에 기여하는”[36] 잠재적 능력이 그러한 거리에 있다고 논증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형식적 과정들” 안에서 분투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홉스봄은 맑스주의자들 자신들이야말로 “권위주의적 그리고/또는 관료주의적”[37] 경향의 가능성을 비판하기를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향들은 그들의 당에 속한 것들이고, “아니키즘 운동들”[37]에 대해서 “공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간의 이러한 접합과 간극들이 명백하게 수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국 역사학자는 자신의 논증 안에 어떤 지리학적 요소들을 도입하면서, 20세기 초에 아나키즘과 맑시즘의 정치적 상황의 다양성에 대한 재규정을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홉스봄은 지역구분을 한다. 하나는 “아나키즘이 생디칼리즘 운동[노동 운동]에 뚜렷한 영향을 행사하지 못한 지역”(특히 “유럽 북서부 지역”)이고, 또 하나는 “아나키즘의 영향력이 뚜렷했던 지역이지만, 1914-1936년 사이에, 극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결정적으로 그 영향력이 감소했던”[38] 지역(이탈리아, 프랑스, 라틴-아메리카와 러시아가 그러한 지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인데, 그리고 아나키즘이 지배적이었던 곳(스페인을 예로 들 수 있다)이 그런 지역이다.
무정부주의의 영향에 관한 그러한 공간적 할당은 연대기적이기도 한 것으로서 정치적 인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으로 정당화 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경향의 퇴조는 해방의 다른 힘을 향한 “전이”(transfert)[39]로 이끌려 갈 수 있다. 그렇지만 홉스봄은 다음과 같은 점에주목한다. “만약 새로운 공산주의 정당에 기반한 어떤 다수 당이, 더더욱이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들이 이전의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된다면,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당파의 한 가운데에 그러한 상황의 징후가 있을 수 있다.”[40] 1917년 혁명은 해방 운동의 정치적 지평을 현저하게 재구성했다. 아나키즘은 “공산주의 운동의 ‘파생물’”로 치부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거부”되었다. 하지만 홉스봄은 1960년대에 – 그가 저작에서 썼던 그 기간 – 아나키스트들의 지역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특히 “놀랄 만큼 관대”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항상 “객관적인 동맹상대”이자 “잠재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10월 혁명”이 “이론의 여지 없이 [...] 1917년을 직접적으로 잇는 시기에 수많은 생디칼리스트이자 아나키스트들의 견인”[41]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나키즘과 맑시즘 사이의 적대와 잠재적 접근을 재맥락화하는 이러한 해석은 다양하게 변화되는 상황 안에서, 19세기에 태어난 두 해방의 정치학의 흐름 사이에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연구에 길을 열어 놓는다. 이것이 바로 장-크리스토프 앙고(Jean-Christophe Angaut)가 지적했던 그런 균열의 지적이고 교조적인 기원이다. “맑스-바쿠닌 불화”를 가정하기보다, 그는 그들 각자의 선택지를 고수하려는 “정치적 실천에서의 대립”[42]을 재정립하기 위해 애쓴다. 두 이론가들 사이의 갈등을 근거 짓는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은 “상호적인 그들의 입장들을 애써 알게 되면”[43] 더 힘들어진다. 앙고는 그 논쟁이 본질적으로 상응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매우 정당하게 환기시킨다. “양 교설은 노동자 해방을 향한 전체 정치 운동에 복무하는 바, <인터네셔널>(AIT)에서의 지위가 상이하다. 첫째로 그러한 해방에 이르는 정치적 수단에 대한 관심과 선거에 의한 정치 권력의 획득을 필연적인 경로로 보는지에 대한 생각에서 그러하다. 두 번째로 부르주아지에 반하여 그리고 국가에 반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그 해방의 즉각적인 쟁취에 있어서 상반되는 평가를 한다. 이들은 <인터네셔널>의 정치적인 것 전체를 구성한다.”[44] AIT 중에서 반대파는 그러한 전략적 분기를 의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터네셔널>의 정치적 조직화를 위한 애처로운 갈등이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45] 결과적으로 바쿠닌은 “어떠한 정치적 또는 철학적 독트린도 공식적인 교설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않기를”[46] 바랬던 것이다. 맑스가 “노동조합들에 관해 [...] 중앙집중주의의 단호한 반대자”[47]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무지가 중앙집중주의의 주제에 관해 퍼져 있었다. 바쿠닌에게 탈정치성의 혐의가 두어진 것에 대해, 앙고는 보다 정확하게 “바쿠닌의 의도는 정치적인 것을 생디칼리즘적인 행동으로 흡수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48]이라고 언급한다.
