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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Nov 14. 2019

강렬하게 가속하고 변조하라!

- 들뢰즈, 시몽동, 가속주의

*원문서지사항: 'A Politics of Intensity: Some Aspects of Acceleration in Simondon and Deleuze, Deleuze Studies 11.4,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7, 498-517


강도의 정치학: 시몽동과 들뢰즈에 있어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1]  


육 후이(Yuk Hui, 로이파나 대학Leuphana Universität Lüneburg)]

루이 모렐(Louis Morelle, 파리1 대학Université Paris 1)  



◎ 논문 초록 ◎ 
이 논문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사유에서 속도와 강도의 문제를 명료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가속주의(accelerationism)와 그것의 정치학과 연관된 최근의 논쟁들을 조명하기 위함이다. 성급하게 시작하는 대신, 우리는 강도의 문제를 들여다 보고, 그것이 시몽동과 들뢰즈의 철학과 정치학 안에서 새로운 존재론적 기초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필 것을 제안한다. 시몽동은 강도 개념을 질료형상론(hylomorphism)과 실체주의(substantialism)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시몽동의 개념틀을 취해, 그의 차이의 철학을 위해 그것을 재정향한다. 그는 차이의 생산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에 기대어 강도를 존재에 관한 발생적 개념의 수준으로 올려 놓으면서, 부정성과 개체 관념을 우회하는 기초로 활용한다. 들뢰즈에게서 강도와 속도 간의 상호관계는 애매함이 상당한 것으로서,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을 포괄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러한 제어하기 힘든 긴장은, 현대 가속주의의 다양한 사유들에 취해질 때, 분명히 적대적인 것이 되며, 그 결과 포스트휴먼 담론에서의 두 가지 극단적인 사례를 야기한다. 하나는 어떤 순수 생성으로서 해체 또는 강도를 폐기한 추상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운동이나 속도 없는 강도로서, 이것은 여전히 어떤 순수한 향유(jouissance)로 남아 있다. 두 경우 모두, 만약 비개체화가 아니라면, 개체화의 문제를 무시하고 넘어 간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우리가 강도와 더불어 가속주의 정치학에 대해, 또는 속도의 물신화(fetishisation)를 거치지 않은 어떤 강도의 정치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가속과 포스트휴먼 담론의 한계 지점을 재우쳐 물어가는 과정의 중심에 놓으면서, 강도와 속도에 기반한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요청하고자 한다. 
- 키워드: 강도, 가속주의, 개체화, 기술, 시몽동, 들뢰즈  


만약 존재에 대한 사유가 강도에 대한 사유를 요청한다면, 본질적으로 역동적인 존재를 사유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보편적인 운동이 이끌어가는 지점은 어디인가? 강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논문은 질 들뢰즈와 질베르 시몽동의 저작들을 통해, 두 사상가를 횡단하는 개념으로 가속의 이념을 설정함으로써, 형이상학과 강도의 정치학 사이에 있는 관계를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강도의 개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들뢰즈와 시몽동 간의 교전(encounter)의 평면을 좇아 가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강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가속에 대한 여러 개념들을 도출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가속’이라는 말은, 최근의 철학적 논쟁들에서 유명해지고 있는데, 여러 가지 현상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최근의 역사에 있어서 일련의 정치적, 과학적, 특히 기술적인 변형들을 의미하며, 그러한 변형들의 리듬(rhythm)을 강조하는 것이다(see e.g. Rosa 2013[2]). 따라서 다소 메시아적인 톤 안에서 ‘가속’은 ‘특이성’(Singularity)으로 명명되는 역사의 기술적 종말을 이끄는 것으로, 이러한 변형을 성찰하는 데 활용된다. 이것은 또한 ‘가속주의’라고 명명된 아방가르드적인 정치학이라는 특별한 사조를 지칭하기도 한다. 가속주의는 정치적 행동이라는 수준에서 이러한 변형들을 조응시킬 것을 제안한다. 가속주의의 최후의 형태라고 할 만한 이것은 무엇보다도 들뢰즈적 사유 안에서 그 계보를 추적한다. 가속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철학적, 기술적 그리고 정치적 계열들의 복잡한 연계는 그 전개의 질서 안에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어떤 개념적 해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시몽동에 대한 일련의 독해를 통해, 우리는 가속 개념을 조명하고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강도와 가속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분석은 어떤 방식으로 가속주의 정치학에 대한 최근의 논의, 특히 들뢰즈적 계보와 관련한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선 강도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고, 이것이 시몽동의 불균등성(disparation)에 대한 사유에서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difference)에 관한 사유에서 스스로를 표명한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강도라는 개념은 두 철학자들이, 강도를 통과하는 개체화라는 이론에 기대어 존재에 관한 완고한 범주들, 이를테면 아프리오리[선험적]한 능력들의 구성적 힘과 같은 범주들을 넘어서 사유하도록 한다. 두 번째 절에서 우리는 혁명적 정치학에 있어서 들뢰즈의 ‘가속주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통제 사회에 대한 후기」에서 밝힌 바, 자본주의 권력의 지평에 대한 그의 나중의 문제의식과 대조를 이루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기술에 핵심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세 번째 절에서는 시몽동의 가속 개념이 가속에 관한 여러 가지 여타 이해방식들과 어떻게 다른지 보게 될 것이다. 네 번째 장에서는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가 시몽동에 관한 그의 독해에서 ‘혁명의 과학’이라고 부른 것을 더 멀리 발전시키고, 앞서의 절들에서 우리가 논의했던 것을 종합함으로서 토스카노의 프로그램에 대한 성찰의 이런저런 입지점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I. 존재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강도

강도는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의 중심 요소를 구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도는 속도와 비선형적 가속으로 증식하는 어떤 양태를 생산한다. 시몽동은 이러한 증식의 형식을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부른다. 시몽동의 개체 개념이 목표로 하는 바는 생성과 존재의 일치이며, 따라서 과학과 기술에 대한 당대의 이해를 수용하는 새로운 방식의 철학하기(philosophising)를 허용하는 것이다. 시몽동은 개별체들(individuals) 보다 개체화(individuation)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개별체는 결코 안정적(stable)이지 않고, 오히려 준안정적(metastable)인 것, 즉 어떤 끊임없는 개체화의 과정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개체적인 것(the pre-individual) – 개체화에 의해 소진될 수 없는 잠재적인 것 - 을 함께 생각해 본다면, 개체화의 새로운 순환이, 어떤 결정적인 안정화 없이 영구적으로 발생된다.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다. 질료형상론은 형상(morphè)과 질료(hylè)를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직관적 모델로 고려하는 것이다(Simondon 2005[3]). 시몽동이 이 질료형상론을 기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와 생성의 조화에 실패함으로써 존재를 생성에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시몽동의 전략은,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의 첫 페이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주형(mould, 형상을 부여하는 것)과 변조(modulation) 개념을 대립시키는 것이다(2005: 45–8). 주형이 고정된 개념으로서, 비형상적인 질료 위에 선결정된 형상을 각인시키는 것인 반면, 변조의 과정은 정보를 실어 나르는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역동적인 상호반응의 과정을 거쳐 기능한다. 시몽동은 이 사례로 벽동-공정 과정을 들고 있다. 질료형상적인 사고에서 이것은 주형에 따라 형상이 잡히고 부서지는 진흙으로 이해된다(즉, 주형은 형상으로 존재하고, 진흙은 질료로 존재한다). 변조적 사유에 따르면 이 벽돌-공정은 조정적인 것, 즉 상이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여기서 요인들이란 주형의 벽, 진흙의 성분들, 노동자의 손, 진흙의 습도, 온도 등등이다. 벽돌-공정은 이 경우에 어떤 정보의 변조로 파악된다.


