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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Mar 12. 2021

부모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작업

<117편의 러브레터> 2015, 피테르 가르도스 감독





*개봉 전에 배급사 알토미디어(주) 측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로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1945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헝가리 청년 '미클로시'는 해방 후 폐질환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117명의 여성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중 '릴리'의 편지만이 미클로시의 가슴을 뛰게 한다. 어느새 둘의 편지는 서로의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는 컬러와 흑백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릴리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현재는 컬러로, 그녀의 기억과 편지를 통해 영화 속에서 재현된 과거흑백으로 표현된다. 이 영화의 흑백 씬들을 보다 보면 그것이 극 연출인지 실제 역사 기록물인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당시 스웨덴 수용소에 있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아카이브 영상으로,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 곳곳에 삽입한 것들이다. 역사적 사실의 기록물과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씬들, 그 근원이 되는 릴리의 기억과 편지의 내용들이 영화 안에서 섞인다.


영화 말미에 가서 이 영화를 부모에게 바친다는 문구를 보면서도 충분히 추측 가능하지만 영화의 감독 피테르 가르도스는 미클로시와 릴리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의 아들이다. 이 영화는 감독 부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감독은 영화화 이전에도 이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 <새벽의 열기>집필했었는데 이 소설 또한 영화의 원작 격이라 볼 수 있다.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릴리에게 편지를 건네받는 남자는 감독 자신이며 감독은 자신이 자신 부모가 서로에게 보내던 편지를,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느낀 모든 것을 관객에게 최대한 온전히 전달하려 노력했다. 불가피하게 생길 수밖에 없는 서사 사이사이의 부족한 공백에는 편지 내용과 어머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감독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여느 영화 속 인물들은 실의에 빠지거나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은 생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의 미클로시는 그런 전형적 성격의 인물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자마자 남은 삶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 믿고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게 요양원에 있는 117명의 여자에게 117통의 편지를 보내 무턱대고 자신과 사랑하고 결혼할 사람을 찾는 그의 행동은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끝내 성사되고, 그는 릴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키워 가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직접 요양원으로 찾아간다. 주치의는 그의 건강상태를 걱정하며 그를 만류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2,500km의 먼 여정을 떠난다. 오직 릴리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건 두 사람의 아픈 신장과 폐뿐만이 아니다. 릴리의 친구 유디트는 릴리에게 집착하며 릴리가 모르게 미클로시가 보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가 선물한 겨울 외투 옷감을 가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등의 행동을 한다. 릴리는 확증을 찾지는 못하지만 심증만 갖고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감독의 상상력은 여기에 가미되기도 했다. 유디트에 대한 묘사는 감독 어머니의 당시 친구 유디트가 그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반 의심 반 확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것에 살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 사랑에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종교였다. 두 사람은 유대교인이지만, 릴리는 유대교가 아닌 개신교 신자로 거짓 등록된 상태였고, 이 점은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다.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미클로시는 결국 그녀를 따라 개신교도로 개종해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종교보다도 사랑을 택한 것이다. 이들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이들 소식이 스웨덴 랍비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랍비는 은밀하게 두 사람을 설득해 유대교식 결혼을 치르도록 돕는다. 많은 난관이 닥쳤으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이들의 사랑을 막지 못했고, 두 사람은 무사히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된다.



무모해 보였던 미클로시의 선택이 점점 맞아 들어가며 그가 자신의 연인 릴리를 찾아 사랑을 하고 결국 결혼까지 해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 가슴 뜨거운 순수한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수용소와 요양원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임에도 두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만을 바라보며 그 난관들을 헤쳐나간다. 영화는 두 사람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로써 재현해내며 그들의 발자취를 차례로 되짚어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은 지금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일 테다. 어쩌면 그 시대의 사랑이자 낭만이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의 말도 안 되는 모든 것들이 감독 부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은 다시금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에서 편지라는 두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체는 얼마 전 개봉했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의 물성(物性)과 감성(感性)을 가득 담아 내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들의 편지를, 부모의 기억을 감독이 필자가 되어 관객에게 긴 편지 한 통에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되짚어보고 기억하려는 태도와 함께.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러브레터를 담아낸 영화이면서 또한 자식인 감독이 자기 부모에게 보내는 열렬한 러브레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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