AIT의 기능을 사고하는 방법과 그들이 제공하는 정치적 방향에 대한 그러한 대립에서부터, 그것은 심사숙고되고 상호대치된 일련의 대조를 이루는 입장들이다. 즉 “만약 맑스과 바쿠닌 사이에 대화가 전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가 드러냈던 적대감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동일한 지점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같은 사태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개념들이 어떤 측면에서 화해가능하지 않느냐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49] AIT를 구성하는 정치적 지형은 과도하게 상이한 정치 전략들을 허용할 만치 수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맑시즘과 아나키즘이 공공연하게 분리되어 작동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19세기 해방 운동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 스스로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정치 공동체가 용광로처럼 뒤섞이는 역사는 그것이 횡단하는 대립자들에 관한 (관건적인) 쟁점들 너머에서, 집합적 거점에 해당되는 지점들과 좌파 내의 분파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알렉스 프리차드(Alex Prichard), 루스 키나(Ruth Kinna), 사쿠 핀타(Saku Pinta)와 데이비드 베리(David Berry)에 의해 간행된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논문집은 중대한 개념적 진전을 구축한다. 저자들은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간의 갈등에 대한 역사문헌적 해석들을 정리하면서, 두 경향에 대한 집중에 부과된 분석적 한계를 환기한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적 전통들은 [다양하게]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율주의자들, 교조적 공산주의자들, 개방적인 맑스주의자들, 싸파티스타, 원시주의자들, 나우토피안들(nowtopians) 그리고 후기-아나키스트들.”[50] 해방의 정치학 안에 놓인 그러한 흐름들의 다양성을 견주어 보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한계들이 [...] 더욱더 복잡해지고, 파악 불가능해지며, 다공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흔해빠진 어정쩡한 이분법”[51]이다. 문제를 탈중심화하고, 급진적인 정치적 기획들의 다양성에 관한 분석으로 통합하면서, 해방 운동들에 대한 보다 밀도 있는 계보학과 보다 약화된 도식주의를 재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행위주체들, 사건들 그리고 [역사적] 순환들의 이질성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면서,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기념비적인 지적 전통들로 현존해 왔던 것들을 재평가할 수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아나키즘에 속한 어떤 저자의 입장은 저러한 입장들의 복잡성에 비추어 재평가된다. 이에 따라 피에르 크로포트킨(Pierre Kropotkine)은 자연과의 관련성과 혁명에 관한 그의 개념들에 있어서 소중한 연구 대상이 된다.[52] 앞서의 관점에 따라 루스 키나는 (후기-아나키즘을 수용하면서) 『상호부조론』(L’Entraide)의 저자에 대해 현대적인 독해를 제안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자본주의적 거래의 폐허로부터 그리고 잇따르는 국가 발전의 붕괴로부터 발생한다”[53]고 상상하지 않는다. 그는 “국지적 공동체”의 활동에 특권을 부여하는 바, 이 공동체는 “그 고유한 행복(잘-존재함, bien-être)에 대한 관리를 직접 관할”[54]해야 한다. 만약 무력 행동이 크로포트킨의 혁명적 전망에서 여전히 불가결하다면, 그것은 맑스주의와 아나키즘 이론에서 전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 쟁점들은 그 존속을 확증할 수 있는 공동체적 정치조직의 양상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크로포트킨이 지향한 조합주의적 행동을 향하며, 그 이유는 특히 그가 일반적인 파업을 혁명을 위한 본질적인 거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55] 급진적인 정치 운동에 관한 그것의 개념은 공동 생활(vivre ensemble)을 구성할 수 있는 개체들의 작은 그룹들 사이에 있는 강한 결속력의 필연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권에 있어서의 혁명을 보증하기 위한 필연적인 그러한 작은 집합적 행동들이 마찬가지로 환경의 변형과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식, 즉 산업 도시 형태의 창조를 이끌어낸다는 것을 설득할 일이 남는다.”[56]
