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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Nov 20. 2019

일찍 온 미래

러시아 코스미즘 단장

*원문서지사항: Nikolai Fedorov, 'Astronomy and Architecture', Russian Cosmism(MIT Press, 2018), ed. by Boris Groys, pp. 55-58.

천문학과 건축술     


니콜라이 페도로프(Nikolai Fedorov)     



모든 과학이 천문학으로 통합되고, 모든 예술이 건축술 안으로 통합된다면 – 사실상, 그와 같은 통합은 가장 단순한, 가장 접근이 용이한 질서에 속하는 바, 그 어떤 학문적 전문성도 요구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것에 대해 심각한 사유를 해야 하거나, 보다 낫게는, 전자(천문학)가 세계 인식[지식]이라면 후자(건축술)는 세계 질서 또는 세계 통치(governance)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바로 그 질문을 읊조릴 것이다. 즉 건축술은 어째서 천문학에 의해 생산되는 지식의 적용이라고 불릴 수 없는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연결, 아주 자연스러운 연결, 지식 즉 과학과 행동 즉 예술 간의 연결이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것을 하고자 한다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기억하라. 하지만 이 스핑크스는 관측 열기구 위에서 발 한쪽 대신에 피뢰침을 달고 그것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다. 작은 대지만으로도 충분한 이 생명체는 자신의 새롭게 창조된 발로 하늘을 건드릴 것이다. 그리고 대기로부터 맹렬한 기운을 이끌어 내면서, 폭풍을 다스리고, 허리케인을 잠재우며, 바람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바꾸고, 적당한 때가 될 때 들판을 가로지르며 비를 뿌릴 것이다. 미국이 유럽의 첫 번째 관측 열기구 출발을 목격하고 지루해 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인물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도구가 어떻게 비를 유도하는데 활용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그 피뢰침의 발명자에게는 생겨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가 다음과 같이 되물으면서 새로운 발명의 쓸모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새롭게 태어난 아기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가도, 그 장난감은 단지 장난감으로만 남아 있다. 어린 아이는, 그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어떤 기회가 그 장난감을 위대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나타나더라도, 아직 그의 침대보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시민들은 기근을 이해하지 못했고, 관측 열기구는 현재까지 단지 장난감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생각이 이제 가장 확고한 슬라브주의자 중 한 사람에게 생겨났는데, 그는 피뢰침을 장착한 이 기구가 굶주림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할 도구가 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독일의 퓨스(Fuss) 교수는 그 슬라브 발명품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에너지가 태양에 의해 지구로 보내진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은 지구 위로 내려오는 대신에, 우주공간으로 이내 흩어져 버릴 수 있다. 지구로 내려오게 된 것은 피뢰침-열기구들의 거대한 배열로 인한 것이다. 이 기구들은 태양빛을 우리 행성으로 몰고 올 것이다. 이 태양에너지가 곧장 지구를 향해 오게 된다면, 그것의 새로운 보금자리[지구와 대기권-역자]의 밀도를 변경할 것이고, 중력의 결합을 약화시킬 것이며, 천구를 통해 오는 그 천문 경로를 조정할 가능성을 제 차례에 야기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것은 결과적으로 지구행성을 어떤 거대한 전기 보트(electric boat)로 만들 것이다. 이 보트가 천상의 바다를 항해하자마자, 이 피조물은 천국을 올려다 보게 될 것이다. 이 보트에서는 인류 전체가 지구배의 선장이며, 선원이고, 정비사다. 마치 우리가 작은 배에 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움직일 뿐 해안에 가닿지는 않음이 분명하다. 군대의 역할은 더 이상 전쟁을 바라지 않으며, 단지 그 아들들에 의해 조국의 땅을 방어하기 위한 의무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들이 하나로 결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군역은 아들들이 공유하는 애국적 업무에 참가하도록 요청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와 그 위에 거주하는 모든 물질들의 경로를 감독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다. 과학은, 만약 다른 행성들의 물질구조를 지구의 그것과 닮은 것으로 기술하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이 맞다면, 하나의 천체로서의 지구에 관한 지식이면서 지구와 닮은 다른 행성들에 관한 지식으로 정의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하다면, 그때 과학은 다른 학문 분과들 즉 과학의 적용 영역에 따라, 즉 지구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어떤 행성이든지 그 동일한 수단에 의해 운행가능하다고 증명될 것이고, 또한 그렇게 가르쳐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대지를 건설하는 것은 그 똑같은 적용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즉 지구는 사원으로 변형될 것이고, 다른 행성들은 새로운 주거지가 될 것이다.      