개체화는 개별자와 여러 다양한 환경과의 관련성 안에서 내적 역동성에 따라 결정된다. 시몽동이 그의 개체화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참조하는 예시는 과포화(supersaturated) 용액의 결정화다. 과포화 용액은 일정량의 용해 물질이 용매(solvent)가 제공할 수 있는 정상량을 넘어서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염화 나트륨(소금)의 과포화 용액을 생각해 보자. 적은 양의 에너지(예컨대 열)가 용액에 주어질 때, 결정화 과정은 에너지와 정보가 변환적으로(transductively) 증식하면서, 이에 따라 결정 씨앗들이 형성되고 또한 과정을 가속하기 위한 열을 방출하기 시작한다(Simondon 2005: 77–84). 시몽동(1960[4], 2005)은 결정화를 물리적 존재, 생명체 그리고 심리적 존재의 개체화 간의 어떤 유비로 창조함으로써, 이것을 개체화의 일반적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유비가 비록 의문스럽긴 하지만, 개체화의 근본적인 이미지로 제공되는 것이다.

Gilbert Simondon(1924~1989)

여기서 변환이란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에서 속도의 동의어다. 그것은 고적 논리학에 속한 귀납(induction[유도])과 연역(deduction[공제])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전 논리학은 명제들의 추론 위에서 작동하지만, 변환은 질문에 속한 존재 구조의 변형을 이끈다. 변환은 긴장들과 양립불가능한 것들에서 초래되는 강도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지배된다. 우리는 그의 주저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정보와 관련된 형상 그리고 강도와 관련된 정보, 또는 그가 의미규정한 대로 불균등성으로 읽어가는데 놓여 있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멀리까지 이 개념을 밀어붙일 수 있다. 불균등성은 개체화의 조건이며, 물리적, 생명적, 심리적 존재자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정화에 대응하는 생명체의 예는 망막상의 자기-교정을 들 수 있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최종적인 [시각] 이미지는 좌측과 우측 망막상 사이의 비평형성과 양립불가능성의 해결인 것이다. 둘 사이의 불균등성은 연속성과 지각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해결을 요구하게 된다. 


들뢰즈는 강도 개념을 그의 『차이와 반복』에서 전개한다. 그는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을 재전유하고, 그것을 강도와 명쾌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더 멀리까지 가져간다. “개체화는 강도가 분화의 선을 따라 그리고 그것이 창조하는 질과 연장들 안에서 현행화되는 미분적 관계들을 결정하는 행위과정이다”(Deleuze 1994[5]: 246)[6]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개체화는 강도에 의해 생산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과포화 용액을 닮았는데, 여기에는 둘을 이어주는 실마리가 있다. 즉 개체화 과정이 결정 씨앗 주위에 출현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된다는 것이다. 시몽동과 비교해서 들뢰즈는 차이에 관련된 강도의 특성들을 명확히 정의한다. 강도는 차이 자체라는 것이다(222). 


시몽동의 강도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반면, 들뢰즈의 목표는 칸트의 감각과 지성 개념에 대한 비판에 놓인다.[7] 칸트에 반대하면서, 들뢰즈는 지각이 순수 직관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도, 지성의 범주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라, 구조적 생성에 뒤따르는 감각적인 것의 강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칸트의 순수 직관은 외연적인 질들이고, 그러므로 그는 이미 주체의 지각의 계기에 기반하여 시간과 공간이 재현들[표상들]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모든 직관들을 외연량들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양들은 부분들의 표상이 필연적으로 전체의 표상에 앞서게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은 표상되거나 재현될 때처럼 현전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전체의 현전이 부분들의 가능성을 근거 짓는다. 이때 부분들은 잠재적인 것들에 불과하고 단지 경험적 직관의 규정된 가치들 안에서만 현행화된다. 외연적인 것, 그것은 경험적 직관이다. 칸트는 시간은 물론 공간에 대해서도 어떤 논리적 외연을 거부하지만, 칸트의 실수는 그러는 동안에도 기하학적 외연을 유지한다는 것이고, 강도량을 이런저런 정도에서 주어진 연장성을 채우는 질료를 위해서만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Deleuze 1994: 231; [Kor. 495, 번역수정]) 


차이로서의 들뢰즈적 강도는 시몽동이 텐션(tension)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자연’과 ‘전개체적인 것’[8]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들뢰즈는 강도를 잠세적(virtual)이고 잠재적(potential)인 것이라고 본다. 물질은 데카르트의 왁스나 스펀지의 예와 같이 공간에 관해 측정될 수 있는 외연적 질들로 환원될 수 없다. 외연적 질과는 반대로, 강도량(intensive quantity)은 그 존재의 특이성(singularity)을 가리키고, 다양한 단위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31℃는 10+21이나 1×31이 아니라, 그 자체 단일한 정도이다. 같은 것이 속도와 가속도에도 적용된다. 이것들은 매번 본성의 변화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는 강도량들이다 (Deleuze and Guattari 1987[9]: 483). 칸트가 시간과 공간을 직관 안에서의 외연양으로 개념화한 것은 강도량을 고려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있는 강도에 대한 질문, 즉 칸트가 ‘지각의 예취’(anticipation of perception)라고 부른 것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칸트는 질의 범주 안에 그와 같은 예취를 놓는다. 즉 “모든 현상에서 감각의 대상인 실재적인 것은 강도적 양( intensive magnitude) 즉 하나의 정도(degree)를 가진다”(Kant[1781] 1996: B208). 실재적인 것의 강도적 양은 여과장치처럼 작동하는 수학적 원리들에 의해 결정된다. 들뢰즈는 그의 강도에 관한 이해를 네 가지 칸트적 범주들 중 하나에 제한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그것을 시몽동의 관계 형이상학에 결합하여 더 멀리까지 가져감으로써, 양 뿐 아니라 두 가지 역동적인 범주들인 관계, 양상과도 결합하려고 했다.