크로포트킨의 입장은 따라서 투표참여나 선거에 대한 토론으로도 또는 혁명적 이행의 시기에 국가 구조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소규모 인간 공동체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그를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나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의 사회주의적 성찰에 가까이 가게 한다. 이들은 그들의 정치적 사유에 자연환경에 관한 사유를 통합한다.[57]
어떤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재독해는 아니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팽팽한 대립을 드러내는 것을 마찬가지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데이비드 베리는 프랑스에서 1933년-1939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을 재구성했다. 그는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했다. “아니키스트들이 ‘인민전선’의 지도자들 – 정치인들 – 과 노동계급 전사들 사이에 구별을 수행함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웠다. [...] 그들은 그 운동과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선적인 계획의 역할에 대한 실재적 부분에 대해서도 그러했다.”[58] 혁명가들 사이에는 “중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가 파시즘을 지향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따라서 “조합 운동 중에 행위의 통일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아나키즘 선전활동의 주요한 대상 중 하나가 되었다.”[59] 데이비드 베리는 이에 따라 “아나키스트들만이 그들이 제안했던 바에 고립된 것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그들이 인민전선의 시기에 수적으로 현저하게 신뢰했던 것에서도 그렇게 되었다”[60]는 점에 주목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제기된 시련[도발]은 “갑작스러운 이중의 헤게모니” 즉 “스탈린주의”의 헤게모니 그리고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의 헤게모니와 상대하면서 스스로를 정립하는데 놓여 있었다.[61] 아나키스트들이 파시즘이 비등하던 시기에 정치적 환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밝히면서, 데이비드 베리는 당파적 분열의 심층적 변형의 순간에 프랑스 좌파의 급진적 운동의 재형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아나키즘적 리얼리즘을 강조했는데, 이는 현재적 쟁점에 따라 그 입장들을 재사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의 역사 안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가 가진 중요성은 그들이 혁명의 미래에 아로새긴 가능성의 잔영으로서 측정된다. 스페인 내전을 떠올리며, 다니엘 콜송(Daniel Colson)은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아나키즘 – 또는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 – 는 언제나 그 경험 자체로 존재하는 특수한 순간들과 상황들 안에서의 하나의 생생한 경험이다. 그것은 장소와 가능성들을 (종종) 명확하게 구성하면서 혹은 그보다 더 자주는 혼란스럽게 알아 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되풀이해서 알려주고, 그리고 이로써 사방으로 그리고 온갖 방법으로, 유비적인 경험들의 잇따르는 불연속성 안에서 되새겨지는 것이다.”[62]
아나키즘적 이념과 실천의 국제적 순환에 관한 강조는 점점 더 역사적 탐구의 또 다른 부분들을 구성했다. 루시앙 반 데어 발트(Lucien van der Walt)는 20세기 전반기 남아프리카의 혁명적 생디칼리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초국가적 조직들의 역할, 특히 ‘세계산업노동자협회’(IWW)과 ‘국제사회주의동맹’(ISL)가 인종적 불평등에 대항한 투쟁의 조직화 안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강조했다. 쟁점은 “국가와 자본에 반대하고, 인종차별법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백인 인종주의에 굴복하거나, 인종주의적 차별을 무시하기 보다 몇몇 그룹들은 ISL, 특히 ‘아프리카 산업노동자협회’의 조력 하에, 남아프리카 문제를 국제주의에 적용했고, 유색인 노동자의 독립적 조합들을 여럿 구성하려 애쓰는 실천활동을 했다.”[63] 무정부주의적 실천과 이념의 순환은 아나키스트 운동에 정말 강력한 교조적 일관성을 보증했다. 이에 따라 영국 출신의 헨리 글라스(Henry Glasse)는 “런던의 아나키스트 서클과 접촉을 유지했다.”[64]
