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251130
창업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듣는다. “창업도 결국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는 거 아닌가요?” 시작할 때라면 맞는 말이다. 나도 처음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창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회사를 이끌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은 10, 하고 싶지 않은 일은 90이다. 그럼에도 이 길을 놓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책임감. 어떤 상황이 와도 회사를 살려야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맨 앞에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대표라는 자리는 결국 책임감 하나로 다시 돌아온다.
얼마 전 한 창업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 회사를 떠난 직원이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했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사적인 경험이 겹쳤다. 얼마 전 헤어진 연인이 환승이별을 하며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던 장면. 회사든 연애든, 결국 사람의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더 좋은 회사를 찾고, 더 좋은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동기다. 나는 떠나간 이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떠나는 사람은 떠나는 이유가 있고, 그건 그들이 품고 갈 서사다.
하지만 이 글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크비전에 재직하던 시절, 회사가 의존하던 주요 플랫폼이 갑자기 차단되면서 운영 시스템 절반이 통째로 마비된 적이 있었다.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존 방식과 회사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야만 했다. 마침 인턴 종료 시기와 겹쳐 여러 인턴과 대다수의 정규직이 회사를 떠났다. 나는 그들의 선택을 백번 이해했다. 어느 직장인이 휘청거리는 문제의 한가운데에 뛰어들고 싶겠는가. 떠나는 건 너무나 합리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2~3명이었다. 우리는 매일 밤새며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다. 처음엔 억울하고 화도 났다. 왜 이걸 ‘우리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떠나는가. 왜 남은 사람들만 이 벽을 마주해야 하는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 있기 때문에 해내는 사람들이다. 책임감이든, 신뢰든,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이든 그 무엇이 그들을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혼란의 밤들을 지나며 우리는 신고 프로세스를 처음으로 구조화하기 시작했고, 주관적이던 기준을 정형화하고 객관화하는 회사의 체질개선이 시작됐다. 그때 설계한 시스템과 용어가 지금도 회사 핵심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 과정을 증명한다.
관계도 비슷하다. 환승이별 역시 더 좋은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며, 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나는 나만의 속도로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관계 속에서 나는 늘 진심이었다. 상대가 떠났다고 해서 그 진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함께한 순간들, 내가 했던 말들, 그 안에서의 나를 돌아본다. 다음에 만날 누군가를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상처를 성장의 재료로 삼기 위해서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 이별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고통이 자리 잡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마음이 다시 열릴 때 비로소 성장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회사에서도, 관계에서도 결국 같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떠나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살아야 한다.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이 때로는 무겁지만 결국 그 책임이 나를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된다. 창업도, 사랑도, 관계도 결국 남아 있는 사람이 성장하는 이야기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잔나비의 노래 가사처럼, 뜨거웠던 순간은 지나가고 남는 건 초라해 보이는 마음 한 조각뿐일지 모른다. 나는 그 마음을 믿는다. 떠나는 사람을 이해하되, 남아 있는 사람이 다시 다음을 맞기 위해 자신을 다듬는 그 시간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P.S. 혹시라도 당신이 이 글을 우연히라도 보게 된다면, 한 가지는 진심이다. 당신이 더 행복하길 바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당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