 

강도는 그러므로 들뢰즈가 초월론적인 장으로부터 떠나, 내재성의 장으로, 재현의 논리로부터 강도의 논리로 들어가도록 해 준다. 이러한 변형은 초월론적 원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이에 의해 규제된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안 소바냐르그(Anne Sauvagnargues, 2009: 319)가 보여준 것처럼, 차이가 어떤 초월론적 원리가 된다. 시몽동, 들뢰즈 양자의 사유에서 강도를 통한 형이상학의 재구성은, 현대 과학들 – 발생학, 지질학, 지각이론 등등 – 에서의 발견을 통해 날개를 달게 되었으며, 새로운 형이상학, 즉 고전적 의미에서의 존재론이라기 보다는 존재발생론(개체발생론, ontogenesis)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법한 것을 개괄했다. 

 

II. 들뢰즈의 '가속': 강도에서 변조로 

이러한 강도의 존재론은, 존재와 생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향해 정향되면서, 가속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게 된다. 이 개념은 일반적 개체화 과정의 필연적이면서도 일시적인 단계를 표시한다. 만약 이 존재론적 패러다임이 그와 같은 것을 통해 나온다면, 이러한 가속 단계와 보다 일반적인 강도의 구조[틀거리] 사이의 관계성을 초래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분석에 어떤 강력한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질문은 ‘강도의 일반개념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역사적 과정과 관련된 주제들을 합당하게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가?’라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가속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강도의 패러다임을 자본주의와 기술적 과정의 운행의 이해에 사용하기 위해 어떻게 배치할 수 있게 하는가?’가 된다. 


기초적 의미에서, 강도와 가속은 개체화 안에서 상호관련된다. 왜냐하면 강도는 구조적 변형을 향해 움직여 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강도에 관한 시몽동과 들뢰즈의 기획 사이의 주목할 만한 분화가 발생한다. 즉 시몽동이 강도를 어떤 발생적 과정(개체화)의 관건적인 요소로 파악하는데 반해, 들뢰즈는 강도를 차이에 따른 존재의 명칭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두 가지 경로는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과정에서 강도의 역할을 이해하는 상이한 방식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시몽동은 가속과 과정을 다루는 데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에게 그것들이 개체화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에 긴박된 채 남아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범역 안에서 개체화의 단계들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강도를 질적 지속의 근원으로 파악하는데 (Deleuze 1994: 238–9), 이를 통해 그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와 더불어 작업하면서, 흐름과 욕망(즉 강도의 특수한 변형들)을 함축하는 역사적 전개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그들은 혁명이란, 일반적인 흐름 또는 과정에 대한 반응적 대립보다는 그들이 ‘탈영토화’라고 명명한 바, 강렬도의 강세화(accentuation of intensification)에 의해 획득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Samir Amin(1931~2018)


어떤 혁명적 길이 있을까? 하나라도 있을까? 사미르 아민이 제3 세계 나라들에 충고하듯, 세계 시장에서 파시스트적 ‘경제해법’이라는 기묘한 갱신 속으로 퇴각하는 것?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말하자면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더욱더 멀리 가는 것? 왜냐하면 아마도 고도로 분열적인 흐름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영토화되지도, 탈코드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경과[과정]에서 퇴각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 니체가 말했듯이, ‘경과[과정]을 가속하라.’ 사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Deleuzeand Guattari 2004[10]: 239–40; Kor. 406) 


이러한 제안은 주류 좌파 전략의 급진적 비판을 의도하는 것으로서, 산업 자본주의의 동력학을 겨냥하는 비판적 신중함보다는, 정치학의 가속주의적 실행이 고무되어져야 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경향이 자본주의 자체를 탈구시킬 수단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Deleuze and Guattari 2004: 34). 이 개념은 자본주의 생산 체계로부터의 탈출을 위해서는 심대하게 애매한 프로그램임에도 들뢰즈와 가타리의 독자들에게 어떤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11] 이것은 또한 최근 여러가지의 또는 심지어 전혀 반대되는 가속주의적 제안에 있어서 분석의 핵심사항이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상가들을 들자면, 한편에는 닉 랜드(Nick Land, 2014[12])가 있는데, 그는 기술적으로 추동되는 반국가통제주의와 비인간(inhuman) 자본주의를 옹호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알렉스 윌리암스(Alex Williams)와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가 있으며, 이들은 ‘가속주의 정치학을 위한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2014 [이하 ‘가속주의 선언’-역자])에서 후기 자본주의를 특징 짓는 경제적 기술적 변형들을 적절히 다루기 위해 정치적 행위주체의 강렬도를 앞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이들 가속주의 프로그램들에 대한 합당한 분석을 제시하려면, 강도의 정치학의 주요 형식으로서 들뢰즈 자신의 가속에 대한 분석으로 더 깊이 탐구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앙띠 오이디푸스』의 중심 주제는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욕망(정치화된 강도의 이름으로서, 원초적이고 도처에 존재하는 것)과 밀접하다는 것, 그리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 둘 모두이다. 자본주의 질서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욕망을 길들임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적, 정치적 질서들을 해체해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들을 해방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의 한계[극한] 및 자본주의의 해체 가능성을 정의하는 사회적 조건들에서만 그러하며,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신을 한계[극한]로 밀어붙이는 운동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거역한다”(Deleuze and Guattari 2004: 139–40 [Kor. 245-46]) 이 한계[극한]은 바로 분열자가 경험하는 기관 없는 신체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질서로부터 어떤 외부의 가능성을 개방한다. “분열자는 혁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분열적 과정은 [...] 혁명을 위한 잠재력이다”(341)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앙띠 오이디푸스』에 기술된 가속의 지평은 이 한계 너머로 욕망, 강도의 흐름이, 자본주의 자신에게 자신의 기본적 과정에 대한 통제의 무능력을 되돌려주면서 범람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정치학은 권력이 발명될 수 있는 재영토화의 구조로부터의 격절을 향해 가는 다양한 방법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탈주의 가능성에 전념하는 한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제안은 로빈 맥케이(Robin Mackay)가 다음과 같이 공식화한 것처럼 욕망에 관한 가속주의적 형이상학이라는 식의 적확한 비판의 희생물로 전락하게 된다. “가속주의의 결정적 실수는 자본에 의해 열어 젖혀진 탈영토화의 지평 위에서, 권력의 제도화된 구조들로부터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폐쇄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Mackay 2015[14]: 238)[15].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할 만 하다. 들뢰즈가 그의 저작을 통해 욕망과 강도의 형이상학을 전개하는 동안, 그의 ‘가속주의적 기획’은 여러 해를 거쳐 배경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 데, 우선은 그것이 『천의 고원』에서는 욕망하는 기계에 속하는 배치의 개념으로 대체되고, 이후에는 비판적이면서 반성적인 개념이 된다는 점이다.


