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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Jul 02. 2023

초록의 장맛비를 맞아보셨나요?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워크숍을 준비하느라 일주일은 밤을 새웠다. 특히 신문사 담당 교수님과 함께 2박 3일 진행하는 워크숍이라 부담이 컸다. 교수님의 평가는 바로 신문사 예산과 연결됐기 때문이다.


 워크숍 내내 상반기 신문을 발행하는 전 과정을 세밀하게 쪼개서 들여다봤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냈다.


한 달을 회의해서 평가 안의 뼈대를 만들고 이후 일주일을 밤을 세서 뼈대에 살을 붙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평가를 위한 평가 안을 들고 2박 3일 동안 이틀밤을 새우고 헤어지기 전까지 회의를 했다.


아침 출근길에 초록 대나무 사이로 쫘악쫘악 내리는 비를 보니 스무 살 시절 학교 신문사 워크숍이 생각났다.


경기도 포천의 어느 깊은 산속 리조트에서 밤새 회의를 하며 봤던 초록비가 지금의 비와 같았을까.


장대비가 내리던 워크숍 마지막 날 아침, 나는 한 선배와 함께 새벽 6시에 리조트를 나왔다. 우산을 써봐야 소용없는 빗줄기였지만 그래도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우산을 썼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한 시간도 넘게 걸었다.


그 선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나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가야 해서 워크숍 일정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초록이 가득했던 깊은 산속에서 장대비를 맞고 아르바이트를 가는데 나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진하게 맡아지는 나무향에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거 같았다. 잠을 못 잔 것은 초록비 속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서 가던 선배가 "군대 있을 때 강원도의 비는 두려움이었는데, 지금 포천의 비는 예뻐서 좀 더 머무르고 싶네."라고 했다. 평소 시니컬한 기사체와 말투의 사회부 부장선배가 하는 말이라 깜짝 놀랐다.


초록비가 마법을 부린 거라 생각했다.

선배가 마법에 걸리든가 말든가 나는 흰색을 가는 붓으로 칠하듯 하늘에서 수억만 개가 내리는 세찬 비를 보며 이 비를 잊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나는 정말 그런 비를 스무 해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미국 선교사가 만든 학교 안엔 이름 모를 아름다운 수목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대한 벚꽃들이 학교를 가득 안고 있었다.


미국 선교사와 벚꽃의 관계를 알 길은 없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안구정화는 기본이고 교과서로 꽉 찬 나의 뇌 속에 향긋한 꽃바람을 넣어주었다.


특히 벚꽃이 질 즈음 함박눈이 내리는 것 같은 꽃날림은 환상적이었다. 거기에 바람이 불지 않고 내리는 조용한 비까지 더해지면 교실 창문 밖 세계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우리를 보던 당시 감성지수가 높으셨던 지리 선생님은

"자 책을 덮어라. 30초 준다. 꽃비 봐라. "라고 하셨다.

그땐 더 어려서 그런 예쁜 비를 평생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비를 볼 시간을 준 거 보면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말이다.



  



잊어버리세요 꽃을 잊듯이

잊어버리세요 한때 세차게 타오르던 불꽃을 잊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어버리세요

시간은 고마운 벗

우리를 늙어가게 하니깐요.

만일 누군가 묻거든 대답하세요.

그건 벌써 오래전 일이라고

꽃처럼 불처럼 아주 먼 옛날

눈 속으로 사라진 발자국처럼

잊었노라고

<사라 티즈데일>


6.30. 상반기 퇴직자들의 작별편지가 내부망 경조사 게시판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쉽다는 말로도 후련하다는 말로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어 시를 적으신 선배님이 있었다.


 떠나려 보니 문득, 40년 전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시가 생각나셨다고 한다.

신규 공무원으로 시작한 첫날의 마음은 영원하길 바랐지만 30초만 보고 싶은 악성민원과 조직 내 스트레스로 끝내 지킬 수 없었다.


생각나는 건 40여 년 전 선생님이 알려준 시뿐이다. 가끔 우리는 오랜 시간 전 내 마음에 한번 다가왔던 그 느낌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고 이럴 때 기억해 내곤 한다.




퇴직하는 선배님들처럼, 휴직이나 병가를 가는 동료처럼, 공지란에 무심히 자리를 채우고 가버린 너,

8급공무원 면직(사망) 2023.06.30.

공무원임용령 제6조 제2항에 따라 00월 00자로 면직.

모두들 스쳐 지나가겠지만 나는 여기에 적는다.

너의 마지막 인사를.


아무리 까칠해도 결국 싱그런 여름비에 말랑해져 버리는 스물여섯 살 선배도,

30초만 꽃비를 보라는 지리 선생님도,

잊어버리세요 라는 시를 올린 선배님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잊지 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거 같아도 혹은 애써 잊으려 해도 마침내 사라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의 세찬 비도, 벚꽃을 타고 흘러내린 비도, 잊어버리라는 말로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위로를 준 선배님도, 너의 고용노동부 공무원으로 삶도, 하루하루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아쉬움이 많은 나의 삶도.

그 순간은 진심이었으니 괜찮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오늘도 계속되고 지워지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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