남아프리카 자본주의는 “식민지적 지배”와 인종주의에 “기반하고”[65] 있었다. 루시앙 반 데어 발트는 “1880년 경 생디칼리즘이 등장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포된 것과 유사한, 그리고 인종적 거부에 해당하는 ‘백인 노동 중심성’의 전통에 지배된, 백인 무역상들의 문제가 본질적”이라고 언급했다.[66]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역능에 고무된 진보적 특성은 투쟁의 원리들을 변형했다. IWW의 국제주의 이념의 영향은 특별히 남아프리카의 『노동의 목소리』(The Voice of Labour)를 통해 전달된 담론 안에서 알 수 있다.[67] 그 간행물의 편집장인 크로포드(Crawford)는 “백인 노동의 세계에서 만성적인 인종주의에 반대했다.”[68] ISL의 실천행동도 마찬가지로 “인종적 편견, 분할과 ‘인종주의적 과학’”[69]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무정부주의적 국제주의는 자본주의의 규칙에 순응한 노동자들을 규합해야 했던 급진적 조합주의적 투쟁와 아나키즘의 상호증진작용을 결합한다. 기존의 문제들(여기서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주의)을 국가방위의 일반적 원칙들에 통합하는 능력은 국제 사회주의자를 매우 다양하게 규정지었다. 그것은 정확히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특히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것들의 전복적이고 해방적 효과를 결합했다는 점을 가리킨다. 시앙 뷔른(Sian Byrne)과 루시앙 반 데어 발트가 주목한 바와 같이, 콩스탕스 방트망(Constance Bantman)의 연구에 따라, 무정부주의의 흐름은 원칙적으로 ‘제1 인터네셔널’을 잇는 지적이고 정치적인 열광의 순간에 조직된 것이며, “조합들, 정치 그룹들 그리고 클럽들의 결합”을 구성하고 “이에 따라 1864년에서 1877년 까지 기능했던 협동조합적인 것”의 구성으로 비춰졌다.[71]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순환(“자발적이면서 강요된” 이주를 통한 순환)과 신문잡지의 유통은 “이념들, 투쟁과 활동가 단위들에 관한 일람표의 변화”를 허용했으며, “역으로 그것은 국제적인 투사들의 공동체에 대한 결속과 신뢰”를 형성했다.[72]
그러한 그룹들의 구성은 복잡한 공유화의 양상에 근거하는 것이며, 망명이라는 특별한 결과에 따른 것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1880년과 1914년 상간에 런던에 있는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의 경우로서, 이것은 콩스탕스 방트망에 의해 연구되었다. 역사가는 우선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국제주의가 기초적인 팽창성에 따라 두루 퍼져 나갔다는 것에 주목한다. 프랑스에서 그러한 입장은 “1870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와 이후의 알사스와 로렌 지역의 병합에 관한 복수심 가득 찬 망상”[73]과 대결해야 했다. 1889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2 인터네셔널 회합”[74]에서 “사회주의자 연합”에 의해 방어되는 “총파업”에 관한 생각은 우선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을 물러나게 했다. 이들은 “맑스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개량주의의 기원”[75] 에 대해 검토했다. 그것은 “원년부터 메이데이 선언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방해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1895년 이후 총파업은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핵심 사안이 되었으며, 그 자격에 있어서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목표이자 상징이 되었다.”[76] 런던협회는 1881년에 무정부주의 운동을 정치적으로 구성하면서 어려운 점에 도달했다.[77] 아나키스트들의 자율적인 전진은 – 제2 인터네셔널에서의 배제 이후[78] – 무정부주의적 국제주의의 원칙을 더더욱 정확하게 규정하도록 했으며, 특히 반군국주의 위에서 그렇게 했다.[79]
콩스탕스 방트망은 파리코뮌과 그 “악랄한 법률들” 이후 영국으로 추방된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정당들의 유입을 구체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국제주의라는 “높은 위치로” 그러한 역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여러 상이한 “서클들”은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의 구분”에 조앙했다. 그리고 “하부 조직 투사들”과 “이론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행동주의자”에 속한 “아니키스트 엘리트” 간의 구분은 망명한 프랑스 무정부주의의 대조적인 풍경을 조직화했다. (특히 언어적 고립에 의해 동기 부여된) 상호적 자기성(L’entre-soi)은 기본적으로 그들 스스로 벨기에와 이탈리아 투사들과 교류를 했다는 것에 있다.[82] 콩스탕스 방트망은 국제주의적 아나키즘의 “이론과 모델”[83]을 순환시키기 위한 “형식적인 제도적 틀”의 부재를 역설하는 것이다.