사실상 『앙띠 오이디푸스』에서의 열정과 열광과는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이후의 텍스트인 「통제사회에 대한 후기」(1992)에서는 신중하고 심지어 의기소침한 결론들이 등장하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Noys 2012[16]: 71). 경력의 막바지를 향해 가는 중에 쓰여진 이 짧은 글에서 들뢰즈는 푸코에 관한 그의 이전 작업에 기반하는데, 거기서 들뢰즈는 19세기에 통치성의 사회로부터 훈육 사회로의 이동에 관한 푸코의 기술을 취하여, 우리가 이제 통제 사회에 도달했다는 이론들을 전개한다. 들뢰즈는 푸코의 이론에 어떤 ‘돌연변이 변형’(mutation)을 부가하는 바, 그것은 이 새로운 사회적 권력의 단계가 새로운 작동형태로의 전환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회는 더 이상 닫힌 공간을 통해 작동하지 않으며, 거기서 권력은 노골적이지도 직접적이지도 않게 (푸코가 죄수들에 관한 그의 저작에서 철저하게 분석했던 통제의 형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들 위에 제약을 부과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초기 저작에서 분석된 자본주의의 일반적 동학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마침내 갱신된 접근을 요구할 만큼 기술적이고 사회적 재영토화의 양태(mode)가 중대한 전환을 노정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개체들을 위한 공간의 창조를 통해 작동하는 통제의 유형에 직면하고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겉보기의 자유를 즐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그 활동과 창조의 생산물들이 외부로부터 장착된 힘의 논리를 따르는 한에서 창조하며 거기 연루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이행을 시몽동의 용어들로 기술한다. 통제의 첫 번째 형태는 – 직접적 간섭으로서 – 주형 만들기(moulage)와 흡사하며, 반면 두 번째 통제의 형태는 변조(modulation)라는 개념으로 기술된다.[17] 변조는 강도와 관련하여 기능하기 때문에, 통제 사회의 기술이 개체화 과정 그 자체를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즉 욕망, 심리적 힘, 사회적 관계 심지어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강도들은 규제에 쉽게 걸려든다. 이러한 개체화의 기술적 측면은 「후기」 이전에는 들뢰즈에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이때에 와서 비로소 들뢰즈가 강도의 변조를 존재론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어떤 구별되는 정치적인 기제로 급진적으로 추동하는 것으로 보인다.[18] 


현대 기술-정치적 패러다임의 비판적 분석 안에서 들뢰즈의 시몽동 개념의 응용과 적용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획기적이다. 우선 그것은 정치적 기반 위에서 시몽동의 기술적 저술들에 대한 어떤 중요한 (만약 신중하게 분별한다면) 재평가를 함축한다. 가타리를 만나기 전의 들뢰즈는 시몽동의 저작으로부터 개체화에 대한 의미심장한 영감을 취한 반면, 기계라는 그의 후기 개념은 그의 저작에서 가타리의 중심적 역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기술과 기술론에 관한 시몽동의 저작과는 많이 구분되는 발전 양상을 보여주었다. 즉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사용되는 기계라는 개념[19]은 기술적 개념 보다 횡단적인 개념이다. 이 틀거리 안에서 기계란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치(리비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장으로부터 추출된 것; Deleuze and Guattari 2004: 32–3을 보라)이며, 이는 기계에 대한 엄격한 기술적 접근에 있어서 어떤 주변화된 것을 수반한다(Deleuze and Guattari 1987: 398–400). 이로써 들뢰즈와 가타리는 시몽동의 분석으로부터 꽤나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 어떤 암시적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바냐르그는 이를 시몽동에 대한 논박적(polemical) 단계의 결여라고 명명한다. 이 단계는 들뢰즈의 철학 개념에서 중심적인 것이다(Sauvagnargues 2009[20]: 255–6). 즉 시몽동의 개체화는, 차이에 관련된다기 보다, 존재발생론(개체발생론)으로서 중립화된다. 그리고 개체화 안의 문제틀만이 있을 뿐(왜냐하면 여기에 변환적 과정transductive process이 개시될 수 있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개체화의 문제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시몽동이 ‘비개체화’(disindividu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는 어떤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개체화의 단계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이 단계 안에서는 의문시되는 존재의 앞선 구조가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위해 사라진다.[21]


정치적 주제에 대한 시몽동의 상대적인 거리감은 들뢰즈가 그의 사유에서 기술적 주제에 대해 보이는 생략의 거울상처럼 보인다(Toscano 2012[22]; During 2006[23]을 보라). 이런 내용은 「후기」에서는 전적으로 삭제된다. 정치적, 기술적 그리고 존재론적 목록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구분불가능하게 된다. 즉 포스트-포디즘적 자본주의는 실존의 새로운 체제로서, 욕망하는 기계가 ‘보편적 변조’라는 공상과학적인 악몽으로 전환해 버린, 정확히 그러한 생산물들로 보이는 한에서, 그것의 기술적 생산물들과 멀리 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정치 사상가로서의 들뢰즈는 형이상학자로서의 들뢰즈와 맞선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생산과 권력에 관한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적 이해를 위한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는 한에서, 기술에 대한 시몽동의 접근으로의 전환이 요청되는 것이다.


III. 또 다른 '가속': 내적 공명으로서의 강도 

시몽동의 저작에서 가속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보(progress)라는 개념을 통해 단언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그의 저작 안에서] 매우 국지화되어 있다. 반면 그의 저작에서 감속(deceleration)과 관련된 직접적 진술은 발견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술적 발전에 관한 질문을 향한 신중하고, 거의 보수적인 접근이 존재한다. 시몽동은 여기서 개체화와 인간적 진보 간의 유비에 의지하는데, 인간적 진보는 순환주기들, 즉 상이한 기술적 발전들에 의해 특성화되는 순환주기들과 관련하여 이해 가능해지거나 ‘객체적[대상적] 구체화’(objective concretisations)에 의해 이해된다고 본다(Simondon 2015[24]를 보라). 시몽동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지만, 그의 기계학(mechanology)은, 노동자와 기술적 생산장치 간의 관계를 소외로 이해함으로써, 그 소외에 대한 저항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이것은 소외에 대한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정의, 즉 노동자와 그 또는 그녀의 노동생산물 간의 소외라는 정의와 역전된 관점을 보인다). 시몽동에게 소외란 단순히 노동자의 소외일 뿐 아니라, 기술적 대상 자체의 소외이기도 하다(이를테면, 노예처럼 다루어짐으로써).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On the Mode of Existence of Technical Objects)는 바로 이 질문으로 시작되는바, 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소외의 증폭 요인(amplifying factor)으로 묘사된다. 반면 산업 사회의 근본적인 소외는 기술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 놓여 있다. 시몽동은 오직 인간-기술 관계의 적합한 이해에 의해서만 우리는 노동자와 소외를 구성하는 생산수단 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논증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몽동이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에 있는 정치경제학의 질문에 무지하다고 논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몽동의 기술 분석들과 그의 기계학에 관한 전망은 최근의 가속주의의 이론적 접근들에 대한 몇몇 비판적 성찰들을 제공한다.[25]


