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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Sep 02. 2022

[SIWFF] 폐허의 억압 풀기

<꼭 쥐었던 주먹 풀기> 2021, 키라 코발렌코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새로운 물결
- <꼭 쥐었던 주먹 풀기>




첫 장면에서 아다는 외투를 코까지 올려 입은 채 벽에 기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이 이미지를 마주했을 때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다의 입이 웃고 있을지 아니면 긴장에 떨고 있는지 모르겠고 궁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인상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아다를 보이는 방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아다가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은 집을 나갔던 오빠 아킴이다. 전사를 모른 채 재회하는 남매를 마주하게 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의 만남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아다는 집에 돌아온 아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데 그 관계가 남매 사이보다 남녀 사이로 느껴지는 부분이 더러 있다. 마찬가지로 아다의 동생 다코는 아다에게 지나치리만큼 의존한다.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아다 아다 아버지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다. 아다의 아버지는 아다에게 집안일을 모두 하도록 시키면서 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모습이 매우 강압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다의 아버지는 아다에게 특히나 동생을 챙기는 걸 강조하는데 동생은 한창 학생 또래의 나이로 보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아다도 그런 시기를 거쳐왔을 것임을 추측하게 만든다. 아다가 아프게 된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관객은 이런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단 하나 느껴지는 건 모두의 행동에 악의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아다가 겪은 일은 직접적으로 칭해지지 않아다가 인질 사건을 겪었다정도로만 묘사되는데 이 영화는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 사건(2004)을 겪은 후 북오세티야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 사건 당시 체첸 반군은 베슬란 초등학교에 무장 침입해 1000명 이상의 인질극을 벌였고, 체첸 반군과 러시아군 간의 총격전으로 330여 명이 사망한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최악의 인질극으로 남은 사건 중 하나다. 아다가 어떤 상황에서 이 인질극에 처하게 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아다가 거의 성인이 다 됐다는 점과 배의 아문 상처는 사건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비극적 사건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아다의 마을에는 사건 이후 폐허와 불안의 정서를 깊게 깔려있다. 아다 아버지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에서 친구의 결국엔 다들 고향으로 돌아온다며 아킴이 다시 고향으로 올 것이라는 말은 그 불안감이 아다 아버지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아다 아버지는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끔찍이 여기는 아버지로 인정되고, 그런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아다와 다코도 효심 있는 아이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비극을 겪었다 해도, 어떤 이유로든 아다 아버지의 아다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다의 아버지는 아다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다의 여권을 숨기고, 집 문을 걸어 잠갔다. 아다가 도망치는 날에는 어김없이 주변에 수소문해 그를 다시 찾아와 곁에 뒀다. 수술로 호전될 가능성이 있는지는 모르나 병원에 아다의 병에 대해 진단받으러 가지도 않는다. 결국 아다 아버지의 행동은 일종의 방치다. 아버지의 억압에 누구의 도움 없이는 도망칠 수 없었던 아다는 오빠 아킴이 옴으로써 다시 집을 떠나는 꿈을 꾼다.


결국 아다는 도망치려는 자신에 대한 충격으로 쓰러진 아빠를 그냥 두고 떠나려고까지 하게 되는데 결국엔 오빠의 도움으로 구조되긴 하지만,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아버지가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신이 말할 수 있게 됐다며 소리치는 아다는 울분에 차있다. 자신이 더이상 억압할 힘이 없자 취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지만, 아다 아버지는 결국 아다에게 여권을 내미는데, 그런 아버지를 아다가 껴안고 그 상태에서 경련이 와 그대로 굳는 아버지의 모습은 가부장제 억압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아다는 자신의 마을을, 아버지를 벗어난다. 아킴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두 사람을 결혼 행렬이 뒤따르면서 영화의 카메라는 그 일행이 들고 있는 캠코더로 넘어가 거친 핸드헬드 촬영으로 바뀐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흔들리며 카메라에 찍히고, 아다의 여권과 기저귀가 든 가방은 한쪽 끈이 떨어져 있다. 떨어진 끈을 잡고 있던 아다는 이내 그 끈마저 놓아 버리고, 가방은 도로에 뒹굴며 멀어진다. 내내 카메라의 시선에 머물러있던 아다는 그렇게 완전히 해방된다.




아다의 모든 순간을 연기하는 밀라나 아구자로바는 처음인데도 그 연기가 엄청난데 영화의 결도, 연기의 결도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안티고네>의 나에마 리치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꼭 쥐었던 주먹 풀기>는 제74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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