역사적 연구는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은데, 그것은 세부적으로, 무정부주의 담론과 실천의 초국가성이 출현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전지구적 단계에서 이데올로기적 틀거리를 들여 놓는다.[84] 그렇기에 데이비드 투르카토(David Turcato)는 19세기 말의 이탈리아 아니키즘과 20세기 초의 그것 사이에 연결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조합주의적 무정부주의 출판인인 죠프루아 라포카드(Geoffroy Laforcade)와 키르벵 샤퍼(Kirvin Schaffer)[86]는 그것들을 라틴 아메리카 아나키즘에 대한 여러 연구들과 재결합한다. 또한 케년 짐머(Kenyon Zimmer)[87]는 이디쉬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연구들의 다양성은, 사회주의의 전지구화 안에 아나키즘 국제주의의 특이성을 재정립하도록 한다. 이 이중적 운동은 대조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구성을 대해 알게 했지만, 그와 동시에 순간적이거나 항구적인 것들의 일치점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예컨대 총파업은 투쟁의 특별한 양태 주위의 전복적인 힘과 해방적 힘의 일반적 통일성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주석]
1. Trotski à Voline, avril 1917, cité dans Guérin Daniel, Ni Dieu ni Maître. Anthologie de l’anarchisme, Paris, La Découverte, 2012, p. 551
2. 이러한 재생작업은 수량화될 수 있다. 우리가 세어본 바에 따르면, 2000년과 2016년 사이에 106개의 학위논문의 주요 연구 대상이 아니키즘과 그것의 구성, 쇠락에 관한 것이었는데 [...] 이는 26개의 박사논문을 포함하여 프랑스어권 대학에 지원하에 작성된 것이다. 일단 최근의 기념비적인 48개이 주요한 연구들을 나열하면, 정치학에서 14개, 문학에서 9개, 사회학에서 7개 그리고 철학에서 4개 정도의 논문들이 있을 것이다. 앵글로-색슨권에서는 아나키즘 연구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주제로 진정한 과학적 역동성이 일구어지고 있는 바, 수업 시간, 콜로키움, 저널의 특집호 그리고 점점 더 불어나는 연구논문과 박사 학위 논문이 그것을 증명한다.
3. Gilles Gérard, « Problèmes d’anthropologie libertaire (suite )», Recherches libertaires, n° 4, 1977, p. 1.
4. Clastres Pierre, La Société contre l’État. Recherches d’anthropologie politique, Paris, Éditions de Minuit, 1974, p. 162.
5. Ibidem, pp. 164-165.
6. Ibidem, p. 168.
7. Ibidem, p. 169.
8. Ibidem, p. 170.
9. Sahlins Marshall, Âge de pierre, âge d’abondance. L’économie des sociétés primitives (1972), Paris, Gallimard, 1976, p. 172.
10. Ibidem, p. 173.
11. Scott James C., Homo Domesticus. Une histoire profonde des premiers États, Paris, La Découverte, 2019, p. 101.
12. Graeber David, Pour une anthropologie anarchiste, Montréal, Lux, 2018, p. 80.
13. Ibidem, p. 82.
14. Ibidem, p. 84.
15. Ibidem, p. 88
16. 최근의 연구를 보기 위해서는, Accolas Sophie, Durieux Jacob, Planeix Ariel, « Anthropologie et anarchisme », Journal des Anthropologues, n° 152-153, 2018, pp. 15-24을 참고하라.