뒤로 돌아가서, 우리는 강도에 관한 질문이 시몽동의 기계학에서 분명한 장소를 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강도의 문제가 전 저작에 걸쳐 내재해 있는 들뢰즈와는 달리 시몽동은 가끔식 그의 기술적 대상들에 관한 이론과 그의 형이상학이 충분히 통합되지 않은 채 불화한다. 우리가 다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바는 시몽동이 기술적 대상들의 ‘구체화’(기술적 대상들 안에 있는 인과적 기제가 점점 더 물질화되어 구체적 실체(concrete)가 되는 과정[26])라고 명명하는 것의 가속이 필연적으로 진보를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와 같은 가속은 인간을 더 나쁜 소외의 과정으로 이끌 뿐이다. 시몽동은 기계에 의한 인간 영혼의 오염이라는 기술적 소외의 고전적인 인간주의적 비판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인간성과 기술 간에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진보의 문제에 대한 이런 시몽동식 탐색은 「인간 진보의 한계: 비판적 연구」([1959] 2010[27])라는 논문에서 뿐 아니라 최근 사후 출간된 「진보, 리듬들과 양상들」(2015)[28]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분석을 첫번째 논문에 국한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 진보의 한계와 관련된 기술적 가속의 문제에 대한 레이몽 뤼에(Raymond Ruyer, 1958[29])의 논의에 대한 응답이다. 뤼에는 기술적 진보가 규칙적이고 선형적인 누증(accretion)이라는 앙투안 쿠르노(Antoine Cournot)의 생각을 거부했다. 뤼에는 그러한 진보를 ‘가속화된 파열’(accelerated explosion)로 기술하면서,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가속이 어떤 지점에서 멈출 것이라고 논증했다(Ruyer 1958: 416). 우리는 여기서 뤼에의 논증을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논문 전체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비록 19세기의 산업 혁명이 인구의 광범위한 부분을 비참함에 빠트렸지만, “일단 기술의 골격이 자리잡히면, 삶은 놀이들과 공상들을 새롭게 단장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Ruyer 1958: 423). 인간 진보의 확정적인 종말을 전제하기 보다, 시몽동은 인간의 진보를 인류와 대상적 구체화 간의 내적 공명에 의해 특성화되는 순환주기들에 따라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Raymond Ruyer(1902~1987)
우리는 인간의 진보가 하나의 자기한계적인 순환주기를 빠져 나와 다음 순환주기로 들어갈 때, 인간이 대상적 구체화를 형성하는 체계 안에 참여하는 스스로의 부분을 증가시키는 오직 그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인간-종교 체계가 인간-언어 체계보다 더 많은 내적인 공명을 부여 받는다면, 그리고 만약 인간-기술 체게가 인간-종교 체계보다 더 커다란 내적 공명을 부여 받는다면, 거기 진보가 존재하는 것이다(Simondon [1959] 2010: 231). 


우리는 ‘내적 공명’이라는 말을 강도와 관련하여, 준안정적(metastable)으로 되기 이전, 다시 말해, 어떤 새로운 순환주기가 시작되기 전, 개체화의 변형 과정을 특성화하는 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시몽동은 여기서 세 가지 순환주기를 정의하는데, 이른바 ‘인간-언어’, ‘인간-종교’, 그리고 ‘인간-기술’이 그것이다. ‘인간-기술’ 순환주기에서, 시몽동은 새로운 대상적 구체화를 관찰하는데, 이는 더 이상 자연 언어나 종교적 의식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 개체들’의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몽동 ([1958] 2012[30])은 산업화가 연결된 개체들로 구성된 기술적 개체들과 기술적 체계 둘 모두를 생산해 왔으며, 이것은 인간을 배제한다고 논증한다.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산업 이전의 기간에는 도구를 다루면서 일하는 인간이 어떤 연합된 환경(associated milieu)[31]을 창조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은유적으로나마 그들 스스로 기술적 개체들로 기능했다. 하지만 산업시대에 들어서, 인간은 산업 기술적 개체에 의해중심으로부터 배제되었고(이것은 인간이 생산의 중심적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기술적 개체’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Simondon [1958] 2012: 100–2). 인간은 다만 버튼을 누르고 일괄생산 라인을 가동하는 것과 같은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이러한 탈중심화에 대한 비평은 오래된 휴머니즘의 노스텔지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기술’ 관계가 산업화에 의해 노예-노예 관계로 변형된다는 우려에서 생겨난다. 즉 여기서 [인간이든 기술이든] 하나는 다른 하나의 노예인 것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매우 적절하게도 이러한 지적인 상실 과정을 ‘프롤레타리아화’라고 부른다(Stiegler 2010[32]). 프롤레타리아화란 우리가 가난해진다거나 노동계급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또는 그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지식이나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탈-기술화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심을 이탈하는 인간성의 전환이 ‘인간-기술’ 순환주기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중심으로부터 밀어내는 기술의 힘이 언어과 종교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약하기 때문이다(Simondon [1962] 2010[33]: 233). 시몽동이 제기하는 진정한 문제는 기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가속에 대한 애초의 구별로 되돌아가야 한다. 첫 번째 가속은 진보의 순환주기의 완성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연장하며, 언제나 모든 행위들로부터 인간을 더 멀리까지 탈중심화한다. 두 번째 가속은 내적 공명에 의해 결정되는 개체화의 완성에 본질적인 것을 말한다. 인간의 일반적 프롤레타리아화를 이끄는 가속이나 코뮤니즘적 인내를 가지고 어떤 혁명적 순간을 불확실한 채로 기다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말고, 시몽동은 완성으로 가는 진보의 순환주기를 야기하는 인간-기술 관계를 고려하기 위해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것은 강도의 상호관계성인 가속과 관련하여 들뢰즈와 시몽동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경로에 조응한다. 하나는 혁명(revolution)의 프로그램을 사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점진적 변화(evolution)의 프로그램을 고려하는 것이다.[34] 일단 두 경로 사이의 차이점은 차치하고 본다면, 휴머니즘적 좌파가 기술에 대해 사유할 수 없었고, 언제나 소외에 대해 정치적이라기보다 도덕적인 비판으로 되떨어지고 말았다는 알렉스 윌리암스와 닉 스르니체크의 비판을 두 사상가는 분명 확증한다.[35] 하지만 가속에 관한 구별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속주의 정치학의 일반 개념이 그것의 극한으로 추동되어야 하는 그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이것은 시몽동이 인간 진보(개념)의 한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 진보의 한계에 관한 질문은 사유의 한계에 관한 질문을 함께 드러내지 않으면 밝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유야말로 인간 종의 점진적 변화[진화]에 속하는 잠재력의 주요한 보고(寶庫)로 현상하기 때문이다”(Simondon [1962] 2010: 235).


우리가 만일 인간 진보의 한계가 마찬가지로 사유의 한계라는 시몽동의 테제를 따른다면, 가속의 한계와 관련된 합리적인 추측을 공식화할 수 있다. 특이성(Singularity) 가설은 기술적 순환주기의 어떤 종말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들어 정의된 인간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36] 그리고 ‘좌파-가속주의자들’이 ‘가속주의자 선언’(Accelerationist Manifesto)에서 자본-노동 관계의 적절한 분석을 해낸 반면, 강도와 관련된 분석은 광범위한 미개척지로 남겨져 있으며, 더 연구되어야 한다. 인간 진보의 한계에 관한 시몽동의 비판은 기술적 가설의 한계에 대한 경종(reminder)이다. 들뢰즈와 시몽동에서 우리는 강도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있어서 두 가지 선언들 보게 되는 바, 후기 들뢰즈에서는 어떻게 해서 강도가 새로운 통제 메커니즘이나 새로운 통치성의 제물로 전락하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이제 자동화(automation)와 강도에 대한 반성에 따라 가속의 문제를 탐색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들과 복잡성들 안에서다.


