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유명 전문의와의 예약을 잡으려면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하는데 운이 좋게도 그 또라이 일반의가 추천해 준 전문의는 바로 그다음 주에 만날 수 있었다.
자궁 초음파 결과지를 받아본 할아버지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 초음파 결과지로는 어느 정도 안 좋은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복강경으로 배를 열어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수술을 권하니 머리가 좀 복잡해졌고 수술을 하면 막힌 나팔관을 뚫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가능성이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전문의는 상태가 많이 안 좋으면 바로 IVF(시험관)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복강경이라고는 하지만 수술은 수술인데 수술을 해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얼마나 안 좋은지 살펴만 보는 거라고? 그럴 거면 복강경 수술을 건너뛰고 바로 시험관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이 절차가 도대체 맞는 건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쉽게 되지 않았고 일단 현실적으로 하루하루 몸은 노화가 되고 있는데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지라 빨리 진행하는 게 좋겠다고 의사에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 의사는 "너 정도면 애기야!"라며 껄껄 웃었다. (이 한마디가 나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곤 이땐 몰랐지) 첫 산부인과 전문의와의 진료에서 우리는 수술 날짜를 다음 해 2월로 잡고 여러 가지 서류를 받아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고민고민 아무리 고민해 봐도 수술을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만 할 수 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고민의 고민 끝에 내가 아직 '어리다'는 의사의 말에 꽂힌 신랑과 합의를 해서 수술은 접고 6개월 동안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배란일 노이로제. 한 달이 이렇게 금방 찾아왔던가요.
배란일 테스트기를 사서 생리가 끝난 일주일부터 매일매일 같은 시각에 배란일을 체크하고 관계를 갖으며 아기 천사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도 여기에 목을 매고 있으니 내가 이렇게 간절했던가, 아님 그냥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간절해진 것인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시 생리가 찾아오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아무 성과가 없이 6개월이 지났다.
그러던 중 들려온 회사 동료의 쌍둥이 임신 소식. 축하 인사를 나누고 며칠 후에 자연임신이었을까 인공수정이었을까 급 궁금해졌다. 오피스가 조용해진 틈을 타 동료에게 질문을 했는데 IVF(시험관)이었단다. 자연스레 나의 상태에 대해 털어놨고 동료가 자신이 인공수정을 한 산부인과 전문의를 소개해줬다. Melbourne IVF's Medical Director라는 타이틀이 있는 의사였는데 멜번에서 인공수정으로는 탑인 의사이고 바로 옆에 있는 동료가 한 번에 성공했으니 신뢰가 갔다. 이 당시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아이 문제를 계속해서 꺼내는 것이 미안했던 나는 일단 이 의사가 언제 진료가 가능할지 들어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오피스에 전화를 걸었다. 웬걸, 예약 취소된 게 있다며 다음 달에 바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접수처 담당자의 대답.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진행되는 속도에 놀라며 역시 나는 운이 좋다는 마음으로 예약을 잡았다.
그렇게 다가온 진료의 날. 남편과 나는 같이 전문의의 오피스를 찾았고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자 전문의를 만날 수 있었다. 첫 진료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때까지 했던 모든 테스트 결과지를 그에게 보여줬고 이 의사도 나에게 똑같이 이 결과지로만은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일단 복강경으로 배를 열어보기 전에 남편의 정자 테스트를 권했다. 아무리 나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해도 남편에게 문제가 있으면 자연임신은 힘들다는 이유였다. 이 의사는 또 우리에게 얼마나 오래 자연임신을 시도했냐고 물었고 우리는 6개월을 시도했다고 대답했다. 이 기회를 놓칠쏘냐 나는 35살 전에 임신을 성공하고 싶다며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고 당신의 생각은 어떻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이 의사는 아주 간결하게 "아무 문제가 없는 커플은 6개월 시도했을 때 무조건 자연임신이 성공하는 거야. 안되면 의사를 찾아와야지. 너 말대로 계속 기다리면 안 돼. 네가 그렇게 어린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속이 뻥 뚫리는 이 핵사이다 같은 대답. 그리고 그는 만약 남편의 정자 테스트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면 복강경 수술로 확인을 해본 뒤 나팔관을 잘라내거나 청소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임신으로 성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이면서. 무작정 수술을 권했던 첫 번째 의사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해 주는 이 의사가 매우 신뢰가 갔고 우리는 남편의 정자 테스트 예약을 잡고 오피스에서 나왔다.
일주 후 남편의 정자 테스트는 성공리에 끝마쳤고 정상 범위에서 양과 운동성이 두 배나 넘는 수치를 보여주며 짱짱 정자맨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나의 배를 열어 나팔관을 들여다볼 차례. 또다시 운이 좋게 전문의를 만난 게 6월 말이었는데 두 달 만인 8월 말에 수술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수술은 입원이 필요 없는 day surgery로 아침 첫 환자로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병실로 들어갔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까 마지막으로 임신 테스트를 권하는 간호사에게 소변을 컵에 받아 건네줬다. (당연히 비임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마취과 선생님도 만났다. 한 한 시간쯤 뒤에 들어간 수술실, 마취 전 여러 가지 질문을 듣고 마취약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눈을 떠보자 수술이 끝나있었다.
마취 회복실 칸에서 정신이 들자마자 갑자기 오한이 들어 몸을 바들바들 떨자 간호사들이 핫에어 블랭킷을 넣어줬고 몇십 분 지나자 수술 회복실 칸으로 옮겨졌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파서 언제 밥을 먹을지 궁금했지만 내 차례는 한참 뒤, 몇 시간을 더 기다렸다가 샌드위치와 주스, 아이스크림까지 받아먹었다. 언제 퇴원이 가능한지에 대해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고 그렇게 몇 시간을 침대에서 회복을 하고 있으니 그제야 간호사가 소변이 마렵냐고 물어봤다.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니 화장실 앞까지 침대로 데려다주고 나는 그렇게 혼자 소변을 보려 안간힘을 쓰며 이제 퇴원하겠구나 하며 좋아했더란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 나는 아침 8시에 입실해서 저녁 9시까지 병실에 있었다고 한다.
회복 중에 수술 경과를 말해주려 나를 찾은 전문의, 왼쪽 나팔관은 너무나도 손상이 되어있어서 잘라냈고 오른쪽은 청소할 수 있어서 깨끗하게 청소했다고 말하며 푸근한 미소를 보내주셨다. 너무너무너무 감사하다며 나도 미소를 건넸고 자연임신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나팔관이 막힌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나중에 의사 소견을 들어보니 내가 5살 때 했던 쓸개 제거 수술 후에 손상된 세포조직들이 배에 많이 남아있어서 그것들이 나팔관을 막은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수술 회복에 힘썼고 일주일 만에 일에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임신 기간은 4개월, 9월부터 12월까지. 실패하면 시험관을 하자는 의사의 조언. 남은 2022년에는 꼭 성공하리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