17. Pelletier Philippe, Réseau de géographies libertaires. Bref historique, 2015. URL: https://rgl.hypotheses.org/files/2015/10/Historique-RGL.pdf.
18. Federico Ferretti et Philippe Pelletier, « Sciences impériales et discours hétérodoxes: Élisée Reclus et le colonialisme français», L’Espace géographique, t. 42, 2013, p. 9.
19. Idem.
20. Ferretti Federico, « Un regard hétérodoxe sur le Nouveau Monde: la géographie d’Élisée Reclus et l’extermination des Amérindiens», Journal de la société des américanistes, t. 99, n° 1, 2013, pp. 141-164.
21. Clarck John P., Comment un anarchiste a découvert la Terre suivi d’Éducation pour la Terre ou éducation pour l’Empire, Lyon, Atelier de Création Libertaire, 2019, pp. 12-13
22. Merriman John, The Dynamite Club. How a Bombing in Fin-de-Siècle Ignited the Age of Modern Terro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6, p. 10.
23. Manfredonia Gaetano, «La chanson anarchiste dans la France de la Belle Époque. Éduquer pour révolter», Revue Française d’Histoire des Idées Politiques, n° 26, 2007, p. 344.
24. Manfredonia Gaetano, «L’imaginaire utopique anarchiste au tournant du siècle », Cahiers Jaurès, n° 180, 2006, p. 44.
25. Beaudet Céline, Les Milieux libres. Vivre en anarchiste à la Belle Époque, Oléron, Éditions Libertaires, 2006; Legendre Tony, Expériences de la vie communautaire anarchiste. Le milieu libre de Vaux (Aisne), 1902-1907 et la colonie naturiste et végétalienne de Bascon (Aisne), 1911-1951, Oléron, Éditions Libertaires, 2006.
26. Baubérot Arnaud, «Les Naturiens libertaires ou le retour à l’anarchisme préhistorique », Mil Neuf Cent. Revue d’histoire intellectuelle, n° 31, 2012, pp. 117-12; Baubérot Arnaud, « Aux sources de l’écologisme anarchiste. Louis Rimbault et les communautés végétaliennes en France, dans la première moitié du xxe siècle », Le Mouvement Social, n° 246, 2014, pp. 63-74.
27. Colloque James Guillaume. L’émancipation par les savoirs, organisé par l’université de Genève les 24 et 25 novembre 2016. Le actes paraîtront en 2019 aux éditions Libertalia.
28. Morel Fontanelli Françoise, Le Mouvement anarchiste italien en exil dans le sud-est de la France durant l’entre-deux-guerres: Pio Turroni, une approche biographique, Thèse de doctorat en histoire sous la direction d’Isabelle Renaudet, université Aix-Marseille, 2016.
29. Gomez Freddy (dir.), Gustav Landauer, un anarchiste à l’envers, suivi de Douze écrits « anti-politiques» de Gustav Landauer, Paris, Éditions de l’Éclat, 2018.
30. Bourel Dominique, Martin Buber. Sentinelle de l’humanité, Paris, Albin Michel, 2015.
31. Ackelsbert Martha A., Free Women of Spain. Anarchism and the Struggle for the Emancipation of Women, Oalkand, AK Press, 2005.
32. Mintz Frank, Anarchism and Worker’s Self Management in Revolutionary Spain, Oakland, AK Press, 2013.
33. Eric J. Hobsbawm, Revolutionaries. Contemporary Essays, Londres, Phoenix, 1973, p. 57. (우리는 논문 안에서 영어로 된 인용문 전체를 새로 번역했다.)
34. Ibidem, p. 58.
35. Idem.
36. Idem.
37. Idem.
38. Ibidem, p. 59.
39. Ibidem, p. 62.
40. Ibidem, p. 63.
41. Ibidem, p. 69.
42. Angaut Jean-Christophe, «Le conflit Marx-Bakounine dans l’Internationale: une confrontation des pratiques politiques», Actuel Marx, n° 41, 2007, pp. 112-129.