시몽동은 소외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자동화’를 거부했다. 시몽동에게 자동화는 ‘완전성의 가장 낮은 단계’일 뿐으로서, 인간-기술 체계에서 ‘내적 공명’을 창조할 수 없으며, 기계를 노예처럼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이다(Simondon [1958] 2012: 127). 우리는 자동화에 관한 이런 비판이 인공 두뇌와 같은 현대 기술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인공 두뇌는 시몽동이 글을 쓸 당시에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다). 특히 우리가 딥 블루(Deep Blue)나 IBM 왓슨(Watson)과 같은 기계를 고려하거나, 인간 중심 디자인을 도입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자동화가 보다 공격적이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우리 일상 생활 안에서 진행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여전히 가치를 지닌다. 특히 그것이 시장에 의해 상업적 도구로 대량화되어 운영될 경우, 시몽동이 이상적인 경우 즉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상호작용하는 방식과 같은 경우라고 상상한 것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다.  


IV. 변조, 도래할 강도의 정치 

이것은 혁명적 정치학에 관한 사유가 들뢰즈와 시몽동의 사유에 의거하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해된다면 기술적 가속은 변조의 단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며, 새로운 질서 또는 새로운 형상화를 생산하기 위해 인간성을 전복하는 어떤 폭발을 만들어내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달리 말해 이것은 어떤 불연속성 또는 테아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의미에서 오메가 포인트(우주진화의 궁극적인 지점)를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제3세계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타이완에 있는 아이폰 공장인 폭스콘은 2014년 현재 1만 기의 로봇을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매 년 3만 기의 로봇으로 증가시킬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폭스콘은 그들의 백만 로봇 프로젝트가 ‘단지 잔존하는 인간 노동자들을 돕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Dorrier 2014[37]를 보라). 인용된 논문은 폭스콘이 어떻게 백만-로봇 군단의 채택에 실패했는지, 그리고 보다 많은 인간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조롱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결국은 대체될 것인가? 언제 그들은 출현할 새로운 정치 아젠다를 위해 대체될 것인가?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물론 확실히 보장된 혁명을 희망하기란 가능하지 않으며, 사실상 우리는 언제나 도래할 묵시록적 순간과 같은 것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이 선택지가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가속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기술발전을 재전유하기 위해 다른 전략들을 상상하라는 우리의 제안이 놓여 있다. 시몽동에 대해 성찰하면서, 토스카노는 혁명의 과학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 상상하려고 시도한다(Toscano 2012: 92). 그는 시몽동을 따라 기술된 전개체성을 에너지와 잠재성으로 가득 채워진 어떤 단계로 고려한다. 그것은 어떤 문턱에 도달하게 되면, 구조적인 변형이 생산되는 단계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발상이 등장하는데, 혁명의 가능성으로서 불균등성의 변조(modulation of disparation)가 그것이다. 토스카노는 시몽동의 집단(the group) 개념으로 돌아가서, 혁명적 잠재력으로서의 집단 구성을 본다. 


전-혁명적 단계의 전개(unfolding)를 촉진하기 위해서, 집단은 그 스스로를 부적응시키고, 그 자신이 반개체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준안정적 상태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잠재력들을 증폭하고 통합하는 것과 같은 혁명적 해(solution)의 발명에 필요한 조건들 중 하나가 정확히 사회체의 한 가운데에서 오래된 결속들을 해체하는 것,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Toscano 2012: 92–3). 


여기서 토스카노는 시몽동의 작업을 통해 (증폭으로서의) 가속을 사유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시작을 암시한다. 하지만 토스카노의 (길고 광범위한) 논문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시몽동의 사유에서 기술의 역할과 ‘잠재성의 증폭’과 그것의 관련성인 바, 후자의 개념은 혁명들의 개체화라는 토스카노의 개념화에 핵심이다. 증폭하기는 강도화하기이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강도화하기는 그와 같이 현출하는 공명을 허용하는 기술적 하부구조를 생각하는 것이다. 증폭이란 1960년대에 시몽동을 지배했던 질문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1962년 로요몽 콜로키움(the Colloque de Royaumont)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읽을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사회적 증폭 과정에 대한 하나의 유비로 3극 진공관 원리의 작동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Simondon [1962] 2010; Hui 2015도 보라).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변조에 반대하는 것도, 우리가 분석해 왔던 강도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 패러다임 안에 위치시키고 상이한 변조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어트 로빙크(Geert Lovink, Lovink and Rasch 2013[38]을 보라)와 같은 몇몇 인터넷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지지 받는 대안을 발전시키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강도를 핵심적인 고려사항으로 넣는 기술들을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강도가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는지 간략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스티글러(2010)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세기는 소비주의의 세기였으며, 상징들, 기호들, 이미지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케팅에서 심리적 욕동들을 다양화함으로써 비개체화의 경향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21세기에 들어서는, 스마트 기기, 상황-인지(context-awareness) 기술들, 나노기술, 인공 지능, 소셜 네트워크 등등의 도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것은 누군가가 마켓팅 전략을 짤 때 상식이 되었으며, 이 기술들은 구글, 아마존 그리고 페이스북이 도입했으며, 획득한 것이었다. 우리는 위에서 시몽동과 스티글러에 있어서 ‘비개체화’라는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몽동에게 그것은 필수적인 개체화 단계로서, 오래된 구조가 새 구조가 형성되기 위해 붕괴되는 이행과정이다. 스티글러는 이 용어를 개체화의 어려움, 특히 우리가 스스로를 다른 것으로부터 개체화하는 강도를 잃어버릴 때, 그것이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더우기 죽음을 향한 가속이 되는 경우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의 책 『결행』(Acting Out, [2003] 2009[39])에서 스티글러는 2002년 낭떼르 학살(Nanterre massacre) 이야기를 인용한다. 당시 33살의 리샤르 듄(Richard Durn)은, 지역 시의회가 열리는 동안 8명의 시의원들을 사살하였고, 다음 날 자살했다. 스티글러에게, 듄의 살인 행위는 기본적인 나르시시즘의 상실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며, 그는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어떤 비개체화된 개체(an disindividuated individual)가 되었던 것이다. 스티글러의 의미에서 비개체화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인데, 왜냐하면 강도가 공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부정, 일종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가기 때문이다. 뮈리엘 콩브(Muriel Combes)는 이것을 ‘비개체화’의 두 양상들로 재공식화한다. 하나는 ‘불안의 파국적 비개체화’(catastrophic disindividuation of anxiety)로서 모든 경헝의 파괴와 해체로 이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개체화를 위한 조건인 ‘횡단개체적 비개체화’(transindividual disindividuation)이다(Combes 2012: 38).