이 주거지로의 이행은 단지 하나의 세계 질서(World Order)에 기반하지는 않으며, 유기적 삶/생명 자체의 질서만들기, 즉 신체 질서(Body Order) 다시 말해 우리 신체들의 배치와 생산,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다루는 기예에 관한 지식에 기반한다. 이 동일한 질문, 세계 질서와 세계 통치(건축술)의 관계, 그리고 세계 지식(천문학)에 관한 질문은 삶/생명의 과학, 다시 말해 생물학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에 있어서 살아 있는 신체들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생물학이란 것이, 파괴를 겪는 신체들의 구조와 죽을 운명에 처한 살아 있는 존재자들의 생명에 대한 지식인 바, 왜 파괴된 신체의 재생에 적용되는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조각이나 회화와 같은 예술은 그러한 파괴된 신체를 대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돌, 금속과 같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끔은 사실상 진흙으로 만들어져서 매우 쉽게 소멸되기도 한다) 형상물들로 그것을 제공한다. 어째서 이러한 이미지 – 결코 모든 사람들의 이미지는 아니고, 오히려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의 이미지 – 들이 발생하는가? 그리고 어째서 조각과 회화와 같은 예술이 단지 해부학의 약한 응용, 생리학의 완벽한 무의미함(purposelessness)의 표명, 단순히 생물학, 즉 생명의 환영적 적용들, 유령들에 불과한가? 따라서 생물학은, 그 어떤 쓸모 있는 적용도 발견하지 못하는 바, 삶/생명의 과학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죽는 방식, 점차적으로 그것의 죽음에 이르는 방식에 대한 과학으로 조금씩 변화된다. 죽음이란, 만약 이것이 적합하게 정의된다면, 한 존재의 이행, 또는 두 존재자들이 탄생을 경유하여 하나로 또는 셋으로 갈마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새로운 삶/생명의 출현은 언제나 이전 생(previous life)의 해체와 연관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맹목적인 힘의 법칙, 즉 파괴되는 동안에만 창조될 수 있다는 그 법칙이 명백해짐을 발견한다. 예술이란, 만약 그것이 어떤 이성적 존재의 작품이라면, 정확히 맹목적 힘에 의해 파괴된 모든 것의 부활에 놓여져야 한다. 이렇게 일을 바로잡는 동안, 맹목적인 힘은 지성의 힘에 속한 비활성(inaction)을 통해 야기된다.      

생물학이 천문학의 한 부분이라는 관점을 채택하기만 하면, 즉 우리가 모든 과학들 – 그것들 중 하나에 따르면 생물학 - 을 천문학 안에 통합하면서 적합하게 행위하기만 하면, 그때에만 우리는 생물학이 삶 뿐 아니라 죽음에 관한 과학인 이유를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세계 질서와 그것의 연결에 관해 삶/생명을 전망할 때에만, 우리는 삶/생명이 겉보기에 단지 하루살이처럼 시작해서, 일년살이가 되고, 그리고 다년살이가 되며, 따라서 이러한 조건 하에서 그것이 무한하게 늘어날 수 있는 이유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이성적 존재를 위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이를 통해] 동시에 현재, 막대한 공간, 삶/생명에 의해 그것의 토대에 있어서, 다른 세계들로부터 고립된 지구대지는 세대들이 거듭되는 동안에만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삶/생명이 이 하나의 천체로서 드러나고, 그것이 아마도 지구위에서만 유일하게 존재한다면, 생물학이 과연 천문학적인, 천체적인, 우주적인 과학이라고 불려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생물학이 – 지식의 형태라면 – 그 규모에서 즉 그 대상이 우주공간을 차지하는 비율에서 무시할 정도라면, 생물학 – 부활의 기예인 바 – 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 안에서 알려질 수 없다. 하나의 묘지가 되어가는 바, 지구대지는 그 안에 거기 있는 것만큼의 많은 세대들을 품고 있으며, 이는 이성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우주 안의 세계들이다(사실 우리는 이성에 따른 세계 외의 다른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많은 세계들은 삶/생명을 지원하기에는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죽은 세대들의 부활을 통해 생물학은 다소간 모든 세계의 안정 – 다시 말해 계몽된 통치(enlightened gevernance)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삶/생명이 모든 세계들에 장착되도록 확증함에 따라, 이 우주는 어떤 생물학적인 것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활력이 넘치도록 변형된 이곳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를 멈추고 또한 노동자가 되는 것도 멈춘다. 즉 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기초적인 물질적 구성요소들(이것은 천체화학, 분광분석 화학이 우주를 가로질러 발견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재창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이러한 인간성의 후예들은 다른 행성들로 여행하는 법을 배우며, 이제부터 그들 각자는 지구대지 위에서 행해졌던 것을 정확하게 복제할(duplicate, 이중화) 것이다. 다시 말해 피뢰침-열기구를 이용해서, 모든 태양 에너지는 각각의 행성에 곧장 비칠 것이고, 이에 따라 [이 행성들은] 중력의 결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어떤 거대한, 전기 보트로 변할 것이다.      

(trans. Ian Dreiblatt)          


Nikolai Fyodorovich Fyodorov(1829-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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