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을 바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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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나 했더니···.
···그는 정말로 저렇게 말했다. 부하 직원 네 명이 독방 같은 밀실에 갇혀 컴퓨터 팬 소음만이 가득한 정적 아닌 정적이 흐르는 방이 꽉 차도록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우리는 그의 말 끝이 닫힘과 동시에, 정말로 그의 말처럼 되어가고 있음을 열렬히 깨달았다.
송도국제도시 현장사무소로 파견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을인 설계직에 종사하며, 갑인 건설사의 현장으로 불려 가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혹은 제대로 성사시켜 줄 생각이 없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감시를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일 계속되는 현장파견 근무 도중, 설상가상으로 우리 본사로부터 일방적인 조직개편의 통지를 받은 실장의 낯빛이 좋지 않다. 낙관적이고 평소 배려심이 넘쳤으며 자신만의 안위가 아닌 공동으로써의 안위를 늘 걱정했던 당시 나의 실장은 육두문자를 육성으로 내뱉으며 탄식했다. 단단했던 그마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내뱉은 탄식에, 위로의 여지랄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단말마의 푸념이었겠지만, 침묵할 뿐이었던 우리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요동이 틀림없이 도래한다는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기이하다. 그 안에 속해 있을 때는 뿌리치고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를 쓰면서, 어떠한 일로 그 밖으로 쫓겨나게 되면 욕을 내뱉고 울부짖으며 그곳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절규한다. 만일, ‘일상’이라는 단어가 실체를 가졌다면, 그것은 필경 무수히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한 형태일 것이다. 딱히 변동이나 특이점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뭐, 그저 그럭저럭 흘러가고 또다시 오는 그런 시간들 말이다.
일상이란 절박하도록 단순하고 지루하다. 우리는 이 가운데 속하여서 이것을 지독하게도 증오하고, 그 어찌할 수 없는 반복됨에 지쳐 음악과 글, 그리고 예술의 힘을 빌려 그것을 욕한다. 그렇지만 그 잔잔한 수면과 같은 시간들이 있기에 우리는 종종 물장구를 치기를 희망하고, 솟아오르거나 잠영하기를 희망한다. 그런 염원들을 우리는 일탈, 혹은 여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반면, 가끔 예기치 못한 너울이 일렁거리듯, 우리의 일상에서는 종종 요동이 일어난다. 일상은 마치 과냉각 상태의 물과 같아서, 자그마한 요동에도 순식간에 얼어붙어 깨어지기 쉬운 상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주체적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저 밖의 어떤 거대한 물결에 의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쉴 새 없는 폭풍우와 너울이 요동치는 가운데라면 물장구니 잠영이니 그런 것들은 사치에 불과할, 그러니까 바라지 못할 일들이다. 그런 일 가운데에서 집중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휘말렸다가는 이내 자세를 바로잡는 일밖에는 없다. 어른들의 일상은 요동 그 자체였을까. 그래서 어른들은 버틴다는 말을 자주 했던 걸까.
그래, 일상은 실존하지 않는다. 실존하지 않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 전체가 그런지 모를 일이다. 일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일관성을 가져보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일관성이 없다. 하물며 사람이 사는 삶이 일관적일 리 없다. 습관이나 성실함 같은 것은 일상 속에서 일관성을 구축하고 그것에 기대려는 우리의 본능일 뿐, 결국에는 실존하지 않는 리듬에 의지하려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어쨌거나 그런 부단한 노력들은 상관없다는 듯, 우리는 갑작스러운 재앙을 당하고, 도처에서 이별을 겪고, 뜻밖의 상실을 겪곤 한다.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에 감사하거나, 애써 기운 내려 노력하는 것 정도로는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그런 일들을 말이다. 그런 불확실한 슬픔 가운데 놓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습관을 찾는다. 슬픔을 떨쳐내 버리고, 또다시 일어서 걸어갈 힘이 되어줄 그런 습관들.
다만 그것은, 일상은, 믿음일 것이다. 마치 일렁이지 않는 물결처럼 평온한 시간들. 그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정진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내 어제들의 죽음을 추도하듯, 늘어선 비석들의 군집과 같이, 그것들을 무표정한 우수에 젖어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차가운 땅속에 묻힌 어제들은 우리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이 하는 말을 깨끗이 주워 담아, 내일에게 고이 전달한다. 내일은 어제처럼 희생되지 않기를, 그리고 평온에 당도하기를 바라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마지막 남은, 사람으로서 가진 일관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일관성들이 모여 일상을 실존케 하리라 믿는 힘을 말이다.