Geert Lovink(1959~   )

만약 우리가 들뢰즈, 시몽동의 분석과 토스카노의 독해 그리고 스티글러를 따른다면, 기술은 강도들을 그 목적이 미리 정의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향해 증폭하고, 지도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와 같은 가속을 향한 기술적 증폭 과정이 정치학의 핵심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계류와 횡단개체들 사이에 내적 공명을 탐색하는 정치학, 또는 토스카노가 ‘발명의 정치학’라고 부르는 그런 정치학이 된다. 그러므로 어떤 특이성을 향한 불특정적이고, 포괄적인 기술의 가속이란, 심지어 그것이 혁명적 사건의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이라 하더라도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들, 즉 집단의 잠재력들의 공명과 증폭을 찾아내는 그런 기술들을 발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술적 대상들은 개체와 집단를 횡단하는 횡단개체적 관계들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증폭의 프로그램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기술적 대상들에 의해 매개되는 네트워크 안에서다. 이러한 사유 노선은 오픈 소스 운동, 탈중심화, 익명성과 암호해독과 같은 행동주의 안에는 여전히 결여된 것이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지만, 상업적 기술들로부터 작동 모델들을 전수 받은 것들이다. 이러한 저항의 형식들이 가진 한계는 기술에 관한 분석이 여전히 형식-물질 질료형상론이나 유형론의 반복이라는 패러다임 안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스스로를 현존하는 모델들의 미미한 증강에 제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시몽동이 제안한 강도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아직까지 연구와 개발로부터 배제된 상태다.[40] 만일 우리가 ‘저항’ - 이 단어가 가속과 비교해서 아무리 진부하다 하더라도 - 의 가능성을 재공식화하고자 한다면, 그때 그것은, 시장과 통제의 정치학에 의해 광범위하게 추동되는 혁신(innovation)의 정치학에 반하는, 발명의 정치학이 될 것이다.


V. 결론 

요컨대 이 논문은 들뢰즈와 시몽동 안에서 가속이라는 사유를 해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가속주의의 현대적 형식들과 관련하여 들뢰즈와 시몽동의 날인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론과 정치학 안에 가속에 따라 작동되는 [이론적] 역할들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개념, 이른바 강도에 기초하여 가속의 정치학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몽동과 들뢰즈의 재독해는 뤼에(Ruyer)의 중재를 거쳐, 그러한 사유의 궤적을 개괄하고, 최근의 가속주의 정치학과 그들을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문명화의 상이한 단계들에 관한 개념화와 형이상학의 실현으로서 기술에 관한 전망은, 비록 흥미진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용어로 규명하기엔 힘들다 해도, 가속주의 정치학을 위한 성찰에 유용하다. 《가디안》에 게재된 최근의 기사, ‘자본주의의 종말이 시작되었다’에서 저널리스트 폴 마손(Paul Mason)은 정보 기술이 자본주의에 종말을 야기해 왔으며 우리는 포스트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Mason 2015[41]). 마손의 분석은 시몽동의 분석과 공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필연적으로 이끌지는 않고, 그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가속의 위험성을 조명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대탈출을 제안하는 척 하지 않는다. 이 논문은 가속주의 정치학을 형이상학, 정치학 그리고 기술 간의 관계들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정치학 안으로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를 변조적 모델에 기초하여 개념화할 수 있다면, 그때 변조의 새로운 양상들은, 고전적 위계나 질료형상적 체계로 퇴행하지 않고도, 후기 자본주의의 대항-역능(counter-force)으로 긴급하게 요구될 것이다. 이러한 진전을 위해, 들뢰즈와 시몽동이 우리를 위해 준비했던 철학적 기초작업을 계속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작업에 질문을 던지고, 당대의 기술을 재전유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주석]


[1] [역주]이 번역은 초벌임을 밝혀둔다. 

[2] Rosa, Hartmut (2013) Social Acceleration: A New Theory of Modernity, trans. Jonathan Trejo-Mathy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3] Simondon, Gilbert (2005)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aris: Éditions Jérôme Millon.

[4] Simondon, Gilbert (1960) ‘Forme, information et potentiels’, Séance du 27 février 1960,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54:4.

[5] Deleuze, Gilles (1994)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London: Athlone Press; Kor. 김상환 옮김,『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6] 들뢰즈와 시몽동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Sauvagnargues, Anne (2009) Deleuze, l’empirisme transcendental,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0장-12장을 보라.

[7]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특별한 비판을 통해 그 자신의 이론을『차이와 반복』에서 구성하는데, 그것은 분류와 범주 사용에 따라 존재에 접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초점을 맞춘다.

[8] “우리는 자연을 개체가 스스로를 운반하는 전개체적인 실재라고 부를 수 있다. [...] 자연은 인간에 대립하지 않으며, 존재의 첫번째 단계이다. 두 번째는 개체와 환경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전체와 관련된 개체의 보충물이다”(Simondon 2005: 305).

[9] Deleuze, Gilles and Félix Guattari (1987)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2,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0] Deleuze, Gilles and Félix Guattari (2004)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Kor. 김재인 옮김,『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분열증』, 민음사, 2014.

[11] 이 애매성에 대해서는 사람들에 의해 주목받아 왔으며, 언급되어 왔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두 저작을 대조, 비교하라. Kœnig, Gaspard (2013) Leçons sur la philosophie de Gilles Deleuze: Un système kantien, une politique anarcho-capitaliste, Paris: Ellipses, Silbertin-Blanc, Guillaume (2013) Politique et État chez Deleuze et Guattari,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2] Land, Nick (2014) ‘Teleoplexy: Notes on Acceleration’, in Robin Mackay and Armen Avenessian (eds), #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 Falmouth: Urbanomic, pp. 509–20. [13] 이들의 반박은 “행위의 새로운 형식”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발성들과 함께 작업하는 실천을 통해 어떠한 기획을 실행하는 능력 또는 즉흥적인 행위이다. 이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만, 지리사회학적 기예와 교묘한 합리성에서 그 형식을 발견한다”(Williams and Srnicek 2014: 361). 현대 가속주의의 계보학에 대해서는, Noys, Benjamin (2012) The Persistence of the Negative: A Critique of Contemporary Continental Theor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를 보라 가속주의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는 그것의 형이상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측면 둘 모두를 살펴야 한다. Cunningham, David (2015) ‘A Marxist Heresy? Accelerationism and Its Discontents’, Radical Philosophy, 191, pp. 29–38를 보라. 

[13] Mackay, Robin (2015) ‘Immaterials, Exhibition, Acceleration’, in Yuk Hui and Andreas Broeckmann (eds), 30 Years after Les Immatériaux: Art, Science, and Theory, Lüneburg: Meson Press, pp. 215–44. 

[14] 들뢰즈의 긍정주의의 보다 일반적인 틀에 관련된 가속주의에 대한 비판을 알기 위해서는 ‘Noys 2012’를 보라. 