43. Ibidem, p. 116.
44. Ibidem, p. 118.
45. Ibidem, p. 119.
46. Idem.
47. Ibidem, p. 120.
48. Ibidem, p. 121.
49. Ibidem, p. 128.
50. Kinna Ruth, Prichard Alex, «Introduction », dans Alex Prichard, Ruth Kinna, Saku Pinta, David Berry (dir.), Libertarian Socialism, Politics in Black and Red, Londres, Palgrave Macmillan, 2012, p. 6.
51. Ibidem, p. 6.
52. Garcia Renaud, La Nature de l’entraide. Pierre Kropotkine et les fondements biologiques de l’anarchisme, Lyon, ENS Éditions, 2015.
53. Kinna Ruth, «Fields of Vision: Kropotkin and Revolutionary Change », SubStance, vol. 36, n° 2, 2007, p. 76.
54. Ibidem, p. 76.
55. Ibidem, p. 77.
56. Ibidem, p. 78.
57. Voir Meier Paul, La Pensée utopique de William Morris, Paris, Éditions Sociales, 1972; et Brown Tony (dir.), Edward Carpenter and Late Victorian Radicalism, Londres, Franck Cass, 1990.
58. David Berry, «“Fascism or Revolution !” Anarchism and Antifascism in France, 1933-39 »,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vol. 8, n° 1, 1999, p. 51.
59. Ibidem, p. 52.
60. Ibidem, p. 66.
61. Ibidem, p. 68.
62. Colson Daniel, «L’anarchisme, la guerre d’Espagne et les discontinuités de l’histoire », Lignes, n° 16, 2005, p. 7.
63. Lucien van der Walt, « Bakunin’s heirs in South Africa: race and revolutionary syndicalism from the IWW to the International Socialist League, 1910-21 », Politikon, vol. 31, n° 1, 2004, pp. 69-70.
64. Ibidem, p. 70.
65. Ibidem, p. 72.
66. Idem.
67. Ibidem, p. 73.
68. Ibidem, p. 74.
69. Ibidem, p. 78.
70. Bantman Constance, The French Anarchists in London, 1889-1814. Exile and Transnationalism in the Firts Globalisation, Liverpool,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13.
71. Byrne Sian, van der Walt Lucien, « Worlds of Western Anarchism and Syndicalism: Class Struggle, Transationalism, Violence and Anti-imperialism, 1870s-1940s», Canadian Journal of History, Annales canadiennes d’histoire, vol. 50, n° 1, 2015, p. 98.
72. Ibidem, p. 99.
73. Bantman Constance, «Internationalism without an International? Cross-Channel Anarchist, 1880-1914 », Revue belge de philologie et d’histoire, t. 84, fasc. 4, 2005, p. 964.
74. Ibidem, p. 964.
75. Idem.
76. Idem.
77. Ibidem, p. 966.
78. Ibidem, p. 967.
79. Ibidem, p. 968.
80. Ibidem, p. 969.
81. Ibidem, p. 971.
82. Ibidem, p. 970.
83. Ibidem, p. 980.
84. 다음 두 개의 논문을 종합적으로 참고하라. Paola Pietro, « Anarchism and Transnational Networks in North and South America », Labour/Le Travail, n° 81, 2018, pp. 245-264, et Byrne Sian, van der Walt Lucien, « Worlds of Western Anarchism and Syndicalism », art. cit,
pp. 98-123.
85. Turcato David, «Italian Anarchism as a Transnational Movement, 1885-1915 »,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 vol. 52, n° 3, 2007, pp. 407-444.
86. Laforcade Geoffroy, Shaffer Kirwin (dir.), In Defiance of Boundaries. Anarchism in Latin American History, Gainesville, University Press of Florida, 2015.
87. Zimmer Kenyon, Immigrants Against the State. Yiddish and ItalianAnarchism in America,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