[15] Noys, Benjamin (2012) The Persistence of the Negative: A Critique of Contemporary Continental Theor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16] “감금은 주형들(moulds), 구별되는 주형만들기(mouldings)이지만, 통제는 변조(modulation), 즉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하는 자기-변형적인 주형과 같은 것이다”(Deleuze, Gilles (1992) ‘Postscript on the Societies of Control’, October, 59, p. 5; Kor., 「통제사회에 대하여」, 김종호 옮김, 『대담, 1972-1990』, 솔, 1993, 200, 번역 수정) 

[17]「후기」에 나오는 들뢰즈의 변조에 대한 분석의 보다 상세한 연구는 Hui, Yuk (2015) ‘Modulation after Control’, New Formations, 84–5, pp. 74–91를 보라. 

[18] 기계라는 개념은 다소 라이프니츠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재귀적인 개념으로 정의되기 때문인데, 라이프니츠적인 맥락에서 기계는 스스로를 [다른] 기계들로 더 낫게 구성한다(Deleuze and Guattari 2004: 36; Guattari, Félix (2006) The Anti-Oedipus Papers, trans. Kélina Gotman, New York: Semiotext(e)를 보라). 

[19] 시몽동에게서 가장 ‘논박적인’[논쟁적인] 측면들은 이를테면 그의 사회학과 심리학에 대한 비판인데 여기서 그는 이 학문들이 심리적이고 집합적인[집단적인]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무능하다고 논박한다. 이런 것들은 오직 개체화에 관한 존재론적인 이해를 향해 가는 수단들로 전개될 수 있을 뿐이며, 일반적 패러다임 안에서 상이한 접근들의 ‘화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20] ‘비개체화’ 개념은 베르나르 스티글러에 의해 더 나아간 개체화 능력을 잃어 버린 심리적 존재들을 기술하기 위해 도입되는데, 이것은 존재자가 스스로와 집단과 관련하여 어떤 강도와 텐션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분명히 시몽동의 본래의 용법과는 다소 구별된다. 

[21] Toscano, Alberto (2012) ‘The Disparate: Ontology and Politics in Simondon’, Pli, 24, Special issue, ‘Deleuze and Simondon’, pp. 87–96. 

[22] During, Elie (2006) ‘Simondon au pied du mur’, Critique, 706:3, pp. 271–85. 

[23] Simondon, Gilbert (2015) ‘Le progrès, rythmes et modalités’, Critique, 5:816, pp. 384–400. 

[24] 뮈리엘 콩브(Muriel Comb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다 공정하다. 즉 맑스는 단순히 시몽동이 한 것과 같은 장소에 소외를 위치시킨 것이 아니다. 시몽동이, 지배와 예속의 변증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바, 인간들이 기계와 유지하는 부적합한 관계 안에서 소외를 이해한 반면, 맑스는 그것을 착취와 지배의 불가분한 혼합으로서 생산관계의 수준에 정립한다” Combes, Muriel (2012) Gilbert Simondon and the Philosophy of the Transindividual, Cambridge, MA: MIT Press, 74. 

[25] 예를 들어, 기술적 개체는 기술적 요소(예컨대 하나의 다이오드diode)보다 더 구체화(concretise[객체화])되어 있다. 이것은 기술적 개체가 어떤 평형상태로 되돌아 가도록 허용하는 회귀적 인과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26] Simondon, Gilbert [1959] (2010) ‘The Limits of Human Progress: A Critical Study’, Cultural Politics, 6:2, pp. 229–36. 

[27] Simondon, Gilbert (2015) ‘Le progrès, rythmes et modalités’, Critique, 5:816, pp. 384–400. 

[28] Ruyer, Raymond (1958) ‘Les limites du progrès humain’,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63:4, pp. 412–27. 

[29]Simondon, Gilbert [1958] (2012)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30] ‘연합된 환경’은 시몽동이 기술적 개체를 특성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인데, 이것은 기술적 요소들 그리고 기술적 앙상블들과 구별된다. 기술적 개체들은 하나의 연합된 환경을 가지며, 이것은 그것들 스스로 안정되도록 하는 것이다. 연합된 환경은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의 피드백 논리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연합된 환경 개념은 단순히 대상 자체의 어떤 메커니즘이 아니라, 기술-지리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31]Stiegler, Bernard (2010) For a New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trans. Daniel Ross, London: Polity Press. 

[32] Simondon, Gilbert [1962] (2010) ‘L’amplification dans les processus d’information’, in Communication et Information, Paris: Éditions de la transparence, pp. 159–76. 

[33] “테크토크라트는 독재자의 본성적인 친구 – 컴퓨터와 독재권력 – 이다. 하지만 혁명은 사회적 전체성과 기술적 진보를 가르는 간격 안에 서식하며, 거기에 그의 영속 혁명의 꿈을 새겨 넣는다. 그러므로 이 꿈은 그 자체로 행동, 실재성이자 하나의 모든 기성 질서에 대한 효과적인 위협이다. 이것은 그것이 꿈꾸는 것에 가능성을 부여한다”(Deleuze 1990: 49). 

[34] 우리가 여기서 어떤 ‘기술 없는 좌파 정치학’을 일반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맑스의 ‘일반 지성’ 개념에 대한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Operaismo) 그룹의 연계 뿐 아니라, 도나 해러웨이의 페미니즘적 비판 또한 알고 있다. 

[35] 인간 역사와의 그와 같은 급진적 결별의 함축에 대해서는 Negarestani, Reza (2014) ‘The Labor of the Inhuman’, in Robin Mackay and ArmenAvenessian (eds), 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 Falmouth: Urbanomic, pp. 425–66을 보라. 

[36] Dorrier, Jason (2014) ‘Million Robot Revolution Delayed – iPhone Manufacturer Foxconn Hires More Humans’, SingularityHub, 14 October, available at < https:// singularityhub. com/2014/10/12/million-robot-revolution-delayediphone-manufacturer-foxconn-reluctantly-hires-more-humans/> (accessed 11 July 2017). 

[37] Lovink, Geert and Miriam Rasch (eds) (2013), Unlike Us Reader, Amsterdam: Institute of Network Culture 

[38] Stiegler, Bernard [2003] (2009) Acting Out, trans. David Barison, Daniel Ross and Patrick Croga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39] Hui, Yuk and Harry Halpin (2013) ‘Collective Individuation – The Future of the Social Web’, in Geert Lovink and Miriam Rasch (eds), Unlike Us Reader, Amsterdam: Institute of Network Culture, pp. 103–16을 보라. 여기에는 소셜네트워크 분석의 구체적인 예와 시몽동의 집합적 개체화에 기반한 가능한 대안들에 관한 제안이 나와 있다.   

[40] Mason, Paul (2015) ‘The End of Capitalism Has Begun’, The Guardian, 17 July, available at<http://www.theguardian.com/books/2015/jul/17/postcapitalismend-of-capitalism-begun> (accessed 11 Jul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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